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우저의 창을 열어놓고 글을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막 저무
는 저녁과 자동차의 소음, 멀리 산을 오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쓰
고 있다. 그리고 창밖의 어둠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형광등 불 빛아
래, 앉아 있다. 이 글의 제목은 성내역에서,라고 붙였다. 물론 여기
는 성내역이 아니다. 다만 성내역에 잠시 내렸을 뿐이다. 그것도열
차가 지나가는 한 구간 사이를 서성였을 뿐이다.
오늘 강의는 발표수업이었다. 김용택의 시 '사람들은 왜 모를까'와
조 은의 시 '꽃은 일찍 썪는다'를 지난 월요일에 제시하고, 자신의
체험과 관련하여 감상을 써오는 것이 과제였다. 다행히 성의 없는
발표는 하나도 없었다. 아예 안써왔을 망정, 발표한 학생들은 너무
도 성의를 다해 주어서 좋았다. 제시한 시를 열 번, 스무 번 읽고생
각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사랑에서
죽음까지. 어쩌면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상처들을 시와
함께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걸 단 아래서 지켜 보
면서, 그들 하나하나가 상처를 극복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들
어 대견스럽고 마음이 찡했다. 물론, 이런 식의 한 번의 수업으로
는 아닐테지만, 적어도 하나의 디딤돌은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었
다. 강의를 마친 후, 벤치에 앉아 일감호를 바라보았다. 은결이 물
고기떼처럼 내 발밑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저런 은결
같은 따끔따끔하고 환한 상처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정오에 이르
러서야 확인하게 되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돌아 오는 길에, 여지없이 성내역에
들렀다. 그때 내 손에는 씨네가 들려 있었고, 마침 해리포터 2에관
한 기사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서 포터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
에서, '11년 동안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살다가, 호그와트마
법학교에 와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이라는 구절을 보면서, 누구나 그런 '마법학교'를 꿈꾸고 있
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우울한 생각, '32년 동안 아
무에게도, 어느 세계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나의 마법
학교는 어디인가, 글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 마법학교를 이미
다니고 있을지도. 필요한 것은, 마법을 가슴 속에서 꺼내는 일인지
도. 한 번 더 둘러봐야겠다. 여기가 어디인지. 분명히 어떤 징표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성내역에서 내리는 이유란, 단 한가지다. 잊지 않기 위해서.그
모든 것들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떠난지도 올해로 3주년이되
었다. 강변역에서 성내역으로 오는 구간은 이 무렵이 제일 좋다. 막
어두워지기 전, 저 멀린 산위로 노을이 지고, 그 위에 떠 있는 회색
구름들, 천천히 불켜지기 시작하는 건물들, 다리 위의 불빛들, 서
울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시간이다. 내려서, 맨 뒤 강쪽으로 걸어 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미 나는 젖어 있었다. 다만 그 강위를 지나오
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젖은 몸으로 생각해 보는 그 시절, 이제 삼
년이나, 지났으니, 사실은 기억도 희미해지고, 마음저림도 덜하다.
마음에 맺혀 흐르지 않은 부분에도, 세월의 먼지는 더께를 놓는 것
이다. 그 시절 흔히 말하던, 싸이버의 혹은 싸이버를 매개로 한 만
남들에 회의의 안개도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세월에저항
할 만한 힘은, 보통사람인 내게는 물론 없다는 것도 인정하다. 서로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 만나, 헤어져버린 사람들, 그가 어느 날 느
닷없이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다른 인터넷 둥지에 자리를 잡기도
했지만, 나는 거의 그들과 교류하지 않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할만
은 했으나, 무작정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이미지, 혹은 가상이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게 하는 힘이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이면이란 거울의 뒷면
처럼 탁하고 거친 것이고,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 속에서 서로보
고 싶은 것들만을 보았던 시절이었다. 그 뒷면으로 섰을 때, 아무것
도 서로에게 투사할 수 없었으며, 그대로 등돌린 뒷모습들이었다다
음 수순은, 걸음을 옮기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가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조차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기에 가상이라
는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심리적 거리감이나 상실감은 반비
례했었으리라. 어쩌면 나는 내내, 투정을 부리고 있었을 것이다. 현
실에, 그 가상의 시절을 비추어가면서 말이다. 서른이 이태나 넘기
도록 말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광기가 허용되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만, 다른 장면에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은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아마 나는 적극적으로 소심해질 것
이며, 소극적으로 대범해지게 되리라. 이것은 분명히 역설이다. 하
지만 역설은 순환하면서 틈새를 가지게 마련, 참. 이제 떠난지 삼주
기가 되는 그는, 그 가상을 현실로 잡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막바지에, 잠시 낭만적이 되었고, 그리고 떠났다. 그 아쉬움이 나를
아직도 이 성내역에서 불러 세우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밖은 분명하게 어두워졌다. 연구실에 가야 할 시간이다. 읽
고 부단히 쓰기, 그리고 열심히 벌고 연애 하기, 지금은 이런 게 내
삶의 전부다. 아, 가끔 맘 맞는 사람들과 술 마시고, 광기의 노래방
을 즐기면서 놀기. 이것도 있구나. 오늘은 그냥 주절주절 쓰고 싶어
져서 짬을 내, 주절주절 쓴다. 삶은 주섬주섬 살고, 글은 주절주절
쓰고, 있구나 싶다. 어차피 힘들게 주섬주섬 모아가고, 힘들면 주절
주절 풀어내는게 인생 아닌가. 하지만 중심은 강인하고, 강직하게
두고 살아갈 것! 이런, 글 말미에 그가 문득 그리워진다. 그의 마지
막 집은, 정말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있다. 이런 겨울의 햇살이면
아무 주저 앉아 소주 마시면서, 투덜거리고 있을거다. 이 새끼! 성
내역에만 뻔질나게 내려서 폼 잡고, 여기 청주는 한 번도 안와? 몇
시간이나 걸린다고, 하여튼 게으른 새끼여....
겨울 초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