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2001년10월17일 제380호
미국에 대한 응징은 정당하다?
- 의사 길베르트와 후숨의 대담한 발언, 노르웨이 지성계의 ‘극단적인’시각
사진/ 노르웨이 지성계의 일단에선 9월 11일의 테러참사가 '제1세계 약탈자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정당한 저항' 이었다는 논리를 편다.(GAMMA)
미국 테러 참사 이후의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필자의 기분을 그나마 살린 것은, 노르웨이사회의 이성적인 반응과 판단이었다. 테러 참사의 소식을 접한 대학교 동료와 학생들의 첫 반응은, “역시 올 것이 왔다”는 말과 “미국의 보복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박정희 쿠데타에 대한 윤보선의 반응을 생각나게 하는 이 “올 것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을 지니는가. 미국의 세계 최대 규모의 무기 판매와 기지 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성지(聖地)에서의 미군 주둔과 친미 정권들의 양산,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와 러시아의 체첸 침략에 대한 방관 등의 무모하고 이기적인 외교정책들이, 언젠가 이와 같은 일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레바논 소년 타리크의 기억
한 교수는 필자에게 “납치범이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아마 미국의 경제제재로 굶어죽은 수백만명의 이라크 아이들과 노약자를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나도 같은 입장이었으면 비슷한 일을 저지를 충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미국의 극우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명분으로 고(高)예산의 장기적인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벌이리라는 예상들을 했다. 사실 참사의 날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전쟁 추진을 저지하는 게 노르웨이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주된 목표였다. 이곳 국교인 루터교의 대다수 주교들은 반전 성명서를 내기도 했고, 국제사면기구의 지부가 앞장서서 평화시위를 크게 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추천위원의 일부는, 이번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조건으로 부시 미국 대통령을 평화상 수상의 후보에 올릴 제안까지도 내놓았고, 수많은 기존의 평화상 수상자들이 부시에게 보복 저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의 수상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이 그들 성명서 발표자 중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웨이 지식인 사회의 차분하고 자성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이색적으로 보이는 의견들이 가끔 나온다. 그 대표적인 것은, 9월30일치 <다그블라데트>(Dagbladet) 신문이 표지 기사로 보도한 트롬소(Tromso)지역의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Mads Gilbert)와 외과의사 후숨(Hans Husum)의 발언이다. 중동지역에서의 의료봉사 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다그블라데트>의 기자에게는 물론 수많은 독자에게도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숨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가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숨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당신도 ‘폭격기 조종사’의 눈으로 보는가
사진/ 노르웨이의 저명한 미디어 연구나 루네 오토센 교수. 그는 <다그블라데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의 전쟁을 '거짓말 전쟁'으로, 미 국방부를 '거짓말 공장'으로 규정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었다. 그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이름의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손은 못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음식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경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숨은 기자와 많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근본적인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은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숨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적인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 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 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의 결과로 아사사태에 시달려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로 성장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인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대량 테러가 왜 하필이면 미국과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돼야만 하는가?”
현재의 테러 참사가 ‘제1세계 약탈자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정당한 저항’이라는 논리의 일환으로, 길베르트와 후숨은 그 수단까지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길베르트의 말로는,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권리를 가졌다면, 핍박을 받은 자들도 미국을 응징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터뷰의 결론을 후숨은, “의사인 나는 물론 비행기를 납치하여 빌딩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중동에 대한 대량 폭력을 행사해온 미국을 응징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우리도 공범이 될 수 있다
사진/ 노르웨이의 한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오른쪽)와 외과의사 후숨(왼쪽)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고 과감히 이야기한다.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현재 노르웨이의 지성계에서마저 길베르트와 후숨의 의견은 ‘극단’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동인들이 자살 테러를 하는 근본 배경은, 서구·미국과 그 첨병 이스라엘의 침공·약탈·학살 행위다. 이번 테러를 저지른 행동대원들도, 굶어죽은 이라크 아이와 총탄에 맞아 죽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끔찍한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 왕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떼돈을 벌었던 빈 라덴의 부친의 재벌 기업도, 미국과 유럽의 유가증권에 많은 투자를 해왔던 갑부 빈 라덴 자신도 ‘제3세계 민중을 위한 투사’는 아니다. 