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115

엄원태, 애월 평문 애월 엄 원 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단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들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 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 , 12월호 -------------------------------------------------.. 2007. 11. 11.
고형렬, 경호원k 평문 경호원 K 고형렬 30대 경호원은 늘 빠르고 간결하다 경호원의 철학은 ‘간단’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늘 한쪽으로 기울었다 경호원 몸속엔 권총이 있다 그 권총이 자신의 유일한 노리개다 잠자리에서 그는 작은 여자에게 검은 권총을 만져보라고 꺼내 보인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독일제 권총 총알은 약실에 박혀 있다고 말한다 한 방이면 끝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럴 때, 권총은 남자 같다 그는 그녀 존재를 잊지 않는다 그에게 그녀는 울타리에 떠오르는 아침 해다 여름 내내 향수내가 은은하다 경호란 순식간의 본능적 감각이며 상대의 화약내를 먼저 맡는 후각이라고 노을을 본다, 피 같고 꽃 같다 그는 위기와 경계가 있는 잠자가 좋다 아니 그 속에 숨은 노란 딱지의 실탄 어떤 불립문자나 암호 같은 그는 그 생각을 하면 정말 경호원 K.. 2007. 11. 11.
서정학, 종이상자 평문 종이상자 서정학 그들은 공연을 위해 왔다고 했다. 종이상자 몇 개를 엎어놓은 듯한 그들의 비행선은 너무도 낡아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금방, 수거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도 사실을 알고 있는지 누군가 한 명은 꼭 남아서 비행선을 지킨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박힌 몇몇 부품은 이미 재활용된 듯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돌아갈 곳도 없었으니까. 초천자행성전문파괴강력무시더듬광선에 의해 파괴된 자칭 ‘아름다웠던’ 그들의 행성.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무한대의육감으로마구더듬는스페이스락, 이라는 그들의 전우주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저, 춤추기에 적당한, 그러나 박자가 좀 어리숙한 댄스음악 같았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더 노력하라는 쇼프로 프로듀서의 말을 들.. 2007. 11. 11.
한용국, 전윤호 시인 대담 - 도원에서 혁명사를 읽다가 한용국, 전윤호 시인 대담. 도원에서 혁명사를 읽다가 시인은 태백산을 닮아 있었다. 태백산은 어딘가 정겨우면서도 험한 겨드랑이를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산의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태백산의 진면목이 궁금하다면, 정선에서 만항재를 지나 정암사로 내려오는 길을 완행을 타고 내려와 보거나, 혹은 겨울 정암사에서 한 십오분 정도 헐떡거리며 수마노탑에 올라 바라보이는 산을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여름에는 한껏 감추고 있던 야성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우뚝삐죽 솟아 있는 산들, 전윤호 시인은 마치 그 겨울의 봉우리 하나와 마주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을 마친 뒤 주욱 팍팍한 서울 살이를 해 온 시인은, 용케도 그 태백이랄까 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강원도에.. 2007.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