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파란] 2017년 봄호
박노해
대학에 입학하기 전 예비대학에서 우리가 맨 먼저 받은 교육은 사상교육이었다. 거기서 처음 전두환과 노태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독재타도 양키고홈’ 아지를 배웠고, 노동가요를 배웠다. 그리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서울의 공장으로 갔다. 한달에 18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등록금은 93만원이었다. 선배들은 [껍데기를 벗고서], [강좌철학] 같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한가했다. 어쩐지 죄의식이 들었다. 한 학기를 고민하다가 빨간건물이라고 불리던 교지편집실로 자진해서 찾아갔다. 낮이면 회의나 데모를 하고, 밤에는 사회과학 스터디를 했다. 그때 선배가 시집 한 권을 건넸다.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였다. 첫페이지를 펼치고 나도 모르게 끝까지 읽었다. 책을 덮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노동의 새벽]을 읽었다. 거기에는 상상도 못해본 세계가 있었다. 고백하자면 어딘가 무서운 세계였다. 우리 건물은 민중민주 계열이었다. 민주화와 노동해방, 선배들과 함께 고민하고 토론했지만, 노동현장에 있다는 선배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아무도 박노해 시인을 실제로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89학번, 우리는 조금 이상한 세대였다. 흔히 말하는 낀세대였다고나 할까.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가열차게 일어났던 불길은 김지하의 한 마디에 사그러들었다. 열악한 노동현실과 노동해방의 기치는 그 이후 풍문처럼 떠돌았다. 1991년 사노맹 사건이 있었고, 3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나는 빨간건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학생활은 끝이었다. 빨간건물 바깥에는 대학이 없었다. 286컴퓨터와 삼국지 게임이 있었고, 락카페가 있었고, 노래방이 있었다. 그 무렵 박노해 시인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대학원은 학문을 탐구하는 곳이었지만, 녹녹치 않았다. 전혀 다른 형태의 갈등과 계급이 있었다. 어떤 선배는 공황장애를 앓기도 했다. 나는 아예 비주류로 살았다.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학원으로 출근했다. 90년대였다. 서태지가 등장했고, 대중문화가 불길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가끔씩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읽었다. [참된 시작]이었다. 짐승같은 자본이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 앞에서 나는 휘청거렸다. 후일담 소설들은 말했다. 그 시절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욕망이 있었다고, 우리에게는 국가도 민주화도 있었지만, 욕망도 있었다고.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난 밤이면 혼자 술을 마셨다.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옛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다. 대학시절에는 운동권 아닌 친구들과 자주 토론하다가 싸우기도 했는데, 90년대에는 이상하게도 모두가 운동권이었다고 했다. 노래방에 가서 마지막에는 꼭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불렀다. 투쟁! 투쟁! 단결투쟁! 아지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이상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민주화의 상징이기도 했던 김영삼씨가 대통령이었다. 한 번쯤 박노해 시인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내 주변에는 박노해를 만날 수 있다는 사람이 없었다. 박노해는 여전히 수감중이었다. 그 때 이 땅의 노동현실은 내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의 노동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학원생이라는 명목으로 버티고 있었다.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니까. 전두환 노태우 시절과는 다르니까, 그래도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라고 치부해버렸다.
90년대가 저물 무렵 피씨통신이 생겼다. 나는 한 문학동아리에 가입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글들이 올라왔다. 거기서는 아무도 투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글에 대한 조회수였다. 내용보다는 조회수가 인기의 척도였다. 문학과 지성사나 창작과 비평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양한 내용과 기발한 형식의 글들이 넘쳐났다. 한동안 그 속의 사람들과 글에 푹 빠져 살았다. 하지만 어딘가 유령들의 만남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거기서는 노동이 중요하지 않았다. 취미와 취향의 세계였다. 가끔 역사의식같은 단어를 쓰면 어딘가 어색해졌다. 취미가 사라지면 세계도 사라졌다. 예상은 적중했다. 인터넷이 보급되자마자 피씨통신 회사들은 사라졌다. 그와 함께 모든 동호회들은 사라졌고, 더불어 사람들도 사라졌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고, 아이엠에프가 도래했다. 모두가 아이엠에프의 희생자였다. 아이엠에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상목표였다. 내가 속한 업종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도 영향이 있었다. 그 때 어느 날 오후 길을 걷다가,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망함에 휩싸여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는 이런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정의와 평등이 확산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속한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과 정의와 평등은 풍문이 되었고, 오로지 아이엠에프가 문제였다. 아이엠에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박노해는 수감생활을 끝내고 출소했다. 나는 가끔 혼자 중얼거렸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시인을 만나면 묻고 싶었다. 어떻게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느냐고.
세월이...흐르고...흘러...2016년, 나는 나의 삶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아주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피디니 엔엘이니 허세를 부리지만, 여전히 아침이 되면 부끄러움에 사로잡힌다. 짐승같은 자본은 이제 화장을 지우고 자신이 짐승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대학’마저 자신들이 ‘재단’임을 선언했다. 이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자본만이 희망이다”로 바뀌었다. 게다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본’이다. 그것도 열악한 시간 노동 ‘자본’이다. 박노해 시인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사라졌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운동가가 되었지만, 나는 자신의 평화를 위한 운동조차 하지 못한다. 박노해 시인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마감이 끝나는 날까지, 마감이 지날 때까지 미루고 미루었다. 결국 나를 고백하는 것 밖에는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것도 부끄러운 변절자의 고백 말이다. 누군가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니 다행’이라고 비웃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