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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시, 청동

애인아 울지마 외 4편

by 목관악기 2018. 7. 2.


시작, 2015년 봄호, 특집 






애인아 울지마



한용국




애인아 울지마. 이제 어제 일이니까. 발 닦고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돌아서서 기침해. 등 뒤로 흘러내리는 어두운 땀은 잊어버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거야. 낭만주의는 없다고 배웠잖아. 눈 뜬 채 물에 얼굴 담그고 심호흡 해봐. 미필적 고의 아니고 필연적 우연 아니고, 손가락 목에 넣는 일 따위 더더욱 아니지. 꺽꺽거려보면 킥킥대게 되. 발작적으로 웃는 꽃의 얼굴 생각해. 뿌리까지 저릿저릿한 날들이었어. 할 수 있는 일 따위 없었지. 허무주의 아니야. 단지 나열되었을 뿐. 순서없이, 쾌락없이, 그저 누군가의 곁에. 가갸거겨 나냐너녀. 오렌지와 설탕과 아무렇게나 펼쳐진 페이지가 된 거지. 낡아가는 눈 모으고 열심히 보는거야. 눈알 뒤편으로 사라진 세계 떠오를 때까지. 버스를 놓쳤던 얼굴들, 도둑맞은 물건들, 찢어버린 영수증들 힘차게 외쳐보는거야. 메아리가 가슴 속에서 자라 왼쪽 귀로 빠져나오면, 오늘과는 완벽하게 다른 웃음 가지게 될거야. 새로운 트로피가 될거야. 사실 우리는 사람 아니고, 새들의 꿈인 거니까. 새들조차 우리 정체 알지 못하니까. 어두운 통로로 은밀하게 여기 왔잖아. 꿈이 생산한 이물질 되어 꿈의 세포들 공격하면서. 노령화되는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왔잖아. 실망은 실망, 희망은 희망, 우리에게 해당되는 측면은 아니었지. 당연해.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우리는 무기 없는 존재들. 칭찬과 비난 사이로 공격적인 이파리들을 날려보낼 뿐. 15층의 낙관적 전망, 29층의 낭만적 시야 따위 개나 줘버려. 소박하게 유리창에 비치는 정체성을 사랑할 뿐. 매일 아침 일어나고, 현실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러니까 애인아 울지마. 거짓말이니까 거짓말의 옆얼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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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



한용국



1.


당신은 고통을 사러 떠나가고

방에서는 죽은 화분이 끓어오른다

어제의 꿈은 오늘을 정확히 예측했지만

쉴 새없이 격렬한 기침이 쏟아진다

검은 흙 속에서 마른 꽃잎들이 쏟아진다

돌을 삼키고 나를 낳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2


끓어오르는 화분 속으로

하나의 무덤이 끝나고 다른 무덤이 일어선다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끓는 뿌리에 혀를 데인 마음으로

창틀은 유리창을 악물고 

차오르는 저의 흘수선 위로

고통이 고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눈 먼 미래에서 시작한 사람이 된다


3.


울기만 하면 뿌옇게 흐려지겠지만

문 밖에 누군가 도착할 것 같아서

가슴에서 정수리로 끓어넘친다

검은 흙을 헤집고 솟아나는

증기의 얼굴들

골목으로 흘러나가 생활을 이루고 싶었으나

고통을 이루려는 물방울과 

고통을 버리려는 물방울 사이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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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 찾아서 3


한용국



언제부터 약속은 웃음을 잃었습니까


마술을 잃어버린 마술사의 꽃밭은

검은 재들로 덮여 있습니다


처음으로 눈을 갖게 된 사람들이

골목마다 우글거리는군요


소리없는 종들이

구름에서 떨어집니다


훔쳐보는 자들의 발등에

끓는 물을 붓고 싶습니다


달의 십이진법이

구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압정만 가득 쌓여 있습니다


열심히 열심히 살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 흐르는 물에 머리를 눕히고

등껍질에 붙은 불을 끌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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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한용국



안개

속에

일그러진

표정 한 채

속에

말을 묻고

속에서

뿌리 들추고

흐르는 

피 씻고

울음소리

한 올
꺼내

듣고

석달 열흘

멈춰 서

속을

들여다 보며

속보다 

먼저 

몸을 

통과해 버린

허기를

방전 중인

짐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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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UFO



한용국



셔틀콕을 찾으러 지붕에 올라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셔틀콕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들었더니 작은 섬이 떠 있었다

훌쩍 뛰어 오르면 닿을 것 같은 그 섬에는

해변 가에 야자수가 몇 그루 서 있고

잠수함은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잠망경이 섬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바나나도 있고 파인애플도 있을 것 같아

한 낮의 공복 속으로 햇살이 쨍하고 비쳤다

섬은 먼 바다에 있다고 책에서 배웠는데

왜 사회과 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산골 하늘에 떠 있는 것일까

유에프오가 섬모양으로 변장해서

지구를 염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나를

답답한 아이들이 졸라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섬을 보며

원숭이나 코브라 같은 동물도 떠올리다가

좀 더 바라보면 인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ET가 자전거를 타고 있을 수도 있다

지붕에 왜 올라왔는지는 아예 잊어버린 채

지붕 위에 벌렁 누워 섬을 바라보았다

아래 기다리던 아이들은 지쳤는지

몇은 떠나고 몇은 올려다 보며 욕을 해대길래

나는 잠수함을 찾아서 섬에 올라탈 거다

이제 더는 무서운 지붕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내려가서 더 이상 괴롭힘 당하지 않아도 된다

의기양양한 마음이 되어 내려다 보는데 

무언가 덜컹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섬은 사라지고 깃털 빠진 셔틀콕이 

지붕 꼭대기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셔틀콕을 걸어놓고 섬은 어디로 떠난 것일까

지금도 그 날 한낮의 지붕을 떠올려 보면

목 위에 작은 섬 하나를 얹고 살아가는 마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