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문학이 본질적으로, 내가 생각하듯이, 제시된 의미임과 동시에 확고 확립되지 못한 의미라면, 라신은 분명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이다. 그의천 재성은 결국 차례차례 그의 운명을 이루어 왔던 많은 미덕들 중 특별히어 느 것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유동성의 비길 데 없는 기술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이 유동성에 의해 그는 어떤 비평의 영역에서도 영구 히 존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동성은 미미한 미덕이 아니다. 유동성이란 오히려 반대로 정상에 이른 문학의 존재 자체이다. 쓴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의미를 뒤흔들어, 거기 에 간접적인 의문을 주입시키고는 작가가 이 의문에 최후의 유예로 대답 을 삼가는 것이다. 대답, 그것은 우리 각자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자유를 부여하며, 그러나 역사와 언어와 자유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세상이 작가에게 보내는 대답 역시 끝이 없 다. 사람들은 모든 대답과 동떨어져 쓰여진 것에 대답하고 또 대답한다. 의미들은 확언되고 경쟁에 붙여지고, 대체되며 흘러가는 데, 문제는 머문 다. 이리하여 역사를 가로지르는 문학의 존재가 있을 수 있음이 아마설명 될 것이다. 이 존재는 한 쪽 끝이 고정되어 있고(작품으로) 다른 쪽 끝은 변하는(이 작품을 소비하는 세상과 시간) 기능적인 체계이다. 하지만유희 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오늘도 여전히 라신에 대해 새로이 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우선 작품이 진정으로 하나의 형식이어야 하고, 작품이 폐쇄된 의미가 아 니라 진정 뒤뚱거리는 의미를 가리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책임이 덜 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은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하고, 세상이 자기 고유의 질료로서 확립된 의미를 시원스럽게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 해, 겉으로는 단언하는 척 하면서 기실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작가의 이중성에(숙명적인), 겉으로 의문을 제기하 는 척 하면서 대답하는 비평가의 이중성이 상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르트, 라신에 관하여, 서문 중에서 |
12/27 19:42 |
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