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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폐광

by 목관악기 2018. 7. 2.





계간 [파란], 2017년 봄호



폐광


한용국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차리인 동네....가 아니었다. 강원도 정선군까지라면 이 가사는 어울리겠지만 사북읍 고한리에 이르면 달랐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분명 어느 집 마당인가에 피어있었다. 하지만 꽃의 빛깔은 모두 같았다. 제 빛깔을 자랑할 여지도 없이 속잎이 올라오는 순간부터 검게 물들었다. 검은꽃이 가득 피어있는 동네, 개나리도 진달래도 검댕이가 묻어 제 빛깔을 잃어버리고 마는 동네가 바로 고한, 내가 살던 고향이었다. 

모든 게 까맸다. 산도 까맣고 물도 까맸다. 석탄을 품고 있는 산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석탄을 캐낸 산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여기저기 쌓여 있는 탄무더기의 빛이 어린 우리의 눈에 반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의 녹음은 검푸른 빛이었고, 겨울에 눈이 쌓였을 때조차도 산은 탄줄기를 시커멓게 내보였다. 흐르는 물조차 검었다. 고한에서 사북으로 흘러내려가던 지장천은 –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이름이지만 – 정말 까만 물이 흘렀다. 미술 시간에 개천을 그릴 때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검은 크레용을 사용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도, 그림을 지도하는 미술선생님도, 그 그림을 보는 부모들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탄광이 한창 번창하던 칠십년대 후반까지 고한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시절을 거기서 보낸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국민학생의 세계는 미묘한 세계라고 느껴진다. 어른들의 세계와 분명하게 차단되어 있었지만, 어른들의 세계가 잔상으로 비쳐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둥근 거울로 이루어진 공 속의 세계 같은 것을 상상하면 어울릴 것 같다. 탄광촌 아이들, 험한 일을 하는 광부들의 아이들은 그렇게 유리천장에 비친 어른들의 삶을 자신들도 모르게 복제하며 자랐던 건 아닐까. 험한 동네라고 부르는 곳에서 험하면서도 철없이 행복하게 나도, 친구들도 자랐다. 

  험한 일, 어떤 것을 험한 일이라고 하는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아이들이 보기에 무서운 일들은 거기서는 자주 일어났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 앞의 포장마차에서 아저씨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막 집에 들어가려는 찰나 신기한 것을 목격했다. 갑자기 두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신기했다. 어른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다니.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저씨가 벽에 엎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곡괭이 자루로 우리를 때리듯이, 풀 스윙으로 곡괭이 자루를 들고 진 아저씨의 엉덩이를 때렸다. 재미있었다. 어른끼리도 저러고 노네. 맞은 아저씨가 다음 판에는 이겼다. 이겼던 아저씨가 엎드리자, 졌던 아저씨도 곡괭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위치가 달랐다. 엉덩이가 아니라 뒤통수였다. 아저씨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우리는 무심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결석이 흔했다. 초등학생이 그렇듯이 아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모님 문제였다. 부부싸움조차 험했다. 결석한 친구집에 가보면 아빠가 칼을 휘두른 탓에 어머님이 팔에 붕대를 감고 있기도 했고, 종업원과 싸우다가 배에 칼을 맞아서 병원에 실려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한 친구도, 그걸 보고 듣는 우리들도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비탈진 산자락에 사는 가난한 친구도 있었다. 맹인 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사는 키 작은 친구였다. 덩치 큰 아이가 계속 그 아이를 괴롭히자, 친구는 중지손가락 만한 못으로 칼을 만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못을 기차가 지나는 철로 위에 놓아두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그 칼은 덩치 큰 친구의 어깻죽지에 박혔다. 그것으로 괴롭힘은 끝났다. 

  모든 게 넘치는 곳이었다.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했다. 없는 게 없었다. 칼라티브이부터 스카이 콩콩, 스케이트, 롤러 스케이트, 스카이 씽씽까지.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신작영화를 상영하는 천막극장이 섰다. 그야말로 서울에 있는 건 고한에 다 있었다. 시장도 컷다. 고한 새시장에는 지금으로 따지면 작은 마트 정도 크기의 슈퍼들이 여럿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어린 도둑들이었다. 여러 명이 무리지어 들어가서 먹고 싶은 것들을 슬쩍 잠바 품에 끼워서 나왔다. 워낙 물건도 사람도 많아서, 어린 우리에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렇게 먹었다. 나중에는 우리끼리 도둑질 기술을 자랑하기도 했다. 길쭉한 밀크캬라멜 한 개를 샀을 때 과연 몇 개까지 소매 속에 넣을 있는가가 내기였다. 일곱 개가 승리했다. 낄낄거리며 우리는 열심히 캬라멜을 까먹었다. 

  왕따도 있었다. 하지만 괴롭힘을 당했던 아이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한 두 아이 빼고는 돌아가면서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내 차례다 싶으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모여서 노는게 좋았다. 조금 다른 건 패거리였다. 고한 삼거리파, 갈래파, 만항파. 나는 고한 삼거리파였다. 저녁이면 고한 삼거리파 아이들은 고한 역전에 모여서 술래잡기나 다방구를 했다. 그 날의 술래는 하루종일 술래였다. 열이 아니라 백까지 세야하고, 나머지는 까마득한 석탄더미 위로 올라가서 숨었으니까. 아니면 모여서 다른 파와 싸울 때를 대비한 싸움기술을 연구했다. 고한 삼거리파에서 나랑 친했던 키 크고 잘생긴 친구가 있었다. 전학 간 후 중 3 여름방학 때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맨 먼저 그 친구 집으로 갔는데 녀석이 없었다. 어머니는 전과 다르게 차를 한 잔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지난 학기에 사북파 애들하고 싸움을 하다가 칼을 맞았단다.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데 햇살이 너무 쨍해서 현기증이 났다. 

너무 험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우리들의 마음마저 까맸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까만 물웅덩이에서 잠수를 하고, 석탄더미 위를 오르내리고, 늘 옷과 얼굴에 검댕이를 묻히고 자랐지만, 빛나는 웃음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고, 미래를 생각하면 뭔가 들뜨는 마음이 있었다. 탄광모를 쓴 아빠들의 얼굴은 검었지만, 험한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들이 많았으니까, 내 아이 남의 아이 가리지 않고 밥이며 입성을 챙겨주던 그악스러운 엄마들의 손길이 있었으니까. 까까머리 중학생 1학년을 마치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탄광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폐광이 시작되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전학을 간 후로 나도 여리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로 자라났다. 

  지금은 카지노 동네가 되어 있으니, 여전히 험한 동네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을 것이다.  험하게 놀고, 험하게 낄낄거리며, 험하게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