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월간 현대시 9월호, 이달의 시인 특집
여기서 갸르릉 갸르릉
한용국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도무지 귀를 기울일 수 없어
왼쪽으로 고개 돌린 고양이 자세로
나는 창밖만 바라본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늘어놓는데
지나가는 자동차의 숫자를 세고
오가는 사람들의 가방 속이 궁금해진다
언제부터 여기에 자주 오게 된 것인지
언제쯤 여기에 그만 오게 될 것인지
불확실한 커튼의 속내를 헤집어 보며
구름 위에 펼쳐진 빛의 바다를 생각한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불운이었을까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허공에 흩어지고
기포 속으로 뻐끔거리며 사라지는 입술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돌돌 말리는 혀를 펴보려고 노력한다
먼저 도착하고 늦게까지 기다리는 삶은
불안의 옛 통증을 기억하고 있어
더위를 오후 속으로 늘어뜨리지만
조금 흔들려도 괜찮겠지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고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
만약이라는 말은 조금 위안이 될 테지만
운명에 서툴게 맞선 일은 후회할 수 없으니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자
바지 주머니에 진실을 쑤셔 넣어두고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표정으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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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관절인형연습
한용국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바람 드는 곳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형 저는 요즘 자꾸 사라지곤 해요
그럼 다시 나타날 때까지 술을 마시면 되지
형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서
어느새 목구멍에 걸린 채
살고 싶어서 안간힘을 쓴다구요
나를 믿으렴 네가 사라지면
내가 네 머리로 들어가서 살아줄게
형, 목구멍에 걸려 제 입 바깥을 보면
세상은 작은 거울처럼 붙어 있는 걸요
걱정하지 마라 네가 기어 나올 때까지
내 눈으로 거울 바깥을 지켜줄 테니
그럼 아마 형에게서 내가 보일걸요
아니야 너는 사라지고 있으니까
네게서 내가 나타나기 시작하겠지
두 몸이 덩그러니 까딱이고 있겠지
형 이미 그렇게 산 지 오래 되었어요
저도 누군가 사라진 이 몸에 들어와
오래 바깥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바람이 지나가고 다른 바람이 들어오고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빈 잔을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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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모자
한용국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이 달의 모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볼록과 오목 사이에
끼워두었던 위장된 웃음은 폐기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아무리 숨기려고 애써도
우리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모자는 원래부터 당신의 소유가 아니었거든요
당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저희는 당신의 머리에 맞는 모자를 설계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이 어떤 책도 끝까지 읽을 수 없던 이유입니다
당신이 어떤 울음도 끝까지 울 수 없던 이유입니다
새로운 여백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백이란 챙을 둥글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니까요
주의사항이 존재합니다
반드시 구두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모자는 비행에 적합한 도구가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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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낙천주의
한용국
자막이 떨어진다
사람 이름이어도
꽃의 이름이어도 좋다.
어떤 관계는 서사가 필요하다
삼인칭으로 서술되는
오늘은 화요일
구름이 사라진 화요일
화면 속의 물병에서
물고기는
콘크리트의 눈을 하고 튀어오른다
콜라주를 원한다면
다만 한 자루의 총이 필요할 뿐
탕하코, 탕하코,
새로운 세계는 뒤에서 솟아오른다.
2
설움을 견디느라
다리에 난 털을 꼬고있는 사람과
외로워서
선인장 가시를 헤아리고 있는 사람과
거짓말하느라 지친 저녁과
실컷 웃다가 시치미를 떼는 가로등과
미루었던 사과를 마치고 돌아온 신발은
우연한 순간 때문에
구름의 콜라쥬가 되어
벌 받는 듯이
뭉클한 팔을 들고 서 있는
나무들 아래 모여
3
푸른 하늘에는
인화된 구름의 척수들이 걸려 있다
나무들은 뿌리를 한사코 땅 속에 감추고
내가 나에게 주입한 비밀에는
침묵의 등고선을 심어두었다
나무의 속,에게로 전화를 걸면
그거야 말로 수신자 부담의 완성인 셈
푸른 하늘에는 맥락이 없지만
저마다 서정적인 나무의 척수들
흐르다가 딱 멈추어 서 있는 것들에게
붙여 놓은 살벌한 자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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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전
한용국
열두시 9분이다 음악에서 시작할까
음보격으로 통통 튀어볼까 난로는 등을 데우고
ᅠ
무언가 쓰고 지워버리기에 적당하다
경악과 환멸 사이에 잠시 서성이는거지
머리카락이 멋대로 자라는 게 느껴지고
손톱이 움찔하며 삐져나오는 걸 눈치챈다
ᅠ
등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시간인데
어제에 대해서는 한 줄도 못 쓰고
오늘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계획할 수 있다
창문에서 쉬었다가 콘센트에서 마무리해도 돼
ᅠ
9분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찰나가 영원이라는 말을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십 분이 되어야
비로소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매일 1분씩 남겨 둔 사람에게는
어떤 낭비가 필요한 걸까 십 분으로 건너갈 만큼
단어가 필요했을 뿐인데 음악은 끝나버리고
난로 위에서 웃음이 낄낄대며 끓어오르고
고개를 돌리면 등 뒤에서 누군가 훅 덮쳐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