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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롤랑 바르트, 라신에 관하여

by 목관악기 2007. 11. 11.

       만일 문학이 본질적으로, 내가 생각하듯이, 제시된 의미임과 동시에 확고
       확립되지 못한 의미라면, 라신은 분명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이다. 그의천
       재성은 결국 차례차례 그의 운명을 이루어 왔던 많은 미덕들 중 특별히어
       느 것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유동성의 비길 데 없는   기술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이 유동성에 의해 그는 어떤 비평의 영역에서도 영구
       히 존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동성은 미미한 미덕이 아니다. 유동성이란 오히려 반대로 정상에  이른
       문학의 존재 자체이다. 쓴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의미를 뒤흔들어,  거기
       에 간접적인 의문을 주입시키고는 작가가 이 의문에 최후의 유예로  대답
       을 삼가는 것이다. 대답, 그것은 우리 각자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자유를 부여하며, 그러나 역사와   언어와
       자유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세상이 작가에게 보내는 대답 역시 끝이 없
       다. 사람들은 모든 대답과 동떨어져 쓰여진 것에 대답하고 또 대답한다.

       의미들은 확언되고 경쟁에 붙여지고, 대체되며 흘러가는 데, 문제는 머문
       다. 이리하여 역사를 가로지르는 문학의 존재가 있을 수 있음이 아마설명
       될 것이다. 이 존재는 한 쪽 끝이 고정되어 있고(작품으로) 다른 쪽   끝은
       변하는(이 작품을 소비하는 세상과 시간) 기능적인 체계이다. 하지만유희
       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오늘도 여전히 라신에 대해 새로이 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우선 작품이 진정으로 하나의 형식이어야 하고, 작품이 폐쇄된 의미가 아
       니라  진정 뒤뚱거리는 의미를 가리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책임이 덜 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은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하고, 세상이 자기 고유의 질료로서 확립된 의미를  시원스럽게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 해, 겉으로는 단언하는 척 하면서  기실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작가의 이중성에(숙명적인), 겉으로 의문을 제기하
       는 척 하면서 대답하는 비평가의 이중성이 상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르트, 라신에 관하여, 서문 중에서
12/27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