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파일
초파일에 조계사에 갔었다. 조계사는 종로의 인사동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통종파중의 하나인 조계종의 본산사찰이기도 하다. 조계사와 인사동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풍수지리설을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터와 사찰이 들어설 터가 따로 있다는 풍수지리적인 생각에는 적어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 백미터를 사이에 두고, 종로 3거리와 조계사와 붙어 있다시피 인사동이 위치해 있다는 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비록 도심이기는 하지만 조계사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여기가 도심이라는 것을 잊고 향냄새와 아울러 거목의 정취에 취하게 되는 일은 땅기운이나 풍속설에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사의다. 인사동은 또 어떤가, 조금이라도 한산한 인사동을 걸어다닐 때면, 가끔 그곳이 서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는 일도 허다하기 마련이다. 가끔 삶이 피로할 때, 나는 애인과 조계사에 들러 참배하고 잠시 쉬었다가 인사동에 들러 산책을 한 뒤, 골목에 있는 대나무 밥집에 들러 너비아니와 함께 대나무 밥을 먹고 돌아오곤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인사동에 들러 먹을 것이 없으면 거기가서 꼭 먹어볼 것, 너비아니는 입에서 살살 녹고, 대나무밥은 찰지며, 반찬들은 맛깔스럽고 정갈하다.
조계사는 초파일이니만큼 인산인해였다. 형형색색의 등이 입구에서부터 절 마당까지 하늘을 덮고 있었다. 환히 불 밝힌 등들은 작은 등에서 큰 등에 이르기까지 또 형형색색의 기원을 품은 사람들의 이름과 생시를 적은 꼬리표가 달려 있어서, 온통 환한 소망의 빛터였다. 밤하늘에 열어두는 기원의 환한 품 속에서 그녀와 나는 참 따뜻하였다. 마침 절마당에서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단상 아래 빙 둘러선 사람들, 넓게 핀 돗자리 위에서 끝없이 오체투지로 절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선 채로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여 ‘관세음 보살’을 염송하고 있었다. 중생의 고통을 위해서, 성불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길을 택한 부처, 관세음 보살을 염송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도 사라진다는 신앙, 수행과 신앙의 경계에서 있는 분의 이름을 염송하면서 모두들 어떤 소망을 빌고 있었을까. 안으로는 마음을 정화하고 밖으로는 기복하는 신앙과 수행의 혼합이랄까. 합장하고 선 사람들은 늙거나 젊거나, 보기에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옷을 잘 입었거나 못 입었거나 아름다워 보였다. 생각하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자세는 모든 분별과 차별이 사라진 불이, 무분별의 원융자세다. 잠시 함께 합장하고 염송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봉축법회가 끝났다.
그리고 한동안 벤치에 앉아 쉬었다. 절마당에는 신도들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스님들, 불교 청년회, 불교 학생회 사람들, 불교 합창단 등등 여러 단체의 사람들이었다. 모두 오늘 하루를 위해서 많은 날들을 준비해 온 사람들인 것이다. 미소를 띠며 다소 경황없는 몸짓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잠시 벤치에서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렇게 앉아 있는 내가 어색해졌다. 그래. 십년 전, 나도 저렇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었다. 저기서 부르면 예, 하고 달려가고 여기서 부르면 또 허겁지겁 예,하고 달려오고, 쉬는 짬이면 또 어디서 할 일이 없나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들뜬 소년 하나가, 10년 후의 벤치에서 바라보니, 그 사람들 사이에서 환영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기형도의 시 ‘바람의 집(겨울판화1)를 떠올렸다. 그 시는 ‘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으로 시작해 마지막은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로 끝나고 있다. 나는 그 시의 전언보다 의미구조에 주목했었다. 그 시는, 다차원적인 시간인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현실은 가상이거나 허상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이 그것이다. 모든 순간은 일직선적으로 뻗어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차원의 다른 순간들로 이어진다. 선조적 인과론적 시간은 수많은 순간 혹은 선택에 의해 다차원적 시간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나이기도 한 동시에 수많은 타자다. 바람의 집에서 시적 화자는 끝내 시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적화자는 완벽하게 객관화 되고, 유년의 기억은 판화로 각인되며 그때부터 그 소년과 어머니는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것일까. 저들 중에는 또 하나의 나가 오고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잠시 몽롱하게 그 시절 속으로 빠져 들었다.
