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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난쏘공]에 대한 간략한 독서

by 목관악기 2007. 11. 1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 대한 간략한 독서


                                                  한 용 국


1.    머리말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자리인 동시에 반성하는 자리라고 할 때, 문학이 접근하는 현실은 두 말할 나위없이 부정적 현실이다. 문학사회학적 관점에서 문학이 그 부정적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이란 그 부정적 현실을 추문화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추문화의 문학적 형상화는 각기 다른 형식을 갖는다. 서정의 형식을 가질 때 그것은 부정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정서적인 충격을 통한 반성을 유도한다. 그리고 서사 혹은 극의 형식을 가질 때, 그것은 그 세계를 객관화하여 그 부정성을 최대한 드러내어 사회 구성원 들에게 ‘이야기 할 만한 것’이 되게 함으로써 그 세계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변화 혹은 개선의 의지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어떤 형식을 취하든 반영과 반성의 자리에는 변화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를 동시에 성취하기는 어렵다. 서사시의 시대와는 달리 이제 그 형식들은 나름대로 견고하여 쉽게 넘나듦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세희의 연작형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서정과 서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70년대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을 형상화하고 있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비선형적 구성과 스타카토 문체라고 불린 바 있는 시적 문체는 서사 장르이면서도 서정적 충격을 유발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서적 충격을 통해 시대적 고통에 참여하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에서만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후기 산업사회인 지금에까지도 하나의 반성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조세희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분석하면서 이 소설이 어떻게 70년대 산업사회의 부정적 현실을 드러내고 화해를 모색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드러난 죽음과 세계에 대한 질문

이 연작형의 서사양식은 비선형적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의 성서적 질문에 이르러서야 이 소설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에서 보인, ‘과연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연장 선상에서 이 소설의 중심 인물인 ‘영수의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죽음에 이르러 이 소설의 뒤섞인 시간구성은 갑자기 서사적으로 재배열된다. 과연 누가 이 살인과 죽음에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 질문은 김윤식 교수가 지적한 대로 논리적인 측면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계에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은 이 소설의 첫머리 ‘뫼비우스의 띠’에서의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굴뚝에서 나온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워졌고 다른 아이는 그렇지 않다. 과연 누가 먼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당연히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교사의 대답은, 얼굴이 더럽지 않은 아이는 얼굴이 더러운 다른 아이를 보고 자신의 얼굴도 더러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 교사는 학생들에게 똑같이 묻는다. 이번에는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그러자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교사는 이번에도 틀렸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똑같이 굴뚝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한 아이만 얼굴이 더럽고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과 대답의 과정을 통해서 이 세계 속에 속해있는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책임은 그 누구에게나 있으며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복의 시구와 동일한 의미층위에서의 서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세계는 어떻게 병들어 있는가? 그것은 오세영 교수 에 따르면 첫째, 그것은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구축해 버린 세계이다. 이 소설의 핵심내용이 되고 있는 고지대 불량건축물 철거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주택 재개발 사업에 의해서 살고 있던 집이 철거당한 난쟁이 일가는 구청으로부터 공식가 15만원짜리의 아파트 입주권을 받는다. 그러나 아파트의 실제 분양가는 58만원, 임대료는 30만원이나 되어 이의 차액을 마련할 길이 없는 난쟁이 일가로서는 아파트 입주가 불가능해진다. 할 수 없이 그들은 2만원을 더 받고 입주권을 부통동산 투기업자에게 팔아 버리나 이득은 부동산 투기업자에게만 돌아간다.
난쟁이 일가로부터 17만원에 입주권을 사들인 그는 그것을 32만원씩 프레임을 붙여 다른 실수요자에게 되팔므로 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가난한 난쟁이 일가는 빈곤 때문에 집을 잃고 가장이 자살하는 비극에 빠지게 되지만 돈 많은 부동산 투기업자는 바로 그 돈으로 인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축출함으로써 자본의 힘이 삶을 통제하는 부조리한 현실이 되어버렸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이다.
둘째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정되고 도구로서의 인간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살고 있는 사회가 인간을 독자적 존재 혹은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고 항상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대우하는 사회라고 본다. 그것은 자본의 경제적 실현을 위한 수단이며 상품생산과 경제적 이윤추구로서의 수단이다. 따라서 거기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창조적 자기개발, 선악판단과 같은 가치개념이 수반될 수 없다. 이 소설의 여러 곳에서 묘사되어 있는 바 사용자들의 비인간적인 기업경영, 노동력 착취, 부도덕한 사생활과 한낱 기계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노동자의 비참하지만 그러나 건강한 삶의 대조가 이를 설명해 준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속도를 결정했다. 나는 트렁크 안에 상체를 밀어넣고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조립라인의 조립공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기계로 보았다. 공장에서는 공원전체가 기계였다.

