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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시, 청동

저녁을 걷는 뿌리 외 2편

by 목관악기 2018. 7. 2.

계간 파란 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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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걷는 뿌리


한용국



목 잘린 구름들이 떠다녔다

비극의 형식은 무죄

오늘은 권태를 요리할 차례다

흘러내리는 걸 닦지 않는 이유는

잃어버린 피로 때문이지


마지막 웃음은 남겨둔다

가슴 속 달의 비릿한 냄새

무엇을 덮어 쓰고 어두워질까

무엇을 몸에 두르고

꿈을 새길까

누군가는 오래 뿌리를 씹고 있다 


저녁의 맛은 쓰고

구름은 조금씩 과장되어 있으니

자유는 칼날처럼 번뜩인다

왜? 하고 물어보면

그래서?하고 반문하는 자세로

어둠 속으로

어둠이 깊이 베이고 있다


뒤집힌 몸을

다시 뒤집을 수 있을까

삭아서 떨어지는 밤의 얼굴들

그러나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

어두운 놀이터에서 

자기 목을 조르던 시간이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는 소리가 난다


몸을 조금 왼쪽으로 틀고

목은 약간 기울인 자세를 취하자

신발끈을 세게 묶고

여기서 얼굴까지만 가는 거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지만

거기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무언가 한 마디 말을 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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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맘때, 물의 기억



한용국



눈동자 속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고 

물 밖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무들은 그저 서 있었지

그게 왜 그렇게 슬펐을까. 

때로는 

마음도 개발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나무들은 그저 서 있었는지도 


바람이 불었고

물결이 조금 일렁거렸다

빛과 빛 사이에서

캄캄하게 구겨진 목소리들이 떠다녔다

바로 이 때다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만나는 풍경과 헤어지는 풍경 사이로

이파리들이 떨어졌다

가볍게 흔들리며

물 속으로 눈동자가 번져갔다

눈동자 속으로 물이 차올랐다


눈동자 속을 걸어가는 물의 끝까지

물 밖을 걸어가는 눈동자의 끝까지

벽 없는 마음은 얼마나 공포 가득한지


물에 비친 나무들에게도 눈이 있었다.

자기 등 뒤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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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맛



한용국



함께 걷던 사람이

나무를 가리키며

앵두군요라고 말했다


붉고 동그란 열매들이

먼 나라의 언어 같았다

열매 속은

잉잉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유월이군요

이상기후가 계속되지만

여전히 앵두는 익어가는군요


앵두 몇 알을 입에 넣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어디로 걸어 가는지 

알 수 없어졌다


이런 게 앵두 맛이군요

고개를 돌렸는데

앵두 나무도 없고

함께 걷던 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