월정사의 초파일 준비는 적어도 초파일이 시작되기 한 달 전쯤부터 이루어진다. 우선 시작되는 일은 연꽃잎을 비비는 일이다. 여러 가지 색깔 - 흰색과 분홍색 노란색 등이 주색이다 – 의 주름종이들이 정말 몇 백뭉치가 우선 할당된다. 그 주름 종이는 몇 백장으로 한 묶음씩 묶여 있다. 그러면 우선 그것을 낱낱의 종이로 떼내어야 한다. 먼저 양옆으로 죽죽 벌려 준 다음, 입으로 후 분다. 그러면 그것은 원래의 끈기를 잃고 한 장씩 벌어지게 된다. 그것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는 한 장씩 떼어서 앞에 마구 던져 놓는다. 그러면 다른 애들은 한 손에 조금 풀기를 묻혀서 주름진 부분을 잡고 끝이 뾰족하게 이파리 모양으로 말아 놓는 것이다. 이게 말이 쉽지, 상당한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매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절에 들어와서는 모여 앉아서 반복해야 하니, 엉덩이는 아프고, 똑 같은 짓을 계속하자니 지겹다. 그러면 그걸 잊기 위해서, 서로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해대기 마련이다. 이 뻥, 저 뻥, 완전히 뻥의 잔치다. 그 뻥도 지겨워질 무렵이면 간식으로 과일이며 떡이며 전병등이 나오고 그걸 먹고 나면, 예불을 끝내고 와서 또 작업을 한 두시간 지속한다. 그때는 이미 뻥도 지겨워질 무렵이어서, 한 놈 따 시키기, 억지소리로 놀려먹기 등을 해대곤 한다. 그러다가 스님 눈치를 살살 보아서 그만해요 그만해요를 졸라 방에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마무리되면 이번에는 철사로 된 등의 뼈대를 만드는 작업이다. 편리하게도 그것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연결하면 둥근 공처럼 되게 되어 있어서 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도 워낙에 많고 보니 일요일이면 모두 수곽(이를 테면 부엌이다)에 모여서 하루 종일 해내야 한다. 먼저 지난 해에 쓴 등을 창고에서 모두 꺼내와서 물을 뿌리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 물에 젖은 연등은 쉽게 철사와 분리된다. 그걸 다 떼어내는 데 열두서너명이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것이다. 그 다음 주에는 드디어 뼈대 잇기 작업이다. 그걸 하는 데도 또 꼬박 하루가 걸린다. 꽃잎도 다 말렸고, 철제 뼈대도 완성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뼈대 위에 한지를 바르는 작업이 남아 있다. 풀칠 조와 바름 조로 나뉘어서 한쪽에서는 연신 풀칠을 하고 한 쪽에서는 연신 발라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일은 꽃잎 말기보다는 흥겹고 재밌다.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도 있고, 하나 하나 등 뒤로 쌓여가는 꽃봉오리를 세는 즐거움도 있기 마련이다. 철제 구조물에 깨끗한 한지로 발라진 한지등의 모습은 정말 화장을 하지 않은 소박한 여인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러고 보면 이제 남은 일은 거기 화장을 하듯 꽃잎을 동그랗게 붙이는 것이다. 그 작업에서만큼은 우리가 제외된다. 아이들, 그것도 남자아이들의 서툰 솜씨로는 이리 삐뚤 저리 삐뚤 꽃잎을 붙여 망쳐놓게 마련인 것이다. 웬일인지 더 이상 일을 안 하게 되어 좋은 데도, 우리는 그 일만큼은 저마다 해 보고 싶어했다. 모두들 미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숲과 물과 꽃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러다 보면 드디어, 사월 초파일이 온다. 그 전날, 정확히는 그 전날 밤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처사님들은 마당에 연들을 걸 막대기들을 세우고, 그 사이를 줄과 줄로 연결한다. 