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예술
예술은 시이며 비평이고 그리고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번째는 자기의 내면적인 이미지를 현실 화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자기의 내면적인 생각과 내부 현실을 조합하는 길이다. 세번째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길이지만 거기에는 암시도 제약도 없기때문에 나는 그것을 예술로 간주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길이다. 거기에서는 내가 만드는 부분을 한정하고 만들지 않은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침투하고 거절하는 다이내믹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관계작용에 의해 시적이며 비평적이고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열리기를 바란다.
나는 이것을 여백의 예술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여러 화가의 화면 속에 보이는, 그저 빈 공간을 여백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북을 치면 주위 공간에 울려 퍼진다. 큰 북을 포함한 이 바이브레이션의 공간을 여백이라 부른다.
이 원리와 똑같이, 고도의 테크닉에 의한 부분적인 붓의 터치로 하얀 캔버스의 공간이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킬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리얼리티가 있는 회화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프레임이 없는 타블로는 벽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회화성의 여운이 주위 공간에 퍼져 간다.
이러한 경향은 조각에서는 한층 더 선명하다. 예를 들어 자연석이나 뉴트럴한 철판을 조합하여 공간에 강한 액센트를 주면, 작품 자체라기 보다는 주위의 공기까지 밀도를 느끼게 되고 그 장소가 열린 세계로서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러니까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 만든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 내부와 외부가 자극적인 관계로 서로 작용하고 울려 퍼질 때, 그 공간에서 시와 비평과 초월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사건의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한에 대해
나는 무한감이 떠도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공간이 뒤얽히며 여백의 힘이 넘쳐 흐르는 당, 송 시대의 산수화, 극히 조금 남겨진 화면의 파편과 그 주위를 메운 광활한 회반죽 사이의 투쟁을 보이고 있는 고대 로마의 벽화 등, 거기에는 작가를 훨씬 더 초과하는 커다란 그 무엇인가가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과 함께 한 산속의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불, 주위 공간과 상호 침식하는 손발이 파손되거나 없어진 베르베데르의 동체 조각 등, 나는 그들처럼 외계와 맺은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작품에서 끝없는 무한의 호흡을 느낀다.
어떤 평론가는 폰타나를 얘기하기 위해 모네를 꺼낸 적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무한을 시사하는 것이다. 모네나 폰타나의 작품은 강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측량하기 어려운 외계라는 것의 인지와 도입의 드라마에 차 있다. 모네는 채색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의 무한성에 대해, 각각 감동적인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둘 다 외계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를 멋지게 시각화시켜 준 것이다.
작품이란 얘기할 수 있지만 언어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이 외계와 관련을 맺는 것인 한 언어에서 어긋나고 소원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근대 언어론에 따르면, 언어란 즉 자아가 표출한 대명사이며 그 재현이다. 나는 가끔 자아 – 언어로부터 출발하지만 늘 그 전방의 미확정적이고 미지인 세계와 관계하고 싶다. 자아로 세계를 언어화하거나 세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고 지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작품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나만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은 나하고는 비동일한 것이다. 외계가 작품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예술관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한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이며 그 탐구이다. 무한이란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 이외의 것과 관련을 맺을 때 나타나는 것을 지칭한다.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정립하고 표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그 관계가 성립하는 장에서 세계를 지각하고 싶은 것이다.
