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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비평적 메모들

by 목관악기 2007. 11. 11.
송기숙의 소설, 창비 가을호. 길 아래서.

소설에서의 속죄의 테마에 대해 생각해 볼 것.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속죄의 삶을 사는 인간이다. 그가 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는 선의에서 비롯되지만 그 결과는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 온다. 거기에서 비롯된 억압 혹은 죄의식은 그를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공비로 몰린 사람을 살리려다가 끝내 부대원들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 그것이 모두 그의 탓이라는 것을 괴로워하며 방황하던 그는 결국 종교적인 속죄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죄의식으로 인해 그가 행한 일들이 오히려 그에게 좀 더 밝고 건강한 삶,(허드렛일을 맡아서 함으로써, 그것도 아주 잘 해냄으로써) 오히려 칭송받기까지 하는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은 속죄의 테마에서는 조금 비켜난 새로운 질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끼워넣어진 주제의식이랄까.

결론에서 그에게 죄의식을 짐지게 했던 그 사고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당시 정비병과의 조우, 그 또한 속죄의 삶을 살고 있으며, 곧 죽음에 가까이 가있다. 소설은 그 정비병이 주인공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암시한다. 그의 말 중에 이 소설의 키워드가 있다. ‘사상, 사상이 도대체 뭐길래’ 그는 나름대로 그것이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상의 대립이 불러 온 비극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또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는 담담하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이 소설은 몇 가지의 질문을 쏟아진 화살통처럼 늘어놓는다. 속죄의식과 삶, 이념대립의 현실과 개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등, 이런 소설이 아마 열린 소설일 것이다. 그에 비해 천운영이던가의 샐러리맨의 하루,는 단지 시적으로 비극적인 하루들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사실주의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심리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쪽이 내게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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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에 대한 의미 있는 진술
                            -      앙리 포시용, 형태의 삶, p.44.


미로 안에서는 어떤 은밀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슬쩍 숨어 버리는 변덕스러운 선 때문에 완전히 길을 잃은 시선이 방향을 상실한 채 나아가고, 운동도 깊이도 아니면서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이 생겨난다. 켈트족의 미사용 복음서 초록에서 장식은 문자와 양피지의 구획 속에 단단히 붙들려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중첩되고 혼합되면서 다양한 평면 위를 제각기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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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공간에 대하여
- 허만하, 청마 풍경, pp. 82 - 83


그러나 그런 ‘바깥’에 대응하는 ‘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인이 있다. 그 시인은 릴케다. 그는 그것을 ‘세계 내면 공간’이라 불렀다.

모든 존재를 뚫고 하나의 공간이 퍼져 있다/’세계 내면 공간’/새들은 소리도 없이 우리들의 안을 가로질러 난다. / 아 성장하려는 내가 바깥을 바라보면,/나의 안쪽에 한 그루 나무가 자라난다. (릴케, 후기시집)

나의 안쪽에 다시 바깥의 끝없는 공간에 대응하는 무한한 넓이가 있고, 또 바깥의 현상에 상응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지금쯤은 아름답게 물든 나뭇잎들이 끊임없이 나의 안쪽에서 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길손처럼 그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는 가을의 들길을 나의 안쪽에서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릴케의 세계 내면 공간이란 바로 시의 공간이다. 릴케의 ‘안쪽’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두이노의 비가]의 [제 7비가]에 나오는 다음 같은 구절은 그 정도를 암시한다.

사랑이여, 어디에고 세계는 없을 것이다 / 내면 밖에는/ 우리들의 삶은 변화하고 사라져간다/ 그리고 외부는 점점 모자라는 것이 되어 사라져간다.

시의 공간이란 물리학적, 수학적 공간과는 달리 실존의 구체적인 체험의 공간에 속한다. 물리학적, 수학적 공간은 사람이 없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는 좌표의 원점을 어디에 정해도 좋다. 그리고 그 임의의 원점 어디에 옮겨도 좋다. 나는 그것을 죽어 있는 공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체험공간은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바로 의미의 공간이다. 또는 양의 공간에 대한 질의 공간이다.
부산의 공간과 서울의 공간이 나에게는 다르다. 대구의 공간과 경주의 공간도 다르다. 비록 물리학적으로는 그것이 같은 것이라 치더라도 말이다. 시공간이란 일종의 체험공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쪽’에 있는 것 같다. 그 좌표의 원점은 언제나 살아 있는 ‘나’에게 밀착해 있다.

                                                                    허만하, 청마 풍경,  p.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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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주체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눈에서 참된 예술가의 시선을 느낀다. 예술은 언제나 하나의 갈등(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가란 보는 눈이 만드는 공간과 느끼는 눈이 만드는 공간 사이의 긴장에서 새로운 스스로의 제 삼의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최근 발표되는 시편들을 두고, 시를 쉽게 써야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 많다고 볼멘 소리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쓸데 없이 과잉된 난해성의 포즈를 경계하면서 원활하고도 풍부한 소통을 통해 감동의 질과 폭을 심화하고 확대하는 것은 언어 예술로서의 서정시가 반드시 지켜야 할 미덕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면, 시를 ‘쉽게’ 쓰라는 것은 곧 ‘시’를 쓰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말하자면 시가 가벼운 감상이나 평이한 소망들을 나열하면서 순조로운 동화를 제일의적 목표로 두었을 때, 그것은 ‘시’라는 오래된 예술적 관습에서의 일탈이요 언어 예술로서의 명백한 퇴행이다. 따라서 함축이나 생략 혹은 비유나 역설 같은 편재적인 시적 원리 때문에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어려움은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독자들에 의해 퐁요롭게 해석되고 향유되어야 하는 시적인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론적 불투명성을 띤 데다가 해석의 코도조차 찾아낼 수 없는 조악한 난해성으로 무장된 시편들은 적극 경계되어야 한다. 이때 소통의 불가능성은 시적 역량의 부실함 때문에 초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 예술로서의 엄정함이나 고전적 통찰을 담아내면서도 의미의 투명성과 풍부한 정서적, 인지적 울림을 동시에 주는 시, 소통 가능성과 미학적 완결성을 동시에 꾀하여 그만큼 복합적인 기억을 낳는 시, 시적 전통을 이으면서도 동시대의 담론적 감각을 결합하고 있는 시야말로, 우리 시대 ‘서정’의 원리가 가 닿아야할 시적 경지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시를 쉽게 쓰라는 말은 그야말로 ‘쉽게 쓰라(濫造)’는 뜻의 오도된 계고가 될 가능성이 높거니와, 정말 투명하고도 풍부한 울림을 주는 시편들은 한결같이 ‘어렵게(고통스럽게)’ 씌어진 것이고 또한 불가피하게 일정한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으며 능동적인 해석을 통해 ‘의미의 투명성’ 에 이르게 되는 작품인 것이다.

