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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서정학, 종이상자 평문

by 목관악기 2007. 11. 11.


종이상자


                     서정학


그들은 공연을 위해 왔다고 했다. 종이상자 몇 개를 엎어놓은 듯한 그들의 비행선은 너무도 낡아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금방, 수거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도 사실을 알고 있는지 누군가 한 명은 꼭 남아서 비행선을 지킨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박힌 몇몇 부품은 이미 재활용된 듯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돌아갈 곳도 없었으니까. 초천자행성전문파괴강력무시더듬광선에 의해 파괴된 자칭 ‘아름다웠던’ 그들의 행성.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무한대의육감으로마구더듬는스페이스락, 이라는 그들의 전우주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저, 춤추기에 적당한, 그러나 박자가 좀 어리숙한 댄스음악 같았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더 노력하라는 쇼프로 프로듀서의 말을 들었다며, 그들 중 하나가 눈물을 흘렸다. 몰락한 왕조의 구슬픈 삶처럼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나, 그들이 뜨겁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을 원료로 하는 종이상자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들은 연습을 위해 밤늦게까지 웅얼거리며 시체처럼 힘없이 걸어다닌다. 빨리 비행선이 날 만큼 사랑을 모아 집 마당이나 비워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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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한용국


서정학의 ‘종이상자’를 오래 품고 읽다가 문득, 실재는 소환되는 동시에 부재하고, 부재는 소환되는 동시에 실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실재와 부재 사이에 시적 상상력이 놓여 있을 것이다. 부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적 가상의 형식과 여기가 아닌 다른 모든 장소라는 공간적 가상의 형식을 갖고 있으며, 실재는 지금아러눈 시간적 형식과 여기라는 공간적 형식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조건은 부재가 아닌 실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여기는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로 인하여 위치지어지는 것이다.

서정학의 시 ‘종이상자’는 이렇게 현실-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부재-가상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그 부재 - 가상은 지구가 아닌 우주적인 더구나 낯선 것이다. 시적 화자는 지금 앞마당에 쌓여 있는 종이 상자를 보고 있다. 그 종이 상자에는 뜨거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종이상자를 시적 화자는 비행선으로 치환해 버린다. 그리고 상상력은 확장되기 시작한다. 비행선 속의 그들은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 음악가들이 되고,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 무한대의 육감으로 더듬는 스페이스락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성이 초천자행성전문피괴강력무시더듬광선에 의해 파괴되었듯이 스페이스락을 하는 외계인들의 음악은 철저하게 쇼프로 피디에 의해서 무시되고 외계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주 노력없이 되는 것은 없다는 아주 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 그들의 꿈은 뜨겁게 사랑받을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늘 밤마다 웅얼거리며 걸어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가볍게 정말 가볍게 말한다. ‘집마당이나 비워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실재는 무엇일까. 부재 - 가상으로서의 우주적 상상력은 묘하게 현실과 대응된다. 이 시는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체험하는 여러 현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종이상자,를 어떻게 읽을까하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어떤 전자제품(굳이 전자제품이 아니라도 좋다)을 담았던 종이상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담겨 있던 내용물이 빠져나가고 버려진 종이상자는 용도폐기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사물에 새로운 상상력을 덧씌워 전혀 다른 공간과 시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를 소환해 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실재는 이제 가장 흔한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소외가 횡행하는 실재이다.  초천자행성전문파괴강력무시더듬광선이 그렇다. 그 광선은 아마 우리의 행성마저 파괴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 소외된 자들의 음악은, 무한대의 육감으로 마구 더듬는 음악이다. 그렇다 어쩌면 철저하게 소외된 자들만이 실재를 가장 감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히 ‘무대’에 설 수 없을 것이며. 영원히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행성을 꿈꾸면서 유령처럼 떠돌아 다녀야 할 것이다. 이 현실은, 아니 이 지구는 외계적 상상력에 의해서 절망적인 철저하게 절망적인 실재로 분명하게 소환되는 것이다.

비행선이 부재하는 뜨거운 사랑을 모아 날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현실-실재의 세계는 부재-가상의 세계로 변할 수 있을까. 서정학의 종이상자는 두 세계를 겹쳐 놓는 동시에 역전을 꿈꾸고 있다. 부재 - 가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렇지만 서정학은 그 세계를 통해 당위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불러 오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