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작년 여름이었다. gm대우와 신시 뮤지컬의 주최로
제 1회 대학 뮤지컬 페스티발에 연이가 만학도로 다니고있는
명지대학이 참가하기로 결정된 것은, 참가하게 된 작품은 그
이름도 유명한 '넌센스', 전국의 24개 뮤지컬 학과가 설치된
대학들이 참가하는 대회였고, 유명하다는 대학은 모두 참가
가 예정되어 있었다. 우선 학교 내에서 오디션이 실시 되었고
애인은 넌센스의 배역 중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조금 모자
란 듯한 수녀인 '엠네지아' 역할을 따내게 되었다. 잠깐 기뻐
했으나, 그때는 몰랐다. 정말. 얼음이 둥둥 떠 내려오는 강을
맨몸으로 헤엄쳐야 하는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본선 공연에 맞추어 일정이 발표되고 드디어 연습이 시작되
었다. 어머니나! 세상에! 소사소사 맙소사! 난 그 공연이오로
지 애인만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배우는
애인인 김미연양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리고 가끔씩 타브이
의 인터뷰에서 배우들이 남친이 혹은 남편이 상대역을 도와
줘서 고마웠어요.라고 말할 때, 뭔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던터
이므로, 그 정도 쯤은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내심도
와달라고 말하기를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한 때 나도 배우를
꿈꾸었던 지망생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저런 여러가지의필연
적인 이유로, 혹은 우리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서, 과감히포기
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꽤 설레이는 일이었다. 나는할수
없었지만, 애인의 상대역 도움쯤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 게다가 나도 한 '끼'는 한다고 스스로 꽤 자부하고 있었던터
였다. 자 이제 로맨틱한 날들이 온다. 으흐흐, 오호호홋!
오, 럴수 럴수 이럴수가, 연습 시작 삼일이 지나자, 나는 혹은
우리는 혹독한 현실과 마주쳤다. 문제는 기존의 한국 '넌센스'
공연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했다는 데 있었다
애인만의 '엠네지아'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
요했다. 애인의 대본은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여백들이
빽빽하게 채워졌고, 뒷면에는 보충분석으로 가득차기 시작했
다. 그 과정 속에서 나와 애인은 되풀이 해서 토론해야 했다.
어떨 때는 머리를 맞대고 끄덕끄덕 하다가도, 어떤 대목에서
는 감정이 상할 정도로 싸우기도 했다. 거의 매일 저녁 만나
서, 그 날 연습 내용을 점검하고, 보충하고, 서로에게 시연 해
보였다. 게다가, '엠네지아'라는 배역은 평범한 캐릭터가 아
니라, 기억상실증에 걸린, 조금 모자란 듯한, 한 일곱살 쯤에
서 지능이 멈춰있는 캐릭터였다. 거기다 극의 매듭이 엮고 풀
리는 데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극 전체를
망칠 우려가 있었다. 넌센스의 모든 역할이 각각 그렇기는 했
지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해 여름은 애인과 내가 만
나는 모든 장소가 연습실로 변했다. 가끔 나는 애인이 공연하
는 게 아니라, 내가 남자 넌센스를 공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아마 애인뿐만 아니라 '넌센스'팀 모두가 그랬을 터였다. 서
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때로는 상처 입히기도 하면서, 혹독한
연습을 거쳐야 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애인에게 들으면서 나
같은 놈은 정말 배우가 될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
도였다. 오늘 씨네 21을 샀는데, 거기에 배우가 되기 위한 사
람들을 위한 특집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오, 구구절절이맞는
말들만 적혀 있었다. 어딘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정말 강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만 허락하는 곳이 무대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애인인 미연이를 포함해서, 넌센스에 참가했던 다섯
명의 친구들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스물한두 살
의 어린 친구들이 아니라, 적어도 스물 다섯은 넘은 늦깎이들
이었다. 안정과 평화를 고민하고 선택할 나이에 불안과 미지
를 선택한 친구들이 아닌가. 정말, 그들이 이번 축전에서 잘
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진심이 되지 않을수가
없었던 여름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어떻게든 지나가는것이고
운명의 시간은 왔다. 만약 본선에 진출한다면, 본선진출한 일
곱팀은 대학로의 무대에서 삼일씩 본선공연을 한 뒤에 대상
금상, 은상, 동상 등으로 나뉘게 되어 있었다. 본선 진출상금
이 이백만원, 대상을 타게 되는 팀은 삼백만원의 상금과 함께
브로드웨이 견학이라는 부상이 걸려 있었다.
가을이 허리부분쯤 제 몸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일 무렵, 드디
어, 본선공연이 다가왔다. 본선진출을 위한 예심공연은, 각각
의 학교의 극장에서 한 번을 공연하게 되어 있었다. 그 공연
을 심사위원들이 와서 본 뒤 평점을 매겨서 본선진출팀을 가
린다고 했다. 모든 학교가 공히, 셋트 부분에서는 프로들을초
빙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애인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감독도, 조명감독도, 음향감독도 모두 프로였고, 아마추어는
배우들 밖에는 없었다. 운명의 오후 3시가 다가오고, 무대는
텅 비어 있었고, 음악만이 딩동댕동 흐르고 있었다. 작지 않
은 명지대 소극장, 다행히도 관객들은 객석을 가득 메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관객석 앞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아서긴장
을 이기지 못해 그예 팔짱을 끼고,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애인을 포함한 다섯명의 '넌센스' 팀은, 이 많은 관객을
환호하게 할 수 있을까. 혹시 실수나 하지는 않을까. 수 많은
우려가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 공연이 끝일까. 아니면
대학로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이윽고 무대가 환해지고,관
객석에서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수녀
복을 입은 배우들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무대로 올라 가
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