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 데라
도서관의 서가는 묘한 긴장과 안식을 준다. 나는 800서가 사이를 서성거리며, 1930년대 문학의 연구서들과 몇 권의 평론집 그리고 시집들을 내키는 대로 빼어 들고 서서 읽기를 좋아한다. 열람석은 좌석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가 그곳까지 책을 들고 가지 않는 이유는, 이상하게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책이 식은 붕어빵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붕어빵은 서서 먹는 것이 맛있는 것처럼, 서가에서는 책도 마찬가지다. 서가의 의자는 최대한 꽂혀 있던 자리에서 가까울수록 좋다. 그렇게 서서 읽는 수고, 혹은 힘들 때는 철퍼덕 앉아서 한 두 시간 보내다가 지칠 때면, 나는 이탈리아 문학이 있는 서가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보르헤르스를 비롯해서 독문학, 불문학의 서가들이 곁에 모여 있다. 그곳을 서성거리며 다리를 풀 때마다, 왼쪽 두 번째 서가에 꽃혀 있는 쿤데라의 소설들은 나를 비웃듯이 혹은 비스듬히 서서, 혹은 정장차림으로 서서 노려보듯이 놓여 있었다. 쿤데라 데라, 쿤데라 데라, 남들이 쿤데라를 이야기할 때 한 마디도 못 끼어들었던 생각이 떠오르고, 나는 쿤데라 소설들의 한 권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 놓았다. 손보다 먼저 마음이 내려놓도록 시켰다. 허영이야. 이것은 너의 의지가 아니야.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손과 마음의 갈등에서 손이 쿤데라의 소설들 가운데 ‘농담’을 집어 들고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개략적으로나마 알고는 있었다. 단 한마디의 농담이 한 사람의 삶을 추락시킨다는 이야기, 사실은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대학 시절, 단 한마디의 말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그것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터무니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 후로 나는 돌아갈 곳을 잃었고,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삼십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이 책은 열람석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이 지는 창가의 열람석에서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마치 모든 생물학적 조건이 똑 같은 흰 뱀과 검은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먹어 들어가기 시작해서 끝내 서로가 서로를 먹어 치워 버린 듯한 소설이었다. 남은 뱀이 한 마리든, 두 마리든, 네 마리든, 아니면 한 마리도 남지 않든지 어느 쪽이라도 좋을 듯한. 그리고 책을 서가에 꽃아 두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늙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의 책이 꽃혀 있던 서가에는 쿤데라의 책을 들기를 주저주저하는 십 년 전의 내가 서 있었다. 막 기르기 시작한 머리는 안경의 반을 덮고 있었고, 오른 쪽 다리로 몸의 균형을 잡은 채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삶의 불가해함을 알아버린 경직된 표정의 서른 두 살의 청년이 그렇게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책을 꽃기 위해 다가서자 그가 비켜서주었다.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냥 두었다. 잠시 후면, 십 년을 늙어버린 그가, 다시 십 년 전의 자신에게 말을 걸어줄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그들의 운명일 테니까. 도서관에서 쿤데라의 다른 소설 ‘ 웃음과 망각의 책’을 빌려가는 것은 나만의 운명일 것이다.
농담이 기본적인 서사의 구조에 충실한 소설이었다면, ‘웃음과 망각의 책’은 도무지 전체적으로 하나의 연작소설과 같은 형식을 띠고 있었다. 각각의 단편들은 다른 단편들과 어떤 연관이 없는 듯 싶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제목처럼 웃음과 망각이 주제인 소설이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는 망각에만 충실했을 뿐, 웃음은 정작 한 번도 터뜨린 적이 없었다. 다만 소설에서 어떤 웃음이 어두운 삶을 망각할 수 있게 해 주는지 보여주고 있을 뿐이어서, 웃음을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지 않으면 안되었다.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웃음, 어떤 유머러스한 상황도 없이, 어느 순간에 계시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이 생을 구원하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었다. 내게 그런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었던가. 타미나의 생이 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있고, 어떤 인물이 등장하든지 이 소설은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타미나는 읽을수록 잊혀져 갔다. 아니 잊혀져 갔다기 보다는 다른 인물들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 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여러 번 소설의 앞 부분을 다시 들춰서 인물들을 확인해야 했지만, 곧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어떤 인물이어도 좋았던 것이다. 소설이 허구라는 것을 끝없이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현실을 허구로 반대로 현실을 허구로 변용시키고 있는 소설이 이 ‘웃음과 망각의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말미의 신문 평 중에 주목을 끌만한 말이 하나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소설을 참을성 있게 끝까지 읽는다면 이 소설은 당신의 생을 변화시킬 것이다. 글쎄, 농담을 읽을 때, 내가 늙어버린 것을 알았다면, 웃음과..를 읽은 뒤에 나는 다시 소설이라는 쟝르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소설의 서사 속에서 인물들의 욕망에 동화되거나 혹은 반동해가면서, 소설을 통과해 나왔다면, 이제는 소설의 쟝르적 속성 자체에 대한 흥미가 생긴 것이랄까. 그렇다면, 이 소설이 가져다 주는 변화라는 것은, 삶조차 하나의 쟝르로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각의 객관성을 얻게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아무리 하찮은 일상이라도 심연의 깊이를 갖고 있어서, 끝내 그 일상에 묻혀버리고 말게 하는 흡인력이 있지 않은가. 허우적대는 삶, 그 허우적거림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삶을 하나의 허구적 쟝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삶의 그 모든 우연과 필연의 돌올한 매듭들을 볼 수 있게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망각하고, 끝내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놓게 만드는 소설이랄까. 다만 한 순간의 터져 나오는 웃음이, 삶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해준다는 것이 이 소설의, 아니 쿤데라의 전언인지도 모른다.
쿤데라 데라, 쿤데라 데라, 그리고 지금, 나는 또 다른 소설 불멸,을 읽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한 번에 다 읽어버리기 싫어서 조금씩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서사 속의 서사라고나 해야 할까, 서사를 넘어선 서사라고나 해야할까. 문득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생각났다. 그 소설은 이문구 선생 스스로 젊은 시절 소설은 수필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쓴 소설집이라고 한다. 그 관촌의 풍경들은 중학시절의 내게 생생히 살아 있다. 쿤데라의 소설들도 그렇다. 또, 이 소설은 근엄함에 대한, 정상이라는 것에 대한 기막힌 풍자의식을 담고 있는 수필이기도 하다. 불멸이라는 중심축을 두고 인물들이 벌이는 긴장을 블랙 유모어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거장 괴테를 등장시켜서 말이다. 쿤데라 데라. 쿤데라를 읽는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냥 빌려다 놓고, 손가는 대로 몇 페이지씩 펼쳐 읽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은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지’이다. 글쎄, 언제부턴가 수상소설을 잘 안 읽고 있지만, 식민지 상황을 마치 당대처럼 느끼게 하는 배경묘사와 문체는 밋밋하지만, 중심축이 되는 사건은 너무 흔한 부재 더듬기와 추리 기법에 기대고 있어서 좀 식상하지만, 읽히기는 한다. 물론 끝까지 읽어봐야 전모를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쿤데라 데라 데라, 소설을 읽는 시간, 언제쯤에는 소설을 쓰는 시간도 올 수 있을까, 내적 필연성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아, 쿤데라 데라, 지금은 다만 활기차게 미친듯이 하하하하하 웃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