이번 테러 행위의 의도가 과연 빈 라덴 조직의 강화와 위상 제고를 가져다주어야 할 미국의 무모한 보복의 유발인지,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대권을 향한 계획의 일환으로 사우디의 보수적·반미적 종교계로부터의 인정을 노리는 ‘자기 확립’인지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제3세계 민중을 위한 투쟁’으로 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테러리스트들이 ‘제3세계를 위한 설욕(雪辱)’을 표방했다 해도, 미국의 민중을 대량으로 희생시킨 그들의 폭거는 미성숙과 계급적 연대의 망각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정세의 이해와 무관하게 길베르트와 후숨 등 의견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미국의 이라크 폭격 등에 따른 중동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지금의 테러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미국 폭력 희생자들의 원혼들을 달래려면, 새로운 희생자들을 낳는 것보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노력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길베르트와 후숨의 대담한 발언에서 건질 것은 한 가지 있다. 지금은 언제보다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영국이 이라크의 민중을 굶기면서 폭격했던 1990년대에, 우리는 그 희생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는가? 희생자들을 생각한 나머지 미제상품의 구매나 미국 유학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는가? 세계 최대 폭력 집단인 ‘형님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매향리 문제나 주한미군 범죄 때문에 들고 일어나긴 했어도, 머나먼 중동의 쓰러져 가는 아이들을 생각할 여유(?)까지는 없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제라도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미제 폭탄들이 약하기 그지없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수도 없이 죽이는 것을 가만히 구경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 넓은 의미에서 공범이며 미래의 더 큰 자살 테러를 비판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엄청난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미국에 대한 응징은 정당하다?
- 의사 길베르트와 후숨의 대담한 발언, 노르웨이 지성계의 ‘극단적인’시각
사진/ 노르웨이 지성계의 일단에선 9월 11일의 테러참사가 '제1세계 약탈자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정당한 저항' 이었다는 논리를 편다.(GAMMA)
미국 테러 참사 이후의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필자의 기분을 그나마 살린 것은, 노르웨이사회의 이성적인 반응과 판단이었다. 테러 참사의 소식을 접한 대학교 동료와 학생들의 첫 반응은, “역시 올 것이 왔다”는 말과 “미국의 보복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박정희 쿠데타에 대한 윤보선의 반응을 생각나게 하는 이 “올 것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을 지니는가. 미국의 세계 최대 규모의 무기 판매와 기지 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성지(聖地)에서의 미군 주둔과 친미 정권들의 양산,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와 러시아의 체첸 침략에 대한 방관 등의 무모하고 이기적인 외교정책들이, 언젠가 이와 같은 일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레바논 소년 타리크의 기억
한 교수는 필자에게 “납치범이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아마 미국의 경제제재로 굶어죽은 수백만명의 이라크 아이들과 노약자를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나도 같은 입장이었으면 비슷한 일을 저지를 충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미국의 극우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명분으로 고(高)예산의 장기적인 ‘더러운 전쟁’(Dirty war)을 벌이리라는 예상들을 했다. 사실 참사의 날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전쟁 추진을 저지하는 게 노르웨이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주된 목표였다. 이곳 국교인 루터교의 대다수 주교들은 반전 성명서를 내기도 했고, 국제사면기구의 지부가 앞장서서 평화시위를 크게 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추천위원의 일부는, 이번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조건으로 부시 미국 대통령을 평화상 수상의 후보에 올릴 제안까지도 내놓았고, 수많은 기존의 평화상 수상자들이 부시에게 보복 저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의 수상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이 그들 성명서 발표자 중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웨이 지식인 사회의 차분하고 자성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이색적으로 보이는 의견들이 가끔 나온다. 그 대표적인 것은, 9월30일치 <다그블라데트>(Dagbladet) 신문이 표지 기사로 보도한 트롬소(Tromso)지역의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Mads Gilbert)와 외과의사 후숨(Hans Husum)의 발언이다. 중동지역에서의 의료봉사 경험이 풍부한 두 의사의 의견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약 7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에도 명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의사가 한다는 것은 <다그블라데트>의 기자에게는 물론 수많은 독자에게도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숨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는 그의 논리를 일축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양민을 죽이는 것을 의사인 당신이 어떻게 변호하느냐”는 분노가 섞인 기자의 질문에 후숨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당신도 ‘폭격기 조종사’의 눈으로 보는가
사진/ 노르웨이의 저명한 미디어 연구나 루네 오토센 교수. 그는 <다그블라데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의 전쟁을 '거짓말 전쟁'으로, 미 국방부를 '거짓말 공장'으로 규정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을 감행한 1982년에,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의료봉사를 했었다. 그때 환자 중에서 ‘타리크’라는 이름의 레바논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아이의 부모와 가족, 모든 친척과 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타리크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수술을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그를 어느 정도 치료는 했지만 끝내 오른손은 못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애는 말도 안 하고 음식도 안 먹었다. 완전한 절망의 경지에 있었던 셈이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의욕을 주기 위해 ‘왼손으로 총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애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때 그 애가 싸움에 몰두하다 죽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친 뒤, 후숨은 기자와 많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근본적인 세계관의 문제를 언급했다. “부유한 쪽에서 사는 우리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십자군’을 들먹이는 부시의 망언들을 당연한 것처럼 듣는 우리는, 그 거대한 ‘십자군’에 희생될 사람들은 생각 못하는 것이다.”
