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 시인의 꿈을 들여다보다.
시인 한용국, 시인 조용미
조용미 시인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여섯시 반이었다. 그러나 아차아차 하는 사이에 나는 무려 한시간이나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추위 속을 헐떡거리며 인사동의 관훈갤러리 옆의 판화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재훈 편집장이 손을 흔들어 주었고, 조용미 시인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밖에 다니러 갔다고 했다. 잠깐 자리를 옮겨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문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을 떠올렸고, 거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섬천남성은 독을 품고 있다]를 떠올렸다. ‘날아다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이라는 시구를 떠올렸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나비 한 마리가 사뿐하게 판화방 안으로 들어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지각을 용서하듯 살풋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용국 : 우선 근황부터 여쭤보기로 할께요. 시집 내신 이후로 무척 바쁘셨을 거 같은데..
조용미 : 시집 내고 나서 발표를 좀 많이 했나요? 감기 몸살 때문에 올해 들어서 고생많이 했고, 십여일 만에 밖에 나와요..근황이라..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고 열심히 앓고 있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한용국 : 아 어디가 아프신가 봐요?
조용미 : 늘 아파요. 좀 덜 아플 때가 있고, 괜찮을 때가 있고..지병이 있어요.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허리디스크 환자죠. 의학적 병명은 그런데, 과거에는 병을 모르고도 아주 오래 많이 앓았어요. 아픈 얘기는 사람들이 만나면 오랜만에 만나건 근자에 자주 만나는 사람이건..처음 묻는 말이 다 그거거든요. 다른 걸로 안부를 물었으면 좋겠는데..제가 사람들한테 미안하죠. 제 대답은 늘 “괜찮다” 입니다.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함께 웃음)
한용국 : 이십대 후반에 등단을 하셨다고 되어 있으니까. 올해로 등단하신지가 십오년 째 되시네요.
조용미 : 네 서른 살 되기 직전에 했어요. 생각보다 일찍이죠. 전 서른 넘겨서 해야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빨리하게 된 편이죠. 그때 시를 쓰다가 어느 기간 한 사년 정도 시를 전혀 못썼어요. 책도 못 읽고 거의 모든 게 정지된 듯한 순간이었어요. 집에 전화도 놓지 않ㄱ고요. 아 그때 시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지더라구요. 그러다 만 사년 지나고 오년 지나던 해에 저절로 써지던데요. 그때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이제 시를 처음 만났으니까. 한 백편 정도를 쓴 다음 시가 무엇인지 나에게 되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이십대 초반부터 29살까지는 시가 아니었죠. 한 백편을 쓰고 나서 나 자신에게 스스로 시가 무엇인가 질문해 보고 그 해답이 내려지면 그 때 등단이란 걸 생각해 봐야지. 근데 어떤 계기가 주어져서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해야하나, 그렇게 데뷔를 하게 됐죠(웃음)
한용국 : 네,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외의 작품을 발표하며서 등단하셨지요. 여기 자료가 다 준비되어 있지요. (함께 웃음)
조용미 : 이런, 이건 정말 어릴 때 돌사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애기 때 사진 보여주면서 이거 당신 맞지요 하는 것처럼 쑥스러운걸요(웃음) 등단은 덫에 걸려든 거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조금 더 늦게 걸려들었으면 좋았을 텐데...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거니까요. 어쨌든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라서 삶을 소중하게 붙들고 있으면 그 자장 안에 저절로 시가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절실하게 쓴 시가 다른 사람에게ㅔ울림을 주고 그런 울림이 있는 글만이 다른 사람에게 영혼을 건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삶이 가장 먼저죠 삶을 꽉 부여잡고 있는 사람의 글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글을 보면 확연히 다르잖아요 명민하고 면밀한 독자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잖아요. 그죠?