1970년대 나는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의 회화 시리즈에서 무한을 반복개념으로 삼아 그 한없는 차이로서 나타내려고 했다. 거기에서는 타와의 관련보다 반복과 어긋남에 비중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서 어긋남이 커짐에 따라 화면에 여백이 생기게 되었다. 회화가 성립하는 영역으로서의 장에 주목하여 점과 선 등의 조응관계로 무한감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조각에서는 처음에는 유리랑 돌 등 이질적인 것을 부딪치게 함으로써 나의 의사와는 다른 힘의 작용을 교배시켜 타자와의 만남을 촉구했다. 거기에서는 행위성과 사건성이 두드러졌었다. 그리고 서서히 공업용 재료인 뉴트럴한 철판과 애매한 요소 투성이인 자연석을 대응시켜 완만하게 임상적으로 짝짓게 함으로써, 작품을 만남의 상태로 제시했다. 그렇게 하여 대응의 관계성이 두드러지고 외계와의 호응성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그림은 모티프에서, 또 때로는 반복의 방법에서, 예컨대 다니엘 뷰렌이나 니에레 트로니의 그것과 닮았다. 조각은 모티프와 소재에서 세라나 리차드 롱과 비슷하다. 그러나 나와 그들하고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그림의 도안이나 디테일 철판, 돌 등이 추상화되고 일반화 되어 작가의 로고스를 대변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즉 화면이나 소재는 결코 생소하거나 개별성을 인정할 수 있거나 타자적인 어긋남을 보이는 일이 없다. 작품은 화면과 소재가 그 밖의 것을 받아들이거나 공간과 밀접하게 관계하거나 외계의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립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자아가 지니는 <무한> 개념이 작품을 뒤덮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작품은 오로지 내면과 외계와의 관계를 위해 개별화되고 고유화되면 철저하면서 동시에 모자라고 애매하다. 이런 특징이 보는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어 신경을 거스르는 일도 있는 것 같다. 회화는 그래도 캔버스라는 규격의 장을 사용하는 탓인지 손을 대지 않은 부분이나 여백이 있어도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불명료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조각은 종종 자아중심주의를 곤혹하게 만드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사상계에 타자론이 확대되고는 있다 해도, 여전히 자아 밖의 존재에 대해, 특히 인간 이외의 외계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다. 어느 날 불란서의 젊은 비평가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 조각에서는 돌들이 당신이 하는 얘기를 듣지 않고 멋대로 얘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곤혹감을 줍니다] 내가 들여놓은 돌은 내 말을 표현하기 위한 대용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외계와 연결되어 있는 미확정적인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무규정하고 생소한 미지성과 관련을 맺을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다양한 인간관게에서 타자를 서로 인정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동식물이라든가 돌, 흑 등 자연물과의 관계에서 타자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 작품이 직접 인간의 자의식을 제시하기 보다는 무기적이고 불확정한 것과의 관계를 중개 삼고자 하는 것은 내가 자란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포함하는 커다란 외계와의 연관 속에서 나 자신을 보는 것이 나의 역사의식이며 세계관이다. 세계는 나를 넘어서서 존재하며 불투명하다. 내가 선택한 방향은 이 불투명한 타자를 눈앞에 대할 때 내가 끊임없이 혼탁해지고 여과되면서 타자로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작이란 하나의 초월이며 비약임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작품은 자기와 타자가 상호매개를 하는 비약의 장이어야만 한다. 작품이 외계와 내면의 자극적인 만남의 장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에 보이는 것처럼 자기의 재현화인 닫힌 완결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성에 의해 열린 장소를 어레인지먼트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거기에서는 표현이 자기의 표현화, 표상화로 특수화되기 보다는 타와의 관계에 의해 중성화되고 비대상적인 장소로 성립한다. 최근의 나의 그림은 최소한의 터치나 스트로크의 호응관계를 촉구하며 주위의 무규정한 영역에 작용하여 무한감을 이끌어 내려는 장이 되고 있다. 조각에서도 또한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데서 점차 사물과 주위 공간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가, 지금은 바야흐로 표현과 외계와의 연결에 관심이 옮겨졌다. 회화에서는 여백과 벽면이 상호매개되고, 조각에서는 전시장의 사물과 외계의 사물이 서로 대응하게 되었다.
작품이란 필경 현실 그 자체도 아니며, 관념의 덩어리도 아니다. 내 작품이 현실에 다가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관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양쪽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중간항적인 성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작품은 단순하며 동시에 복잡하다. 작품의 소재 선택이라든가 구성, 제작행위를 최소한의 것으로 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엄격하게 자기를 한정하고 있으며, 무규정한 소재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주위 공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는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즉 자신을 최소한으로 한정시킴으로서 최대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나의 미니멀리즘은, 작품이 생생하게 살기보다 공간이 생생하게 살아줬으면 하는 방법인 것이다. 작품은 기호화된 텍스트가 아니다. 에너지를 축적한 모순을 내포하며 가변성을 지닌 생명체이길 바란다. 한 번의 스트로크, 한 번의 철판의 상태는, 그것이 타와 대응함에 있어 힘에 넘치며 살아 있는 생물 그 자체이어야만 한다. 행위보다도 사용하는 소재의 힘이 중요하며 나아가 소재끼리 혹은 주위 공간끼리 조응하는 관계항으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구성하는 논리의 철저화와 함께 운동선수가 기술을 연마하듯이 엄격한 훈련이 수반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조응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이지만, 작품이 무한성을 띠게 되는 것은 여백으로서의 공간의 힘에 의한다. 이렇게 하여 작품은 현실과 관념을 호흡하면서 동시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내 작품은 타인에게나 나에게나 늘 미지성을 내포하는 반투명한 것이었으면 한다.
