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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호이징거, 중세의 가을 - 보다 아름다운 삶에의 열망

by 목관악기 2007. 11. 11.



       모든 시대에는 이상적 삶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세계에 대한 거
       부가 있다. 여기서는 완벽성이란 삶과 시간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이승의
       것들에 눈돌리는 일은 약속된 참 행복을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위대한문
       명들은 모두 이 길을 따랐다. 기독교 사상은 정신 속에 개인적이고   사회적
       인 완성의 기반처럼 이 거부의 이상을 강하게 낙인찍어 놓았었고, 따라서세
       계를 의식있게 개선시키고 완성시키는 두 번째 길을 따르는 일이  오래도록
       불가능 했다. 중세는 그 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였으며, 모든 제도는 신에 의해 세워
       졌으므로 선했다. 다만 인간들의 죄가 세계를 비참함에 빠뜨린 것이다.   그
       러니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고 개혁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개념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유일한미
       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진정한 목표는 저 세상이었다. 사람들은사
       회에 어떤 새로운 형식을 창안해낼 때조차 우선은 그것이 선한 옛 법칙을재
       정립하는 것이라 믿었고 아니면 단지 악습을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
       었다. 새로운 조직을 의식적으로 설립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심저이   성
       루이 왕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군주제가 시도하였고, 또 부르고뉴 공작들이
       자기네 정체에서 계속한 대 입법작용에서조차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이  작
       업을 통해 사회질서가 보다 유효한 형태로 발전, 완성되게 된다는 것을   거
       의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확고한 정치일정을 눈 앞에 갖고 있지 않았
       다. 명령을 발포하고 평의회를 세우고 한 것은 단지 자신들의 힘을 행사하
       고 공공의 안위를 위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한 데 따른 것일 뿐이었다.

       전반적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완성시키려는 확고한 결의가 없었다는 점만
       큼 그 당시의 일반적인 페시미즘의 팽배를 부채질한 것은 달리 없었다.  세
       상에 사는 동안 개선의 여지와 희망이 전혀 없다면 보다 나은 사회질서를
       열망하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거부하기에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는 - 사람은 자연히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세계를
       의식있게 개선하려는 열망과 함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와 희망으로 바
       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처음으로 이 개념을 가져 온
       것은 18세기였다. 르네상스는 또 다른 만족감 속에 그 나름의 삶에 대한 정
       력적인 수용을 길어냈었다. 18세기는 인간과 사회의 완성가능성을 중심 도
       그마로 끌어 올린 세기이다. 다음 세기에 오면 이러한 순진한 믿음은 잃게
       되지만 그래도 그 믿음이 나을 용기와 낙관주의는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보다 아름다운 세계로 이르는 제 3의 길이 있다. 이는 셋 중에서 가장 쉬우
       면서도 가장 허구적인 것으로, 꿈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나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
       서나 살자. 이상의 엑스타시 속에서 현실을 잊자. 취할 듯한 둔주곡이 흐르
       는 데는 단순한 하나의 조율만으로도 충분하다. 꿈 같은 과거의 행복, 과거
       의 영웅주의와 그 미덕에로 아니면 자연 속에 묻혀사는 기쁨에로 시선을고
       정시키는 것이다. 고대 이래 모든 문학적 연마는 바로 이 단일한 테마들,영
       웅적 테마와 현자적 테마와 목가적 테마 위에 기초하고 있다. 중세, 르네상
       스, 18세기, 19세기는 단지 나름대로 옛 곡조의 변주들을 찾아낸 것에 불과
       하다.

       그러나 보다 아름다운 삶에 이르는 이 세 번째 길이 단순히 문학에만 국한
       된 것일까.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형태와 토대에 동시에
       관련되며 문명이 원초적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옛 시대의 완벽함에 대한 꿈은 삶과 삶의 형태들을 고상하게 만드는가   하
       면 삶의 형태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또 그것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든다
       삶이 하나의 고상한 유희처럼 조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기법
       은 엘리트가 아니면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요구 조건을 갖게  마련
       이다. 영웅이나 현자를 모방하는 일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
       니다. 삶에 서사시적인 서사시적인 혹은 전원시적인 색채를 부여하는 일은
       값비싼 도락이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움에의 꿈은 일종의 원죄처럼 그   자
       체 내에 귀족적 배타주의를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야 중세말의운명
       을 고찰하기에 적합한 관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적 형태들,
       즉 기사도적 로망티즘에 의해 귀족 계급의 삶을   미화하기 이며 곧 원탁의
       장식하에 변장한 세계인 것이다.


                                                     호이징거, 중세의 가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