섬천남성은 남부 다도해 섬 지방의 해안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유독성 식물이라고 한다. 높이 60cm 안팎이고 5 - 6월에 흰빛이 도는 녹색 꽃이 핀다고 한다. 유독성 식물, 어쩌면 모든 시에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비 - 시인이 이야기하는 절실함이란 그 독을 가슴에 품는 힘일지도 모른다 정말 섬천남성은 사람의 몸을 통과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 그럴 것도 같다. 나비 - 시인은 계속해서 시를 살아낸다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시를 쓸 수록 무섭고 엄정해진다고 했다.
한용국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 일만마리 물고기가 날아오르다(창작과 비평), 삼베옷을 입은 자화성(문학과 지성) 에 이르는 세권의 시집을 내시는 동안 당연히 시세계의 변화가 있으실거라고 생각되요. 그 변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시세계는 많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죠. 첫시집을 내고 나서야 이제 시가 뭔지 이제야 알 거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조금 느려요(웃음)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은 정확한 방향을 가지고 달려갔어요.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는 후기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좀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해서 세 번째 시집에까지 이르렀죠. 두 번째 시집 부터는 다른 시각에서 제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됐다고 할까요. 그리고 세 번째 시집에서는 좀 더 가열차게 삶이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묻고 거기서 제 나름대로 찾은 해답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더 많이 발언해 보려고 했어요. 이런 건 평론가들이 해야 할 얘긴데(웃음) 자기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아요. 머릿 속으로는 맴도는 데 이론적으로는 어려운 것 같아요.
한용국 : 시인의 시에는 자연이 많이 변주되어 나오는 데, 시와 자연, 이라는 주제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조용미 : 우리는 여행하면서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런 여행 속에서 수없이 많은 곳을 다녀도 어떤 풍경은 절 끝까지 따라와서 괴롭히는 풍경이 있어요. 잠 못자게 하고 들쑤시는 불편하게 만드는 풍경들이 있다는거죠. 그럴 때, 그 풍경은 그걸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존재론적인 사건이 되는거예요. 그런 존재론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시로 쓰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요. 인간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자연과 대립되는 모순되는 이중적 관계를 갖고 있잖아요. 인간은 말하자면 자연 아닌 자연이예요. 도덕경에 보면 도법자연이라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하잖아요. 현실적인 삶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과 지나치게 되는 데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는 자연을 만나고 자연이 가진 내밀한 힘과 만나게 되고 대화하게 될 대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아요. 그 시가, 그 존재론적 사건이 나를 끌어올려주고 그럴 때..
한용국 : 음. 너무 유창한 대답인걸요? 아마 이 질문이 나오리라고 짐작하시고 준비하신거 아니예요?(대담자: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조금 어설프게 웃었음)
조용미 : (시인: 너무 진지하였음, 대담자 머쓱한 채로 자세를 고쳐 진지하게 경청하였음)그 동안 제 시들을 훑어보다 보니까 뭔가 정리를 해야할 거 같아서 시작한 메모예요. 아직 정리는 못하고 우선 단상만 적어놓은 것이죠. 좀 전의 이야기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과 관련된 거예요. 저는 육개월이나 일년 단위로 주제를 정해놓고 책을 읽어요. 길게는 이년까지. 올해는 노장사상을 다시 훑어보는 게 목표죠. 박이문의 노장사상하고 또 사유하는 도덕경..같이 읽고 있거든요. 올 일년은 노장사상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좀 더 깊이있게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제 몸이 그 책들을 필요로 한다고 할까요. 제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몸이 끌려가서 책을 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주제가 정해졌어요. 그 책들을 지금 쓰다듬고, 만지고, 공부하고 그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느리고 천천히 읽는 편이예요. 