동일성과 차이성
표현은 정확할수록 진실에 다가가며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테크닉이라든가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와 훈련의 축적에 관계되는 문제이며 타와의 관련에 대한 엄격함에 의한다. 나는 머릿속에 완성되어 있는 이데의 재현을 지향한 적이 없다. 어떤 것을 만들까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제작현장에서는 여러 외부성이 작용해서 아무래도 어긋나게 되기 쉽다. 현장감각이란 관계성의 생물이라고나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가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성질을 지닌다고 지적하였다. 사고는 끊임없이 동일성의 확립과 재생산에의 욕구를 유도한다. 이를 확대하면 독아론이 되기도 하고 공동체론이 되기도 하며 좀 더 나아가면 제국주의론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순화나 지속에 대한 환상은 인간이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돌일성의 파라독스는 실은 타와의 긴장관계와 한없는 차이성에 의해 성립되고 유지된다는 이야기이다. 역으로 말해 타자성과 차이성이 없으면 동일성은 무화되어 버린다.
어렸을 때 나는 쌀을 씻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렇게 언제나 똑 같은 일만 되풀이 하면서 뭐가 신나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하는 일은 똑같지만 쌀을 씻는 느낌은 똑같지 않단다. 물이 찬 정도에 따라 마음이 긴장할 때도 있고,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 흥이 날 때도 있지. 쌀과 물의 호흡이 꼭 맞는 때도 있고, 할아버지의 화내신 얼굴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지. 어쨌든 간에 나는 이 쌀 씻는 일의 반복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거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이 때의 어머님 말씀을 얼마나 되풀이 되풀이 새겼는지 모른다. 동일성과 차이성을 둘러싼 원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일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워놓고 제작 방법과 모티프를 가능한 한 한정시킨다. 그리고 소재와 이데를 단순화시켜 그것을 신체 행위로 반복하는 동안에 비동일적인 것이 나타나게 된다. 내적인 것과 외부성과의 다양한 만남과 반복행위에 의해 제작이 진전되어 궁극적으로 나도 작품도 양의적인 것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타블로라든가 조각, 드로잉을 제작하기 전에 자기와 타인, 기계와 소재의 연관이라든가 그 반복과 어긋남으로 완성하는 판화를 먼저 제작하는 일이 많다. 똑 같은 일이면서도 좀 더 잘, 좀 더 좋은 것으로 원하는 한없는 고양심이 부추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부단히 동일성과 차이성의 양면적인 제작현장에 있으려고 한다. 현장이란 나와 타자와의 교섭의 장이며, 그것은 산다고 하는 모순율의 장소에 서 있는 일이기도 하다.
회화의 운명
나는 인간의 힘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듯한 불멸의 작품을 그리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화의 운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 그림은 아마도 만 년이 지나기도 전에 화면은 사라져 없어지고, 캔버스도 너덜너덜 헤져 버릴 것이다. 인간은 필사적으로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자연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대지로 되돌리려고 한다. 존재시키려는 힘과 없애려는 힘의 치열한 대결은 아름다운 투쟁이다. 그러니까 나는 완벽하고 견고하며 잘난 체 버티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임의 양면을 볼 수 있는, 위태위태한 밸런스를 지니는 그림, 바로 그런 것이 그리고 싶은 것이다.
잠깐 멈춰 서서
수선스럽고 바쁜 이며, 잠깐 멈춰 서서 파아란 하늘이라도 우러러 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한 번 심호흡이라도 하지 않을 텐가? 그것만으로 자네는 구원되고 세계는 부활한다.
바쇼의 시 중에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라는 것이 있다. 한 순간의 사소한 일에서 시인은 커다란 우주의 울림을 느끼고 있다.
내 일 또한 일상의 무감각한 세계에 자극적인 사건을 불러들이려는 데 있다. 그것이 시적인 섬광을 환기시키는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