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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유년의 꿈

by 목관악기 2008. 7. 3.



극단 '십년후'가 공연하는 연극, '어머니'를 관람하기 위해 오랜만에 대학로로 나들이 했었다. 나중에 배우들이 관객들과 기념촬영하는 데 곁다리로 서서 캔파로 한 컷 찍었다.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지만, 나는 공연 후에 배우들과 사진찍는 것은 즐기지 않는 편이다. 내가 공연을 했다면 또 모를까. ^^

유년시절 좀 더 정확히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배우를 꿈꾼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랬다. 탄광촌에서 깨벗고 자라던 시절 초등학교 내내 반이나 학교 교회행사에서 주연이나 주연이 아니더라도 비중있는 희극적 조연은 꿰차고 살았을 정도로 조금 까불고(?) 돌아다녔다. 노래도 잘했고(?) 춤도 잘 췄고(?), 장기자랑은 다 내판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당연히 나는 배우가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즐겁게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의 초봄 무렵의 어느 날, 한 소년의 인생을 뒤흔든 사건은 그예 일어나고야 말았다.

책읽기 시간이었는데,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 어떤 희곡이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주연이었고, 내가 읽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코감기에 걸려 있을 게 뭐란 말인가. 내가 읽기 시작하자 몇몇 아이들이 코맹맹이 소리가 짜증난다고 놀렸고, 선생님은 다른 사람을 지목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놀리기는 해도 누가 감히 나를 대신한단 말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정말 완전히 번호에 의해서 한 친구가 불려 일어났다. 그 친구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전.준.호. 였다. 그리 튀는 아이도 아니었다. 나는 안심했다. 사실은 조금 신경이 쓰이는 놈이 있기는 했지만(희한하다 그녀석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녀석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지나가야 할 국어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녀석이 대사를 읽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려나왔고 대사가 끝나자마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으며, 선생님은 거의 경탄에 가까운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더 기가 찬 것은 애들이나 선생님의 반응이 아니었다. 나도 똑같이 박수를 치고 경탄을 하면서 녀석을 바라 보았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한 것에 비하면 내가 그 동안 해왔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졸지에 정말 평범한 아이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비참함에 혀를 깨물고 이를 악물고 새로운 기회를 노리며 재기를 다짐했어야 했는데,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 것이었다. 재능, 천부적인 재능, 바로 그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완벽하게 포기했다. 더 이상 나에게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그 후 중학교 1학년이 되기까지 내게 몇 번의 기회가 왔지만 언제나 녀석은 조연으로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조용히 은퇴(?)를 준비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교회연극에서였다. 내가 주연을 맡고 녀석은 조연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연극에 내가 그녀석을 끌여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 당연히 주연의 자리는 그 녀석으로 채워졌고, 크리스마스에 신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정말 나는 진심으로 관객이 되어 박수를 치고 또 쳤다. 그 해 겨울이 다 갈무렵,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탄광촌을 떠나 전학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은 갔다.

물론 그 다음에 나는 시집 한 권을 만나게 되고, 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아름답던 시절은 까맣게 잊었다. 어찌어찌 사정어 있어서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나는 탄광촌에 가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닌다는 내 말에 친구들은 다짜고짜 합창을 했다. '연극영화과지?" 그때서야, 나는 아 그랬었지 하고 옛날을 되새길 수 있었다. 눈이 유독 많이 내려 길이 온통 검은 진흙탕으로 질척저리던 겨울,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고 미끄러질 뻔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또 한 번 연극 때문에 골탕을 먹고 난 뒤여서 더욱 그랬겠지만, 뭐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 '십년 후'라는 극단을 나는 참 좋아한다. 대표도 단원들도 따듯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십년 후가 지난 지금 따뜻해졋으니, 지금부터 십년 후는 더욱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모두들 열심히 노력하니까 그렇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사진을 올리려다가 쪼끔 가슴아프기는 했지만, 뭐 평행우주 어디선가는 나도 열심히 누군가를 연기하고 있겠지 싶다. 유년시절의 꿈. 아마, 그 시절이 가장 순수하고 완벽했던 시절 아닐까. 모두들 포기하지 않게 되기를, 어떤 불세출의 재능을 만난다 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