오히려 읽는 시간보다는 생각하고 창 밖으로 하늘 바라보고 그런 편이 더 좋다고나 할까요. 저는 여행 갈 때 옛날에는 책도 노트도 안들고 갔어요. 이유는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서이기도 하구요. 또 무게가 조금만 더 와도 몸이 힘들거든요. 아주 최소한으로 들고 다니죠. 여름에는 짐이 더 무겁죠. 요즘은 그래도 메모지 한 권 정도는 들고 갑니다. 운전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쉽게도 여기저기 빨리 다니지 못해요. 간혹가다가는 한군데 틀어박혀서 오래 있기도 해요. 건강이 안좋아서 바람소리 파도소리만 듣고 온 적도 있어요. 반은 원해서 원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은거죠. 그래도 집이 아니니까 낫죠. 바람소리 물소리도 다르고...거의 혼자 다녀요. 워낙 체질화되어 있어서 가족들도 걱정들은 안해요. 여행은 몸과 마음이 합일 된 장소를 찾아서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곳을 몇 군데 쯤 찾은 것도 같고 앞으로도 계속 그 장소를 찾아다녀야 할 것 같아요
나비 - 시인의 그런 장소는 어디일까. 시의 힘을 빌어 찾아보면 섬의 어느 절벽의 벼랑 아래 아득하게 엎드린 거기일까, 섬전체를 비추는 달의 환 속일까, 털머위의 자줏빛 긴 잎자루 위일까. 그런 걸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비오는 날처럼 캄캄해졌다. 사실은 나도 지난 가을 산에 다녀온 후로 삶이 더욱 힘겨워져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정말이지, 자꾸 체온이 떨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막 비발디의 겨울 3악장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한용국 : 시에 죽음의식이 내장되어 있다는 예전의 인터뷰 내용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다시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음, 누구나 원체험이란 것이 있는데 겪을 때는 원체험이 되리라고 생각을 못하지만 시를 쓰다보면 아 그게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제게도 어떤 기억이 있어요 그게 원체험 아닌가. 저는 대구에서 자랐는데요. 고령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는데..초등학교 3학년 때 쯤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시골 고향집에 갔어요. 너무 슬퍼서 나는 눈도 안떠지는 데 그 조금만 마을에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반갑고 즐겁게 인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음식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상을 펴놓고 시끌벅적하게 드시는 거예요 마치 잔치가 난 것처럼. 그리고 상여가 나가는 데 선산이 차로 가면 한 삼십분되는 먼 거리였거든요. 하얀 꽃장식이 많이 달린 아주 예쁜 상여가 나가는 데, 어른 들이 다 그 뒤에 따라서 상복을 입고 두건을 두르고 여자들은 새끼줄로 꼰 것같은데다가 밑으로 꼰 것 같은 장식을 하고....상여 다라가본적 있죠? (네). 저는 저도 모르게 그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상여도 예쁘고, 호상이어서 그랬겠지만, 보고픈 친척들..외국 있던 큰 아버지도 오시고 모두 줄을 서서 소복을 입고 다 따라 가는 거예요. 저도 신기해서 따라갔죠. 더구나 곡을 하는 데 리듬이 실려있고..신기했어요. 그 때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죠, 어른이란 제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거든요. 그때 제게는 죽음이 이상한 동화처럼 다가왔어요. 마치 놀이처럼요. 큰 고개를 넘어서 가기전에 마을에서 쉬면서 먹을 것도 얻어먹고 또 고개를 돌아서 거기까지 갔거든요. 그때 죽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고, 산 자들의 예로서 보내는 거구나 그런걸 배운거 같아요. 죽음은 어둡고 숨겨야 하고 감추어야 할 것이고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어린 애들은 상가에 안 데리고 가고, 사람이 죽는 험한 모습등은 안보이게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도 안데려가고. 현대에는 옛날처럼 죽은 사람과의정서적인 작별의 시간이 없어요. 지금은 병실에서 돌아가시면 바로 여안실로 보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작별의 시간이 없었어요. 한 오분? 요즘 아이들은 더 심하죠 죽음은 끔찍하고 악마적인 것이고..그게 원체험...그리고 무엇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몸이 아프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벗어나서 밝은 쪽만 바라보고 있지만은 못해요. 죽음이 나를 강렬하게 잡아 끈다고 해야 할까요.?
한용국 :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님에게는 시와 몸이 함께 가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이 겪는 존재론적 사건들이 몸으로 직접 와서 앓게 되고 시가 나오게 되고...
