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엄 원 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단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들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 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 <현대시>,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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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한용국
기억은 죽음보다 멀다. 우리는 죽을 수는 있지만 과거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기억은 끝없이 정서적으로 현현한다. 그렇게 현현할 때마다 기억은 자신의 몸을 끝없이 바꾸어 재생한다. 아름다운 기억이든 끔찍한 기억이든 동일하게 되풀이되는 법은 없다. 그리고 기억은 끝없이 기억이 거느린 풍경 속의 사물들을 바꾸어가며 소환한다. 그러므로 기억에 대해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분명히 그랬어’, 라는 말은 ‘분명히 그랬을거야’라는 추측의 어미를 거느리게 된다. 그 기억 속의 풍경이 밤 풍경이고 거기에 더하여 달이 떠 있는 풍경이었을 때, 기억의 화학작용은 무한한 이미지를 거느리게 된다.
엄원태의 시는 달빛 속의 기억을 펼쳐서 보여준다. 시간이나 공간만큼 상대적인 것이 있을까. 물리적 시간이나 공간은 언제나 심리적 시간과 공간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과 함게 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 도로’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맨발로 걸었던 콘크리트 방파제의 길과 달빛 속에서 누군가를 업었던 아름다운 시간, 사실 그렇다. 끔찍한 시간은 언제나 길고, 아름다운 시간은 언제나 짧은 것이다. 그 속에서 시적 화자는 달빛에 젖은 한 세계를 ‘등에 업는다’ ‘갈치잡이 뱃불’과 ‘샐쭉하던 초생달’과 ‘묶여 있는 배들’과 그 속에서 스치는 ‘밤바람 속살’까지도. 아름다운 풍경과 업힌 대상마저 동일시 된다.
그리고 시인은 그 풍경을 ‘덧없음’으로 인화해 낸다. 그렇다. 기억이나 추억만큼 덧없는 것이 또 있을까. 끝없이 부재하면서도 순간순간 현존하는, 기억이나 추억은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동시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즉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기억이나 추억이다. 그래서 시인은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고,‘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고 말한다. 흰 그늘 백지 한 장은 달빛 한 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애월의 기억을 묻는다면 시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간절한 그리움일 것이다. 가장 간절한 기억이야 말로 가장 간절한 덧없음의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니까 말이다.
달빛을 거느린 채, 간절함에서 덧없음으로 진행되는 엄원태의 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아름다운 처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거나,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 한 장을 앞에 둔 마음이 우리가 기억을 대하는 마음이 아니겠느냐고 시인은 백지 한 장을 앞에 내 밀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엄원태의 시를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 시작한다. 한 행 한 행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무엇인가에 젖어들고 있는 것처럼 몽환적이 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서서히 시인이 제시한 풍경이 내게로 옮겨 오고 있는 것일까. 시 속의 시인의 등에 달빛과 함께 업혀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시를 천천히 다 읽고 다시 시를 본다. 놀라워라, 정말 시는 사라지고 흰 백지 한 장만이 처연하게 책상 위에 얹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