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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시, 청동

빗 속에서 중얼거리다 외 1편

by 목관악기 2018. 7. 2.



웹진 [문화,다] 2018년 여름호



빗 속에서 중얼거리다


한용국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옛 일을 생각하고 있다

버스 색깔의 종류를 헤아리고 있다

빗방울의 파문은 왜 원형일까

가슴에 동그라미를 쌓아보고 있다

기억은 어떤 도형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지각을 걱정하며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다

여인들의 미끈한 다리를 보고 있다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아직은 안 늙었다고 자위하고 있다

파문만큼 많은 우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출가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다

정류장도 진화하고 있구나 감탄했다

언제쯤 버스를 기다리지 않을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버스를 기다릴 필요없는 사람들의 차이를 생각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쇠항아리라던 시인을 생각했다

나의 생계는 뜨거워도 내려놓지 못하는 쇠솥단지다 

마르크스는 비 오는 날 민중을 걱정했을까 

빗소리와 노랫소리와 자동차 바퀴에 밟히는 

빗방울들의 비명이 귓바퀴에서 섞이고 있다

변함없는 건 자연과 변덕이구나 생각했다

지나간 사랑들이 떠올랐다

지나간 사랑들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겠지

오 맙소사 나는 모든 사랑에 완패했다

장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 내리는 비도 어제 내린 비와는 다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겠지

차이와 지연으로 인해 내리는 비는 

당신의 눈앞에서 현전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인으로 미끄러진다

지역감정은 달라도 지역 날씨는 동일하구나 생각했다

파문의 개수를 세다가 버스를 놓친 사람은 

낭만적인 사람일까 현실도피적인 사람일까

비를 흠씬 맞는 게 

비와 대결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우산만 봐도 그게 얼마나 순진한 건지 안다 

오 맙소사 나는 모든 사랑에 완패한 사람이다

건너편 정류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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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수를 사랑해서



한용국




영수가 왔다 집집마다 유리창을 깨고 주먹을 들이밀었다 주먹에서 영수 냄새가 났다 세상에서 처음 맡는 냄새였다 익숙해져야지 생각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모두들 기다렸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반가워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주먹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영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견은 묵살 당했다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데서나 영수의 욕설이 들렸다 아침 저녁으로 영수의 주먹을 보며 모두들 안심했다 아무도 주먹 속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수는 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은밀하게 사라졌다 아무도 영수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아닌 영수였기 때문에 영수에게는 주먹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유리창 안에서 다정하게 껴안고 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