후숨은 이번 사태를 긴 역사적인 안목으로 진단하려고 한다. “이는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이 벌여온 오래된 싸움의 한 장면이다. 중세적·근대적 서구의 세계사 무대 등장이 이루어진 때부터, 이미 50대에 걸쳐서 비(非)서구지역의 주민들은 십자군의 약탈과 노예 매매, 정복과 식민화, 약탈의 결과로 아사사태에 시달려왔다. 그러다가 평화스러운 농민들이 결국 투사로 성장되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역사적인 죄악에 대한 형벌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대량 테러가 왜 하필이면 미국과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돼야만 하는가?”
현재의 테러 참사가 ‘제1세계 약탈자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정당한 저항’이라는 논리의 일환으로, 길베르트와 후숨은 그 수단까지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길베르트의 말로는,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권리를 가졌다면, 핍박을 받은 자들도 미국을 응징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터뷰의 결론을 후숨은, “의사인 나는 물론 비행기를 납치하여 빌딩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중동에 대한 대량 폭력을 행사해온 미국을 응징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우리도 공범이 될 수 있다
사진/ 노르웨이의 한 국립병원 원장 길베르트(오른쪽)와 외과의사 후숨(왼쪽)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에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고 과감히 이야기한다.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현재 노르웨이의 지성계에서마저 길베르트와 후숨의 의견은 ‘극단’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동인들이 자살 테러를 하는 근본 배경은, 서구·미국과 그 첨병 이스라엘의 침공·약탈·학살 행위다. 이번 테러를 저지른 행동대원들도, 굶어죽은 이라크 아이와 총탄에 맞아 죽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끔찍한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 왕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떼돈을 벌었던 빈 라덴의 부친의 재벌 기업도, 미국과 유럽의 유가증권에 많은 투자를 해왔던 갑부 빈 라덴 자신도 ‘제3세계 민중을 위한 투사’는 아니다. 이번 테러 행위의 의도가 과연 빈 라덴 조직의 강화와 위상 제고를 가져다주어야 할 미국의 무모한 보복의 유발인지,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대권을 향한 계획의 일환으로 사우디의 보수적·반미적 종교계로부터의 인정을 노리는 ‘자기 확립’인지 아직 이해하기 어렵지만 ‘제3세계 민중을 위한 투쟁’으로 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테러리스트들이 ‘제3세계를 위한 설욕(雪辱)’을 표방했다 해도, 미국의 민중을 대량으로 희생시킨 그들의 폭거는 미성숙과 계급적 연대의 망각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정세의 이해와 무관하게 길베르트와 후숨 등 의견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미국의 이라크 폭격 등에 따른 중동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지금의 테러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미국 폭력 희생자들의 원혼들을 달래려면, 새로운 희생자들을 낳는 것보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노력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길베르트와 후숨의 대담한 발언에서 건질 것은 한 가지 있다. 지금은 언제보다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영국이 이라크의 민중을 굶기면서 폭격했던 1990년대에, 우리는 그 희생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는가? 희생자들을 생각한 나머지 미제상품의 구매나 미국 유학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는가? 세계 최대 폭력 집단인 ‘형님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매향리 문제나 주한미군 범죄 때문에 들고 일어나긴 했어도, 머나먼 중동의 쓰러져 가는 아이들을 생각할 여유(?)까지는 없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제라도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미제 폭탄들이 약하기 그지없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수도 없이 죽이는 것을 가만히 구경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 넓은 의미에서 공범이며 미래의 더 큰 자살 테러를 비판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엄청난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