조용미 : 너무 직접적으로 모든 게 몸으로 와 닿아서 어떨 때는 이대로 시를 쓰다가는 살 수 없을 거 같아요. 제가 다작은 아니거든요. 원시적인 시 쓰기를 하는 편이예요. 저는 청탁을 받고 시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시가 없는 데 청탁을 받을 수는 없거든요. 청탁을 받아야 시를 쓴다는 말은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뭔가 나를 괴롭히고 들쑤시고 목이 메이고 몸이 아프고 잠을 못자고 밥이 넘어가지 않고 울컥거리듯이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 겨우 후하고 가늘게 내뱉는거, 꽉 붙들고 벌벌 떠는 이야기가 제게는 시가 되거든요.. 걱정이예요 제대로 살아내려면 조금은 둔해져야 할텐데 말이예요.
한용국 : 여성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세요.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죠. 제가 여성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타자로서의,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그것 때문에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지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예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도 달라졌고, 현실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졌다고 해야 할까요. 여성은 아직도 소외받은 자이고 영원한 타자인 것 같아요. 타자로서의 의식 그런 것을 늘 가지고 있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못되는 것 같아요. 제 성격상 전면적으로 나서지는 못해요. 그것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담당하는 몫이고, 저는 그것을 제 몸 속에 다른 식으로 녹여서 써내고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겠죠. 가끔 여성시인의 시의 극단성을 꼬집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고 고통스러운 시를 쓸 수밖에 없어요. 시가 하나하나의 단말마의 비명인거지요.
그 때 나는 ‘슬픔을 무거운 등짐처럼 다시 메고’ 나비 - 시인이 날고/걷고 있는 모습을 나는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문득 환영처럼 ‘안개 속에 가득한 검은 나비’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무덤 속에서 천년 동안 토우가 뜯고 있는 가야금’ 소리처럼 가슴을 옥죄어 왔다. 나도 정말이지 ‘피로 씌어지는 生이라는 책’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숨을 제대로 다시 쉬기’ 위해서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한용국 :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하다가 정작 개인사를 꺼내지를 못했네요. 문학소녀시절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예술장르에 대한 애호라든가 혹은 삶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주세요.
조용미 : 음악은 편식이 좀 심해요. 바하 브람스를 좋아하고 국악도 즐기는 편이고 주로 현악기 위주죠. 저는 화가가 되려고 했거든요. 그림하고 시하고 같은 거 같아요. 그림에도 관심이 많고 다른 시인이 그러하듯 사진에도 관심이 많고, 직접 그리기도 하구요. 다른 시인들과 달리 제게는 문학소녀 시절이 없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내내 미술반이었고, 해서 저는 글을 써서 상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막연히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야 할 사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그림을 그만두게 하셨을 때도 딱 그만두고..아, 이제는 글을 써서 살아야겟꾸나..하고 생각했죠. 그림에는 아예 미련을 안가졌어요. 다가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듯이, 날 흐리면 눈이 오듯이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살아야겟따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국엔 대학도 문창과에 들어갔잖아요. 하지만 다들 놀라요 제 시가 서울예전분위기가 아니라고. 전 대학가서도 거의 혼자만 다녔어요. 저하고 말해본 사람도 드물정도예요.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너무 많고 정말 굉장했어요. 상받고 그런 사람들도 너무 많고. 학교는 전혀 아무런 연관없이 혼자서 산 셈이죠. 더구나 그때는 시를 쓸 수가 없었어요. 시를 쓰겠다고 문창과엘 들어갔는데..자고나면 한 친구가 죽고..자고 나면 한 친구가 잡혀가고..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을 써야 할 지 모르던 시절이었어요. 거의 혼자 유령처럼 헤메어 다닌 셈이지요. 다리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어요. 글을 안 쓰고 있었어도 죄책감이 느껴지고, 1980년대 속에 놓여져 있는 데 뭘 해야 하는 데 뭘해야 하는지 모르겟어요 글 쓰러 들어왔는데..왜 글을 써야 되는가, 시를 써야 되는 게 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만 붙들고 있던 시절이예요.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죄의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진실이 뭔지 알 수 없었던, 숨을 쉴 수 없었던 시절이었죠. 쓰지 않고 끝없이 질문만을 던지던 시절이었지요. 이십대 때에는 참 많이 헤맸어요. 이십대의 거의 전부는 헤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제 생각해 보면 인간은 돼지와 성자사이의 삶을 사는 것 같아요. 돼지와 성자 사이에 수많은 눈금이 있는 데 그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다가 가는 것 아니겟어요. 어던 사람은 너무나 파란 만장해서 여러 가지 눈금을 살고, 어떤 사람들은 딱 그 눈금만을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무슨 말하면 부분을 보고 전체를 얘기하지 말라, 어디서는 그게 다가 아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싫어요. 정신적으로 비굴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절대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죠 그러면서 그 혀로 사람들을 찌르고 또 우리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요.
