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국, 전윤호 시인 대담. 도원에서 혁명사를 읽다가
시인은 태백산을 닮아 있었다. 태백산은 어딘가 정겨우면서도 험한 겨드랑이를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산의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태백산의 진면목이 궁금하다면, 정선에서 만항재를 지나 정암사로 내려오는 길을 완행을 타고 내려와 보거나, 혹은 겨울 정암사에서 한 십오분 정도 헐떡거리며 수마노탑에 올라 바라보이는 산을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여름에는 한껏 감추고 있던 야성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우뚝삐죽 솟아 있는 산들, 전윤호 시인은 마치 그 겨울의 봉우리 하나와 마주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을 마친 뒤 주욱 팍팍한 서울 살이를 해 온 시인은, 용케도 그 태백이랄까 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강원도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나 또한 강원도에서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와는 십년 저쪽으로 약간 다르지만, 예전에 홍상수 감독이 ‘강원도의 힘’이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나라에 강원도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강원도를 여행하고 나면 내면에서 무언가 변한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게다가 그곳이 고향인 사람이야 더 할 말이 있을까.
전윤호 : 가끔 힘들고 지치고 그러면 정선으로 내려가요. 전 고한이나 사북 쪽으로는 잘 안다니고 거의 정선읍쪽에서 살았지요. 그 쪽은 탄광이 없어서 물도 까맣지 않고,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때 고한 사북은 인구가 굉장히 많았죠. 탄광 부흥기였으니까. 아마 고한 사북만 합쳐도 한 십만은 되었을거예요.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강원도에서만 살았어요. 그리고 대학시절부터 서울에서 살았죠. 그러니까 살아 온 세상이라고 해야 서울과 강원도가 전부예요. 나머지는 여행을 통해서 그냥 스쳐 다닌 정도지요. 아무래도 사학과를 전공했으니까요. 어쨌든 제게는 서울과 강원도라는 삶의 공간만 존재하지요. 뭐랄까 대비적이랄까. 시골과 도시..음..이런 것은 아닐거 같지만요. 어쨌든 서울에 살면서도 아직도 저는 남의 땅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서 먹과 살려고 와 있다. 내 고향은 강원도고, 나중에는 꼭 내려간다. 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살다 힘들고 지치면 내려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돌아오곤 하지요. 아 한시인도 강원도..월정사에 살았다고 했지요. 소설 쓰는 김도연씨가 월정사 근처에 살고 있을텐데, 이번 초파일에는 월정사에 가서 스님들과 축구 한 판 하기로 예약이 되어 있어요. 음, 한 시인은 그러면 그쪽 스님들 편으로 출전하도록 해요. (함께 웃음)
전윤호 시인은 [이제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문학세계사, 1995), [순수의 시대](하문사, 2001).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상자했다. 약 오년 만에 한 권씩의 시집을 낸 셈이니 다작이라고 할 수는 없고 과작의 시인인 셈이다. 첫시집과 두 번째 시집은 두 권 다 시적 공간이 이분화 되어 있는데, 하나는 서울이라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정선이라는 공간이다. 서울 - 지금 여기,에서 그의 시들에 나타난 서울에서의 삶은 피로와 도시적 야만의 구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삶은 ‘불법체류자’(이제 아내는,p20)와도 같은 삶이다. 모국에서의 삶을 ‘수상한 눈빛 조심스러운 발소리가/사방에서 죄어들고 있는 여기는 타국’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강팍하며, 또 ‘허깨비(이제 아내는, p29)’처럼 신경증적 억압에 시달려야만 하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끔찍한 삶이다. 그리하여, 여름 휴가에서 그는 ‘기둥만 남은 다리에서/ 팔뚝만한 메기 건지며/돌아가지 않겠다 죽어도/전같이 살진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런 삶이다. 시인은 지금 여기 - 서울의 삶을 “ 내게 세상은 적지의 링이었다/매수된 심판과/내가 쓰러지는 것을 기다리는 관중들만 가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한 패배의 삶이 아니라 패배 자체로 삶의 모순과 대결하는 강인함을 “침을 흘리는 폐인이 되기 전에/챔피언을 쓰러뜨리든지/대전료를 챙기는 매니저를 패고 싶다”는 시구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삶이 정선 - 유년으로 향할 때 그는 아래의 시와 같은 절편을 보여준다.