그 높이는 딱 어른들의 키 높이여서 그 아래로 다니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할 정도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 촛불 아래서 기원의 새벽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촛불을 보면서 자신의 소망을 비는 밤은 얼마나 성스러운가. 하지만 늘 걱정인 것은 이상하게도 그 전날은 꼭 비가 내리거나, 날이 우중충하게 흐려서 우리들의 애를 태운다는 것이다. 등을 걸지 못하는 초파일이란 정말 상상할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이런저런 염려와 불안을 안고, 우리는 밤새도록 공양간에서 상을 차리거나, 미리 오신 신도님들의 방을 안내하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한다. 그 중 가장 큰 일은 신도카드를 확인해서 연등에 달릴 꼬리표를 적는 일이다. 끝없이 몰려드는 신도들, 그리고 수천장에 달하는 신도카드들(이 카드에는 가족의 생년월일과 시가 적혀있다), 그 앞에서 몇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름이 불리면 즉시 찾아서 대령하는 일이 우리 몫이다. 하지만 그 일에야 이골이 난 터, 이름이 불리면 약 몇 초 이내에 그것은 스님에게 전달된다. 놀라는 신도분들의 표정을 보며 느끼는 뿌듯함도 역시 우리 몫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지내다가 자는 둥 마는 둥이면 어느새 새벽을 알리는 도량석이 들리고, 우리는 일어나 북(법고)과 종을 치러 나간다. 우리의 북솜씨는 거짓말 안보태고,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의 실력과 맞먹는다. 새벽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박수와 감탄을 받으며 새벽 북을 치는 일의 환희란!
그리고 드디어 아침이 밝는다. 절마당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제까지 흐렸던 하늘은 맑게 개어 있다. 사찰 위로 마치 푸른 장막을 펼친 듯 맑은 초여름의 하늘이다. 이 때부터 맨 처음 하는 일은 마당에 등을 거는 일이다. 색색등을 들고 다니며 새끼줄에 철사로 등을 묶어 매다는 데 한나절이다. 등 달기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각자 소임에 배당된다. 공양 준비와 등 접수가 가장 주된 일이며, 손님 안내 혹은 접대상차림. 법회 준비등이 진행된다. 하지만 등을 다는 일 빼고는 우리는 그저 이리저리 부르는 대로 쫒아 다니며 심부름하는 일이 전부이긴 하다. 정말 사소한 일이 가장 중요해지는 그런 때다. 거기에 또 신나는 일은 진부고 불교학생회 애들, 즉 친구들과 후배들이 올라와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무언가를 함께 하는 일을 좋아해 온 터, 이리저리 함께 돌아다니는 일은 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사시를 맞아, 법회가 시작되고, 이런저런 순서가 끝나고 큰 스님의 법어가 끝나면 탑돌이의 차례다. 서가모니불을 염송하면서 탑을 도는 사람들, 그때 우리는 점심공양준비를 시작한다. 엄청나게 큰 솥에 밥이 날라져 온다. 늘 재미있는 일은, 그럴 때면 공양간에서는 솥의 밥을 주걱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삽으로 밥을 퍼 담는 것이다. 몇 년을 봐도 신기했던 일이다. 삽으로 밥을 푸는 것. 이런저런 나물들이 날라져 나오고, 물론 그린벨트다. 고기가 전혀 없는 것이야 상식. 탑돌이를 끝내고 사람들은 뒤쪽 후원에 줄을 서고, 우리는 거기 서서, 수저 나눠주기 밥 담아주기 나물담아주기 등에 정신없이 매달린다. 거의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식사를 챙기는 것이다. 그 뿐인가, 스님들은 방에서 드시므로, 긴 상차림도 우리의 몫이다.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다 보면, 어느새 공양시간 끝, 우리는 늦게서야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이상한 일이다. 매일 먹는 절밥인데도, 그 날의 밥은 유독 맛있어서 평소보다 두 배를 먹곤 한다. 가끔 내가 살 안찐 것을 보고, 스님들은 말씀하시고는 했다. 절밥먹고 살 안찌는 놈은 너 하나 뿐이다 이놈아!
