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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시, 청동

피망론 외 4편

by 목관악기 2018. 7. 2.



계간 시와 산문, 2015년 여름호, 특집






피망론


한용국



다만 피망이 싫을 뿐이다. 피망만 아니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삼킬 수도 있었다. 오래 쓰다듬어 줄 수도 있다. 그때 거기에 피망이 놓여 있지 않았다면, 피망을 집어들지 않았다면, 파라리 피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 피망은 내 눈 앞에 둥둥 떠서 살아간다. 피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피망이 원죄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무슨 피망 따위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너무 피망에 너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니냐, 충분한 의지가 있다면 그깟 피망 따위는 벗어던질 수 있다. 사실 내 삶의 대부분을 피망을 벗어던지기 위하여, 피망에서 달아나기 위하여, 피망에서 숨기 위하여 바쳤다. 어떤 이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도대체 네 눈 앞에 무슨 피망이 있다는 것이냐. 눈에 피멍이 들어 헛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냐. 그래도 내 눈 앞에 피망이 있다고 우기면, 피망에 대해 지루한 강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중 몇몇은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피망에 대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아예 피망인 것처럼 행동해 본 적도 있었다. 몇몇은 고맙게도 피망으로 규정해주기도 했다.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피망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자마자 쉽게 떠나갔다. 나처럼 피망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두려워하며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피망인데도 피망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눈 앞에 피망을 매달고 살아가게 된 것일까 연구해 본 적도 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때 거기에 피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망을 집어든 순간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피망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이제는 피망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피망이 내 행세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피망이 싫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피망, 피망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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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 찾아서 4


한용국





독 묻은 옷을 입고 걸어가는 

사제들의 행렬을 바라봅니다


허공은 죄많은 햇살들로 뿌옇습니다

죄를 퍼뜨린 자들은

방독면을 쓰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좀 더 깊이 가라앉기 위하여 

밤마다 꿈 속에 돌을 채워넣었지만

아침마다 머리 맡은 압정으로 가득합니다


애도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얼굴에 헐떡이는 섬을 얹은 채 

난감한 표정들로 쫒겨다닙니다


피묻은 숫자들을 물고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신발들은

본래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죄 속에서 아이들은 깔깔거립니다

죄 속에서 봄꽃들은 피어납니다

죄 속에서

머리 속으로 자꾸 머리가 돋아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마음이 됩니다


저 흰 얼굴의 사제들에게

독 묻은 옷을 입힌 자들은 누구입니까


누군가 칼을 들면

등 뒤에서 일어서는

바람을 보여주겠습니다

노래에 독을 가득 묻히고

새로운 진화의 자세를 학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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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나무


한용국



창 밖의 나무들은

생각을 먹고 살아간다

삶이었을까

살이었을까


그걸로 생활이 되느냐고

나무에게 물었다

뿌리가 싹을 비집고

올라오는 얼굴이 있었다


저녁 울음 속으로 

피어오르는 슬픔 스밈

스침 스러지는 빛을 

단련하는 것만으로


나무의 생각은 

부드럽고 완강한 어깨로

다정한 종소리를 던져온다


골목보다 깊은 치정을 알고

전신주보다 높은

사랑을 생각하는

창 밖의 나무

나무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살아가는 

나무


상반신만 둥둥 떠 있지만

안심해라

문제는 생활이 아니다

어느 날부터 

창틀 속으로 뿌리내리고

유리창을 중얼중얼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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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한용국



타인에게만 도착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자만 가득하군요


빌려주기도 합니까

찾아가지 않아도 배달해 줍니까

말로는 되지 않습니까


위대하거나

존경스럽지 않은 무게로도

도착하는 것이 있습니까


압도적이었으면 좋겠지만

초라하기만 해서

우리는 조그맣고 착한 리본이 됩니다


딩동!하고

어젯밤의 악몽이 쫒아오는 하루를

헐떡거리며 먼저 도착하고 있지만


언제나 뒤에 남겨지는 우리는

몇 개의 팔과 다리를 가져야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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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


한용국




맑았다가 흐렸다

비둘기 한 마리 전선 위에 앉아있다

간판아래로 비스듬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화 몇 켤례를 떠올려 본다

어쩐지 모두가 푸른 색이었다

취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어깨를 빌리러 달려나가는 것이다

어떤 나이는 예언과 도무지 상극이어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는 짐작하기 힘들다

이런 날씨에는 팔도 다리도 내 것은 아니다

몸 속에 감추어 둔 장기들도 마찬가지

잃어버린 우산 속에 끼워 둔 웃음은

어디서 굴러다니고 있을까

꿈 속에서 아이를 안고 바다속으로 들어갔다

가방에 슬픔을 가득 담고

어제의 날씨는 어디로 걸어가는 것일까

누군가 던진 돌들로 머리를 채우고 간신히 떠 있다

눈동자 속에서 또 다른 눈동자가 빛난다

다행히 애인은 잠들어 있고 친구들은 먼 곳에 산다


멀리서 어떤 물도 돌아눕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불은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