오리
무당의 딸은 짝이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교실 뒤 언덕을
혼자 오르곤 했다
가끔 오리알을 싸왔다
먹을 수도 없을 것처럼 하얀 오리알
무당의 오리들은 잔잔한 강에서
연꽃처럼 떠 있다가
우리들 돌팔매를 받곤 했다
한 두 마리 목을 꺾고 떠내려 가기도 했다
회의에서 혼자 표적이 되어 진짬 흘리고
골목에 숨어 홧술을 마시면
어느새 내 자리엔 강물이 넘치고
목이 부러진 오리들이 떠내려 온다
허우적거리는 내 옆에서 그녀가 가만히
하얀 오리알을 내민다.
- [이제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문학세계사, 1991)
전윤호 : 두 번째 시집은 대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요. 두 번째 시집의 키포인트는 도원과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두 개가 되겠지요. 도원은 동양적 이상향과 고향을 섞어놓은 것이예요. 원래 정선의 옛날 지명이 도원이거든요. 이제 옛날의 고향과 지금의 정선은 아주 많이 달라졌지요. 폐광이 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가고, 거의 폐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그것을 기억 속에서 재구성했다고나 할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서울에서는 완벽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첫 번째 시집에서 말한 것처럼 ‘불법체류자’로서의 삶이지요. 비유하자면 정선은 강의 상류고 여기는 강의 하류인데, 상류에 살다가 떠밀려 내려온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첫시집은 아무래도 등단한 이후로 쓴 시를 모았다고 할 수 있구요. 두 번째 시집은 주제를 가지고 썼다고 할 수 있죠. 첫시집은 내가 살아왔던 환경 등에서 얻은 것들이예요. 강원도의 삶과 강원도 사람이 서울에 와서 느끼는 낯설은 감정들이지요.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 두가지 주제를 좀 더 파고들었어요. 그래서 아까 말한 두 가지 주제가 나온 거구요.
두 번째 시집에서 순수의 의미는 역설이지요. 두 번째 주제와 관련된 역설말이지요. 순수의 시대라는 영화가 그때 있었어요. 꽤 괜찮은 영화, 미국의 십구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 안 순수한 이야기였어요. 유부남이 된 남자가 이혼한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괜찮았던 기억아 나요.
물론 ‘이제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도 역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시집 안에 그 제목을 가진 시가 있어요. 첫 번째 시집은 데뷔시집이고 특별한 개성이 안드러나니까 가장 인상적인 제목 중에서 하나 골랐죠. 김요일 시인이 시집을 모두 편집했는데, 김요일 시인이 그 시의 제목을 시집 제목으로 밀었어요. 전체적으로 마누라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물론 마누라 개인이 아니라 여성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마누라이지만 말이지요. 그렇다고 제 어법이 여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목소리가 굵은 편이고, 사소하지만은 안지요. 내 시에서 기껏 여자라고 나와봤자 마누라 밖에 없는 정도니까요.
시인은 1990년에 현대문학에 조병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64년 생이니 올해 나이가 마흔 둘이다. 시력 십이년과 마흔이라는 나이, 마흔은 불혹이라고 했는데, 나는 문득 시인에게 마흔은 어떤 시기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말한다. “서른 아홉에서, 마흔 넘어가는 게 예사롭지가 않더라구요. 두 편이나 썼죠. 말로 하면 뭐해, 한 번 시를 보는 걸로 하지요.” 하면서 곧 출간될 세 번째 시집 중에서 서른 아홉이라는 시를 꺼내 보여준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는 것을 전윤호 시인은 인터뷰 내내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미리 공개해도 될 지 모르지만, 서른 아홉이라는 시를 전재하기로 한다. 그의 시, ‘서른 아홉’에는 알량한 평론적 언술로는 재잘거리지 못할 절실함이 있어서 그렇다.
서른 아홉
사십이 되면
더 이상 투덜대지 않겠다
이제 세상 엉망인 이유에
내 책임도 있으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하다
아침이면 목 잘리는 꿈을 깨고
멍하니 생각한다
누가 나를 고발했을까
더 나빠지기 전에
거사 한 번 해보자던 일당들은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
하루 세 시간 출퇴근하고
열 두시간 일하고
여섯 시간 자고
남은 세 시간으로
처자식을 보살핀다
혁명도 없이 지나가는 서른 아홉
지루하기도 하다
나는 시를 읽고 대뜸 시인에게 혁명의 의미를 물었다. 이야기는 혁명으로 시작해서 문학수업과 문학의 스승들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전윤호 : 제게 시인이 꿈꾸는 혁명은 뭐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시인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해요. 현재 체제를 몽땅 뒤짚어 엎어버리는 혁명이지, 언젠가 이형기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말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말은 “시인은 실패한 혁명가다”라는 말이예요. 저는 미당과 이형기 선생님에게 시 창작론을 들었었거든요.