한용국 : 문예중앙 겨울호에 천성산 지율스님에 관한 시를 발표하셨지요? 가서 뵙고 오신 듯 한 데 어떠셨어요?
조용미 : 천성산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한 번 뵈었어요. 단식을 하신지가 오늘로 79일인가가 다 되가요. 우리 모두가 해야할 일은 지율스님이 하고 계신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시대는 반문명적, 반지성적 지혜가 필요한 시대같아요. 거기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정말 대안이 없는 것 같아요. 20분 빨리 가기 위해서 천성산을 지나가야 한다는 데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불편하게 조금 더 줄이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몇 분 줄이기 위해서...하지만 납득이 안가요. 경제논리에 대항할 대안이 또 있을까요? 경제논리를 꺾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정말 있을까요? 환경단체에도 들어 있어요. 나서는 건 체질에 안맞고 저는 글만..저는 무얼해야 되나..생각해 봤는데 없드라구요. 그때 지율 수님 뵜을 때, 스님께서 ‘누구 여기 남아서 나 좀 도와줄 사람 없냐’고 말씀하시는 데. 모두들 산 아래의 사정이 나름대로 절박한 사람들이라 아무도 남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차마 스님과 아무런 말도 나눌 수가 없어서 그저 입만 다물고 가만히 앉아 얼굴만 쳐다보다가 왔지요. 모두들 차가 떠날 시간이 되어도 차마 돌아서지를 못하고, 그래서 결국 늦게서야 출발했어요. 돌아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환경 단체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이제는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고, 반문명적인 지혜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어떤 다른 대안을 찾는 게 어떠냐고 여쭈었더니 스님이 말씀하셨어요. ‘대안 없는 게 대안이다. 대안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구요. 지율스님이 대안을 찾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대안을 생각하고 일을 하면 일을 못한다고 했던 것처럼 , 시도 삶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시만 쓴다는 말이 아니라, 시에 하나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거죠. 전부를 담보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은 그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통 받을 준비가 많이 되어 있는 사람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고통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어렵겠지만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군주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이쯤에서 대담을 끝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나는 문득 뿌리가 내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나비 - 시인이 그걸 알아채고, 맥주 한 잔의 제안으로 가볍게 나를 뽑아내 주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한 이재훈 편집장과 함께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잎동동주를 마시면서 나비 - 시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이 대담 속에 있지만 일부는 남겨진 술잔 속에 있다. 아. 막걸리 한 두 잔을 마시는 동안 서서히 나비 - 시인은 서서히 아름다운 여자로 환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기록해두어야겠다. 참, 섬천남성은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법정보호 식물이라고 한다. 천성산의 꼬리치레도룡뇽을 포함한 전 세계 양서류도 멸종위기의 비율이 ▲조류 12%(121 1종) ▲포유류 23%(1130종)에 비해 32%로 현저히 높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정말 지구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비오는 날의 나비처럼, 날아다닐 시간이 많지’않을 것이다.
각주 : 인용된 시들은 모두, 조용미 시인의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을 변주하여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