                       유성호, 의미의 투명성과 시의 존재론, 현대문학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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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이고 심미적인 것은 공허한 형식으로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작품 속에서 오히려 저항적 계기로 내재한다

                                 문광훈, 시의 희생자 김수영, p.52

필요한 것은 시적 인식 혹은 시적 에너지가 어떻게 심미적 초월이나 윤리의식과 어긋나면서도 동시에 일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이지, 처음부터 그 분리를 전제한 후의 논의 전개가 아니다. 이 분리를 전제할 경우 남는 것은 견해의 파편 뿐이다. 삶의 윤리성은 뛰어난 예술가의 예에서 보여지듯, 심미적 초월을 통해 인식론 그리고 미학과 서로 만난다. 김수영 역시 시적 작업을 통해 문하고가 생활, 아름다움과 인식, 인식과 행동을 통일시키고자 한 것은 아닌가? …… 나는 김수영 시의 근본적 윤리성이 지닌 유래와 지향은 시와 생활, 예술과 삶의 일치라고 생각한다. 시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이 움직임의 일체를 형식적으로(리듬적으로) 또 내용적으로(주제적으로) 구현한다.

                                문광훈, 같은 책, p.52.


그래서 물신주의의 근저에는 의식을 마비시키는 심리적 요인이 버티고 있다. 그것은 역하지각이라고 불린다. 인간이 정보를 수용할 때는 지각이라고 하는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보통은 우리들이 대상을 의식하고 수용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의식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지각이 역하지각이다. 역하지각이란 말하자면 의식이 문지방 아래로 숨어 들어오는 정보가 지각되는 것으로 우리들이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다라서 대상이 역하지각을 통해 수용자의 의식세계로 들어오게 된다면 수용자는 이를 의식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대상이 목적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김정기,[규제되야 할 광고 공해](신동아,1984년 4월호) 물신주의는 바로 이러한 역하지각의 가공할 위력을 단물로 받아 마시면서 의식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숨통을 죄고 있는 것이다.


                                   김동원 ‘물신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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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오규원의 시들이 사물보다 언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 나름의 문화적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사물로부터 언어를 떼어내려는 이러한 시도는 사물에 부착되어 낡아버린 관념을 부식시키려는 시도였다. ‘구체성’이라든가 ‘객관성’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시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 붙은 용어지만, 거기에 구체성을 주는 주체가 상투적이라면 지시체 또한 상투화될 수 밖에 없다 현상에 종속된 언어가 얼마나 무상한가를 그는 시 [현상실험]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 정부의 청사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 댁의
초인종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규원의 시들은 이상을 연상케 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오규원은 이상과 다르다. 상투성을 완전히 배제한 언어는 사회적 공간을 갖지 않으며 거기서 얻어지는 사물의 순수한 이미지란 시인이 독단으로 빚은 허상일 수 있다.  흔히‘의식과잉’으로 일컬어지는 그것은 시인의 사사로운 관념인 만큼 새롭고 때로 파격적이어서 신선한 충격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로 사사로운 것이 되지 않으려면 다시금 상투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하는 물음이야말로 현대시를 기로에 내던지는 폭언이다.

                                                     송상일, 오규원 깊이 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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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진은 명철한 통찰력을 지닌 지식인의 눈이 아닌, 평범한 생활감각을 지닌 일상인의 눈으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의 시가 현실을 산문적으로 기록하면서 긴장이 풀어지기도 하는 반면 ……현실과 일상의 삶을 그린 전남진의 시편들은 창조적인 상상력보다는 사실의 기록과 해석에 치중한다. 예를 들면 “공중에 정지하기 위해 양 날개를 젓고 있을 때, 2001년 4월 한국의 공식 실업자수는 260만명이었다. 매일 그 할머니 먹다 남은 밥알을 말려 새들에게 던지고 있을 때, 나는 그 곁을 지나 회사로 출근했다…새의 부리에 밥알이 꽃힐 대, 나는 그 곁을 지나 회사로 출근했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런 단순어법의 시에는 현실의 부정성을 강하게 환기하는 극적 효과나, 부정적인 현실 속의 자기자신을 반추함으로써 생기는 페이소스가 감소된다.…………………… 현실을 다룬 시들에서 그가 주체와 관찰자 사이를 머뭇거리며 오가고 있다면, 자신의 내면을 고백한 시들에서는 호소력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막 출발한 신인 전남진이 산문적인 현실과 서정적인 지향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갈지 지켜볼 일이다.

                   창비 02년 여름호 김수이의 평론 ’시간의 원근법과 잔여물’ 중에서




                                                          노트북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밑줄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