저는 91년 현대문학에 조병화 시인의 등단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조병화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요. 추천한 다음에 알게 되었을 뿐이지요. 그 이후 만나뵙게 되면 인사나 드리는 정도랄까. 하지만 시집을 보내드리면 꼭 친필로 엽서를 써서 보내주셨어요. 그게 제일 인상적이었지요.
문학수업이라면, 음. 저는 대학졸업하고 현대문학에서 하는 시창작 강좌를 들었어요. 그때 이건청 시인한테 강좌를 들었고, 이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게 되었으니까 배웠다고 치면 이건청 선생한테 배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죠. 학부는 동대를 나오고, 게다가 국문학과도 아닌 사학과를 졸업하고, 배우기는 그 당시 다른 계시던 이건청 선생한테 배우고, 제가 좀 그래요. 음, 나쁜 점은 등단 이후에 한 사람한테 보살핌을 못 받는다는 게 있지만, 또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시인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시인 축구단인 ‘글발’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시인들이 하는 축구라!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마치 모순형용처럼 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물론 나는 국민약골에 비견될만한 체격을 갖고 있어서 그곳에 가입하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까뮈도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실존주의자의 축구, 축구공 앞의 고독, 그리고 전윤호 시인도 사실은 축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몸매(?)를 갖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전윤호 시인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내가 레슬링을 한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비교된다고나 할까. 시인들의 축구는 은유와 역설, 그리고 포에지와 진정성들로 가득할까?
전윤호 : 시쓰는 사람들끼리 만나서는 시 이야기가 참 어려워요. 등단 후 정진규 선생님이나 김종회 선생님, 고은 선생님들과 만나서 자주 이야기하는 편인데, 문학적인 거 가지고는 얘기한 적이 없어요. 분위기로 짐작을 하고, 돌려 듣고 그러죠. 우리 축구팀의 금기사항이 또 시 이야기하지 말자예요. 시 이야기를 하면 다치는 사람이 생겨요. 그건 정답이 없으니까요. 정답도 없는 데 싸워봐야 뭐해요. 아예 시인들끼리 모여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말고 축구 얘기나 하고 술이나 먹자. 그게 아주 현명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오래가는 거예요.
등단 후 만나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김진우, 조현석, 이진우. 이윤학, 허혜정등 여러명이 있지만, 서로 만나서 시 얘기는 잘 안해요. 이제서야 나이 먹었다고 뭐 시가 좋드라..너무 칙칙한 게 안좋다..정도지요. 시인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시인들 시를 열심히 보고 분석하는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 저는는 눈여겨 안 보려고 노력해요. 나도 모르게 비슷한걸 쓸까봐 그렇죠. 지금은 나도 내 이름 가지고 써도 내 스타일이라는 거 아니까. 그런 상황에서 남하고 비슷하게 쓰면 치명적이죠. 어떤 시인들은 그럴까봐 오히려 더 눈여겨 본다고 하더군요.
축구는 제가 너무 좋아서 시작한거는 아니예요. 저는 수영같은 건 잘해요. 그런데 살이 너무 쪄서(웃음) 축구는 잘 하진 못해요. 그런데 나하고 친한 사람들이 죄다 축구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는 와중에 골키퍼를 하게 됐어요. 사실은 콜키퍼가 제일 위험한 자리예요 제일 많이 다치죠. 김중식시인이 골키퍼를 하다가 옆구리를 다치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하면 덜 다치겠다 싶어서 골키퍼를 했는데, 그 이후로 붙박이 골키퍼를 하고 있지요. 그 동안 다리만 두 번 부러졌어요. 하지만 골키퍼란 자리는 정말 매력이 있는 자리예요. 골키퍼는 축구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골키커 가지고 시는 안나오더군요(웃음) 언젠가는 나오겠죠.
