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학사상, 2015년 8월호.
이사갑니다
한용국
이 골목에 잠시 살다 갑니다
사금파리들, 튿어진 꽁초들, 찢어진 비닐들
멀리 와서 오래 머무르는 것들 사이
다정하고 가난한 물로 흘렀습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얼굴들과ᅠ
무표정으로 인사하는 예의는 지켰습니다
앞 집 담장 위에 핀 꽃이
매화라고는 생각도 못하고ᅠ
벛꽃이다 살구꽃이다 우긴 일도 있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아가들이 한 집 건너 있습니다
엄마들은 모두 통통하거나 뚱뚱합니다
남자들은 작은 차를 타고 출근하고
노인들은 느닷없이 나타나 천천히 사라집니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화장실 물내리는 소리
훅 끼쳐오는 찌개 냄새에
다른 골목으로 넘쳤던 적도 있었구요
아! 반지하 창문들을 훔쳐보며
응큼했던 저녁은 반성합니다
이 골목에 세들었어도
서러운 마음으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다른 골목으로 떠납니다
어쩌면 서늘한 통로일 수도 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윗 층 주인집 할머니
제발 소음방지 매트 좀 깔고 사시길 바랍니다
안그러시면 인터넷에 확 올려버릴 겁니다
시작메모 :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에서 이 년여를 살면서 다정하고 가난한 물이 흘러 이 골목의 서러운 사람들을 달래준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곤 했다. 아마 나를 달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