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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가자, 청와대로

by 목관악기 2018. 7. 2.




계간 [파란] 2017년 가을호




“가자 청와대로” - 촛불이 나에게 남긴 것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의 첫 광장은 대학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비대학이라고 해야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참석했던 예비대학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거기서 학우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학우는 동시에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에는 클래식과 대중가요만 있는 줄 알았는데, 민중가요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춤도 마찬가지였다.되는 대로 혼자 막 흔드는 게 아니라 동작을 맞추어 함께 추는 거였다. 민중가요와 해방춤을배우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며 반미 반독재 투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선배들의 강연을 듣고 토론했다. 그렇게 2박 3일이 지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일종의 주체가 되었다. 이전까지의 삶은 단지 껍데기였고, 벗어던져야할 것이 되었다. 나의 삶보다 민중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당면한 시대적 요구-노동해방과 독재타도-에 지성과 실천으로 복무해야 하는 대사회적 주체가 되어있었다. 비로소 광장 아닌 광장의 삶이 시작되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가투에 나서 돌을 던지고, 민중의 삶을 고민하는 대학생 주체의 삶은 행복한 동시에 조금 불행하기도 했다. 치열한 투사가 되기에 나는 그리 가난하고 불행한 노동자가 아니었고, 소극적 방관자가 되기에는 부르조아도 아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끝나자마자, 나는 자연스럽게 생계형 주체가 되어 버렸다. 대사회적 주체에서 몰사회적 주체로 변화했다고나 할까. 삶에서 광장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 일종의 무의식적 공간으로 남았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등 뒤의 하늘이라고 말하면 적절할 수 있겠다. 가끔 그 곳에 들러 잠시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풍문이 들려왔다. 누군가 촛불을 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광장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돌이 아니라 촛불을 들었다니! 촛불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돌과 화염병으로도 바꿀 수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회의적이었다. 결과는 짐작대로였다. 어린 소녀들의 죽음은 그대로 묻혔을 뿐,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집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헌재의 결정은 촛불이 없었어도 같은 결과일 가능성이 컷다. 17대 총선에서의 한나라당 참패라는 변화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시작된 변화의 흐름이 가져다 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촛불이 밝혀진 광장은 나에게는 너무도 어색했다. 그리고 2008년 미국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어색함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세상에 정치가 아니라 음식 때문에 촛불을 든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물론 미국 소고기 수입이라는 정책반대에는 여러 요소가 있었겠지만, 내게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선택적 기호의 문제로 보였다. 불안하면 안 먹으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소고기는 수입되었고, 얼마쯤 지나자 웬만하면 모두들 미국산 소고기를 먹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든 시민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을까.

예전에는 돌을 던지는 자와 돌을 던지지 않는 자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돌을 던지는 자와 돌을 던지지 않는 자의 내면은 달랐다. 그 둘 사이에는 전혀 다른 광장이 존재했다. 그러나 새로 열린 광장에서는 달랐다. 촛불만 들면 누구나 대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어떤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로도 촛불을 들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에게 그것은 어떤 변화도 이루어 낼 수 없는 행위로 보였다. 총구 앞에서 꽃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상적이고 미학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승리는 대개 총을 든 자의 것이었지, 꽃을 든 자의 것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 나가 촛불을 들면서도, 촛불집회의 성과를 회의하는 냉소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상하지 않은가. 여전히 전경은 첩첩이 둘러싸고 있고 최루탄 대신 물대포가 날아오는데 왜 아무도 돌을 들지 않는 것일까 생각했다. 어쩌면 대사회적이면서도 냉소적 주체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귀를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촛불을 든 누군가가 외쳤다. “가자 청와대로!” 정말 놀라운 구호였다. 어쩌면 나는 외치지 못했지만 누군가가 외쳐주기를 바란 구호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놀란 이유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광장에 나서 데모를 하고 돌아온 날 뒤풀이 술자리에서였다. 전경들과 최루탄 앞에서 우리의 돌은 너무도 초라하고 나약했다. 노태우는 물러가라고 외치다가 최루탄이 터지면 우왕좌왕 달아나는 일을 한두 시간쯤 하다가는 결국 해산한다. 그런다고 저 노태우가 물러가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기왕 데모를 할 거면 하다못해 일박이일이라도 해야지, 잠깐 나가서 구호 외치다가 돌아오는 게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단 말인가. 처음 데모라는 걸 해 본 어린 나는 두서없는 생각을 선배에게 털어놓았다. “형, 노태우더러 물러가라고 외칠거면 청와대로 가야 하는 거 아니예요? 여기서 전경들에게 돌 던진다고 노태우가 물러가요?” 그러자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우리가 돌을 던지는 것은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함이지, 돌을 들고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돌을 던지는 이유는 백골단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지, 전경들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운운. 그럭저럭 수긍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 구호가 너무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자 청와대로”라는 구호를 외친 이후, ‘돌’이 아니라 ‘촛불’을 든 시민들이 정말 청와대로 길을 잡았다.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 향하는 시민들 속에서 광장은 새롭게 거듭나는 것처럼 보였다. 광장이 흐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흘러 들어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향해 흘러나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국에서 차를 타고 광화문으로 왔다. 하지만 그들이 최종 목표는 광화문이 아니라 청와대였다. 그때부터 나에게 촛불은 돌보다 강한 무엇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에게는 풍문으로만 들려왔던 1987년의 6월을 떠오르게 했다. “가자 청와대로”, 청와대로 향하는 그 길은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상징적 거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 외침은 제도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행진을 허용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법이 정하는 바 행진의 허용범위라는 단순한 의미를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라는 명사에 대한 재발견이자 저항이었다. 2016년의 촛불문화제는 단순한 정권퇴진의 요구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 등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들, 그것은 일종의 억압된 목소리들의 솟아오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걸 보며 그 억압의 뿌리는 어쩌면 ‘국가’라는 명사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가 아니라 청산되어야만 하는 개념으로서의 ‘국가’를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를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고나 할까. 정치 질서로서의 ‘민주주의’를 살고 있었으나 나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라는 명사를 살고 있었다. “가자 청와대로”는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국가’라는 명사를 자각하게 했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불씨를 틔웠던 것이었다. 그러자 광장과 촛불은 새로운 의미로 떠올랐다. 실체로서의 ‘국가’와 명사로서의 ‘국가’를 함께 조롱하며 촛불들이 광장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자 실제로 실체로서의 ‘국가’가 물러섰다. 아니 촛불들이 정확하게는 정권과 함께 그 전근대적인 ‘국가’라는 명사마저도 물리친 것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나는 생계형 주체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냉소적인 주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16년을 통해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국가’라는 명사를 재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뿌리 뽑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여전히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광장도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