이제 남은 일은 신도분들의 등을 접수하는 일과, 이런저런 잔심부름과,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 사이에 처사님들은 별당에서 초를 꺼내오신다. 그리고는 등의 크기에 맞게 작게 자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저녁이 가까울수록 불던 바람도 잠잠해지고, 날은 점점 더 청명해진다.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우리가 더 애가 탄다. 스님, 언제 불켜요? 언제요? 조르다보면 드디어 지시가 떨어진다. 점등이다. 우리와 불교학생회 애들과 두 명이 한 조가 되어서 한 사람은 초를 들고 다니고 한 사람은 등에 초를 끼워넣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정말 야릇하게도,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다니는 경우는 없다. 꼭 짝지어서 다닌다. 성스러운 핑계로 서로 작업(?) 들어가는 시간인 것이다. 하나하나 불을 켜면서, 자기의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등 아래를 꾸부정하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고, 절마당은 온통 환한 연등의 물결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다. 점등 한 후, 신도님들의 등을 찾아주느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이제 하루가 끝난다. 그 연등의 물결 속은 아무리 걸어다녀도 지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뒷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웃기도 하면서, 논다. 지금부터가 진짜 축제의 시간이다. 연등아래서 게임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렇게 신 날 수가 없다. 그 날은 어디에나 과일이며 먹을 것이 풍부하고, 가끔은 신도님들이 쥐어주는 용돈도 즐겁고. 스님들이나 행자님들과 장난치는 일도 신난다. 그러다가 학생회 애들과 방에 모여서 과일이며 과자를 먹으면서 오락회를 하다보면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지고, 소등시간이 온다. 다시 우르르 몰려 나와서 불을 끄고나면 밀려오는 피로감, 그러나 그 날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또 우리끼리 방에 모여서 초파일 행사준비하면서 있었던 일들, 또 재미있었던 신도님들 이야기를 하다가 지쳐서야 잠이 드는 것이다. 다음날 학교를 가야 하니까! 물론 수업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겠지만.
그렇게 자다가 깨어보니 나는 서른 셋이고, 초파일을 맞아 조계사에 와 있다. 그래 절을 떠나온지 어느 새 십년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곳.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 그 고향은 이렇게 추억 속에나 있다. 조계사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쓸쓸해 하는 서른 셋이다. 가끔 사는 일이 힘들 때면 이것은 모두 꿈이야 꿈이야 중얼거리고는 한다. 구운몽처럼, 어느 여름 자주 우리가 잠들곤 하던 동별당이나 서별당 마루에서 일요일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고. 자고 일어나면, 그 시절일거라고. 꿈에서 깬 뒤 잠시 당황스럽겠지만, 곧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 아래, 아름답게 솟아 있는 팔각구층 석탑이 보이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화단에서는 풀벌레가 울고 있을 것이다. 막 적광전의 풍경을 흔들고 온 바람이 딸랑딸랑 내 이마를 지나가리라. 그리고 동별당쪽에서 행자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겠지. 용국아, 저녁공양 준비해야지! 일요일이라고 공부는 안하고 잠만 쳐 자? 그러면 나는 오늘 당번인 애들을 부른다. 승현이형, 종철아, 저녁공양 준비하래, 얼렁 나와. 그리고 나는 고무신을 신고 동별당 후원을 향해서 걸어가며 승현이형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형, 나 정말 긴 꿈을 꿨다. 글쎄 내가 서른 세살에 등단해서 시인이 된거야. 그러면 승현이형은 내게 면박을 주겠지. 헛소리 하지 말고 얼렁 반찬그릇들 밖으로 내놔. 그 날 저녁에는 전나무 숲을 혼자 걸으며 내내 그 길었던 꿈, 꿈 속에서 살아 온 십년을 이상해 하리라! 정말 내가 나중에 시인이 될까……그러고 보니 떠나온 지 올해로 딱 십년 째다. 아니 꿈꾸고 있는 지 십 년 째다. 언제쯤 꿈에서 깰 수 있을까. 마음은 삶을 허상으로도 만들고 실상으로도 만든다. 그 경계는 마음에 있다. 아니 마음에 없다. 뜰 앞의 잣나무는 그대로인데 천년 전을 날던 학의 울음소리는 어디를 떠돌고 있는가! 어쩔 것인가! 할! 다만 외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