네이버에서 전윤호,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면,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고, 실은 네이버의 블로그에 주로 올려져 있는 전윤호 시인의 시가 ‘내 사랑은’[순수의 시대](2001, 하문사)이다. 그 시에서 그는 ‘내 사랑/당신은 나의 무덤이야’라고 말한다. 혹시 진한 연애이야기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은근슬쩍 물었다. 주로 사람들이 내 사랑은,이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혹시....?
전윤호 : 그게 어디 신문에 한 번 나왔어요. 경향신문인가 어딘가에서 한 번 다뤘어요. 그 시를 이상하게 좋아하드라구요. 나는 아무 생각없이 썼는데, 소설쓰는 전경린도 시집을 줬더니, 그 시를 대뜸 집어내더군요. 사랑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쓴거 같다는...그게 아닌데..(웃음)
내 또래 보통 사람이 연애한게 백퍼센트로 친다면 저는 오퍼센트도 안되요. 연애가 싫다기 보다는 여자 공포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누구에게나 유년의 상처가 하나씩은 있는거지만, 제가 계모슬하에서 커서 여자들하고 원만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요. 집사람과는 대학시절에 만났는데, 스물 여섯에 결혼했으니까요. 그 시절은 다들 빨라야 스물 아홉인데 말이지요. 저는 늘 생각하는 게, 내 시는 평론가들이 주목하기 어려운 시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냥 시 속에 다 나오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쁜 시가 아니니까 독자도 없는 시고, 그런데 최근에는 내 사랑은 같은 시가 블로그에 많이 올라가 있다고 한 번 검색해 보라고 하더군요. 물론 안했지요. 한 십년 동안 반응이 없이 시를 쓰면 저처럼 무심해져요.
엄격하게 읽으면 그게 사랑시가 아니죠 ‘내사랑은’도 그저 남자의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지요. 결정적으로 내 시스타일이 사랑시에 어울리질 않죠. 내 사랑은..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지요(웃음) 사랑으로 넘어가면 할 말이 별로 없어요. 남자와 여자의 이기심은 있어도 진정한 사람은 못본거 같애요. 부모와 자식의 사랑 말고는..서로 만나면 일이년 지나면 다 식어버리니까. 그게 시인이 얘기하는 진정한 사랑은 아닌거 같애요. 그런데 세 번째 시집에는 사랑에 관한 시가 많아요. 나는 예심에서도 사랑시는 다 빼요. 그래놓고 세 번째는 들어가는 데, 김남조 선생이 그러시드라구요. 사랑시를 쓰면 잘 쓸거 같다. 그렇게 까지 얘기를 하시는데..해서 몇 개 써봤어요.
시인은 시골의 의사 집안의 십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세상에 십남매라니! 부모님의 영향탓으로 집안의 형제들 모두가 이과나 공학계열로 진학했다고 했다. 그런데 시인만이 막내라는 이유로 문과 진학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결국 국문학 전공에는 실패했고 그리하여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력은 그의 시에도 나온다 “너처럼 모난 놈은 어디 시골 구석에서 훈장이나 하면 딱 좋은데”(프랑스 혁명사를 읽다가,[순수의 시대, 하문사 2001] 나는 정말 성격이 모났냐고 물었다. 시인은 “제가 좀 모나긴 했지요. 목소리도 그렇고, 제게 전화한 사람들이 다 그래요. 자다가 받았냐, 뭐 기분 나쁜 일 있냐,(웃음) 어쨌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 시인이었어요. 지금도 친구들이 내려가면 그러죠. 어릴 때 우리가 꿈꾸던 거 중에서 제 꿈대로 사는 놈은 너 하나 밖에 없다” 시인은 지금 ‘다시’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시인의 서울살이는 시인의 말에 의하면 이렇다. “대학 졸업후 삼년 정도는 태평양 그룹 영업사원을 했죠. 여자 란제리 그러니까 속옷 영업사원을 했어요. 그걸 삼년쯤 하다가 보니 도저히 아닌거 같애. 실적이 나빳던 것도 아니고 빠르게 승진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무작정 문학세계사로 가서 출판을 가르쳐 달라고 했죠. 그 이후로 꽤 여러 곳에 근무했죠. 고려원편집장, 문학수첩 등에도 있었고. 그러다가 제 출판사를 차렸어요.” 그러면서 시인은 출판업의 불황을 걱정했다. 아! 그리고 시인은 올해 세 번째 시집을 상자할 계획에 있다. 제목은 ‘연애소설’이다. 나는 시인에게 대표작과 시론에 관해 물었다. 시인은 대표작에 대해서는 겸손해했고, 시론에 대해서는 거창함을 피했다.
전윤호 : 시집이 겨우 두 개인데, 겨우 두 갠데 그럴만한게 있겠어요? 시집을 오년에 한 번 정도 내는 건데, 많이 쓰지를 못해요. 과작인데다가, 내 시를 외우는 것도 없어요. 어디가서 시 한 번 외워보라 그러면 정말 싫어요. 왜 자기가 쓴 시를 외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인지. 대표작이라고 할 것은 없고, 첫 번째 시집에서 제일 좋아햇던 시는 ‘버스 567’하고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이예요. ‘버스 567’은 등단할 때 끼어 있었던 작품이고, 둘 다 인제, 촌놈이 서울 올라와서 겪은 일들이지요. 음, 그 시집에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이제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시하고 ‘허깨비’라는 시가 있는데 그걸 좋아하더군요. 두 번째 시집에서는 아무래도 ‘도원’시리즈가 되겠죠. ‘프랑스혁명사’를 읽으면은 감정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읽으면 내가 기분이 좋질 않아요. ‘내 마음의 쿠르드족’ 정도를 좋아한달까요. 내가 좋아한다고 좋은 시는 아니에요. 그저 스스로 읽으면서 기분이 좋은 정도지.
세 번째 시집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무기교의 시라고 할까요.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 아무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지인에게 시집 원고를 보여주었더니 생각 그대로를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더군요. 그게 내가 바라는 바고 노리는 바예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거는 알거예요. 세 번째 시집은 정말 생각나는 대로 썼구나, 그렇게 읽히기를 바래요. 원래 작년에 나왔어야 하는데...작년에 창작기금을 받았으니까요..박철화 시인이 평론을 쓰기로 했어요, 곧 평론이 도착하면 시집을 낼 거예요. 아마 출판하게 되면, 제 출판사에서 하게 되겠지요. 무명시인이 제일 고통스러울 때가 시집 낼 만한 곳이 없다는 거예요(웃음). 제목이 ‘연애소설’이예요. 연애 하고 소설이 주는 느낌을 시로 썼다고 생각하면 나오는 느낌이 있지 않아요. 왜 시집 제목이 소설일까. 연애 소설은 편집자 쪽에서는 형식을 가죠요. 해피앤딩이라든가, 불우한 주인공이 부유한 여자를 만난다든가..
아, 그리고 제가 서사시 연구회라는 것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서사시가 워낙 없기 때문에, 지금 김용범, 최영규, 나, 안명옥, 김용국 시인등이 있는데, 김용범 시인이 서사시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는 입장이지요. 세번째 시집 한 다음에는 서사시쪽을 공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 번 써 볼 생각이예요. 나도 전공이 역사이기도 하니까. 서정시로 신변잡기적인데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 간의 내 시처럼 신변잡기적인 것도 없지만요(웃음). 지금 서사시연구회는 김용범시인이 좌장이고 제가 회장이고 그렇지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쓰자가 내 시론이예요. 난해시 쓰는 것보다 서너 배는 힘들거예요. 하지만 한 번 읽고나서 또 읽어도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는 그런 시 쓰고 싶어요. 뭐 개인적으로 못 깨달아도 상관없으니까. 아 참고로 전 시론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경기해요.(웃음)
창밖으로 해가 설핏 기울고 있었다. 신수동의 오후 세시 무렵이었다.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옆에는 문학세계사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국민일보 사옥이 보였다. 시인과의 인터뷰 때문에 처음 가 본 동네지만, 신수동은 뭐랄까, 숨쉬기 좋을만한 공기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그랬다. 서울이라는 곳은 정말 동네마다 풍기는 기운이 다른 기이한 도시다. 언젠가 시인과 태백선 열차를 타보고 싶다. 예전에는 통일호가 다녔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무궁화호가 다닌다. 통일호가 다닐 때는 도로빠꾸 터널이라는 게 있어서(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기차가 올라갔다가 다시 후진해서 되돌아왔다가 다시 전진하는 산악터널이 있었다. 시인과의 만남은 마치 그 터널 속을 열차 안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계란을 서로 건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시인을 등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길, 나는 문득 귀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아뜩해졌다. 정암사에는 수마노탑말고도 태백산 일대에 금탑과 은탑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2005년 4월 현대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