여기서 기계란 경제적 생산수단으로서의 기계이며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주인공의 삶이란, 도구적 존재로서의 삶이다. 그러나 작가의 이 같은 사회인식은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외 [에필로그]에서 단적으로 고발되어 있다. 꼼꼼한 독자라면 연작형식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시작과 끝이 모두 고등학교 3학년의 수학시간에 일어난 이야기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수학선생은 자신이 맡은 고 3학년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수학성적이 예년에 비해 저조했다는 이유로 학교 경영자로부터 다음 학기엔 윤리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수학교사의 말에서 인격을 도야시켜야 할 학교마저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만들고 있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학기부터 윤리를 맡으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 제군도 잘 알다시피 윤리는 실제의 도덕규범이 되는 원리이다. 제군이 결정자라면 수학을 못 가르쳤다고 책임을 물은 사람에게 윤리는 떠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시간표에서 윤리과목을 빼버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제군과 제군의 후배들을 인간자본으로 개발하겠다는 음모이기도 하다. 제군과 나는 목적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 의도를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제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는 제군을 시험에 붙기 위해 뛰다가 노골적인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작가의 이와 같은 생각은 작중인물들의 입을 통해 여러 군데에서 진술된다. 가령 [넌 학교에서 죽은 교육을 받았어], [교실에서 아이들을 죽였다] 등이다.
셋째, 인간이 소외되고 물신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하나의 인격을 갖춘 인간이 상품을 생산하는 기계로 간주되고 학교가 인간을 유용한 수단으로 개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면 이미 그 자체가 물신적 가치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사회임이 명백하다. 은강그룹 총수의 아들이 난쟁이의 큰 아들 영수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공판정에서 이를 참관하고 있던 자기 공장의 여직공에게 느낀 다음과 같은 생각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예가 된다.

열아홉 아니면 스무 살 정도였는데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천날을 고도에서 함께 보낸다해도 자고 싶은 생각이 안 날 아이였다. 공장 노동이 생명 유지를 위한 그 계집아이의 생업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자의 근육활동 뿐이었다. 공장노동이 방청석을 메운 공원들에게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 된다면 아버지도 아버지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총수의 아들이 공원에게서 발견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성이 아니고 한낱 성적 유희의 대상 또는 돈벌이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이었다. 이와 같은 인간관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을 소외시킨다.
영수의 죽음 이전에 난장이의 죽음이 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 아버지는 몸보다 컸던 고통을 죽어서야 벗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잘 먹일 수 없었다. 학교에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 우리집에 새것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 본 적도 없었다. 영양부족으로 일어나는 이상증세를 우리는 경험했다. 단백질의 부족이 빈혈, 부종, 설사를 부르고는 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었다. 그래서 말년의 아버지는 자기 시대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시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가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의무만 강요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경제, 시화의 생존권을 찾아 상처를 아물리지 못하고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졌다.

결국은 공장 굴뚝에서 비행기를 날리다가 자살하는 난장이의 죽음은 달라나로 표상되는 초월의 이미지와 밀접히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나라를 향한 꿈은 이 소설에서 현실의 막다른 골목에서의 비약이자 초월의 의미를 가진다. 윤호의 세대론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난장이의 죽음은 한 세대의 끝이며, 영수의 조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난장이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의 노비문서와 같이 최하층의 노동을 세습해 올 수 밖에 없었던 세대이다. 교육과 자본의 혜택에서 격리된 삶을 영위하면서 육체노동에 의한 삶을 세습해온 세대는 이미 현실의 부조리와 산업화의 폭력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세대이다. 비록 저항한다 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분노의 극단적인 표출로서의 저항일 뿐이며 그것은 대부분 끔찍한 살인으로 드러난다. 그 저항은 난장이와 앉은뱅이와 함께 입주권을 사간 자를 살해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살인에서도 그는 지극히 윤리적인 덕목에 충실하다. 거기서 그는 단지 자신의 몫만을 정확히 빼낸다.  
달나라는 난장이가 현실의 고통을 비약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세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비약의 세계이자, 삶 이후의 세계이다. 그것은 당연히 자살로 마무리 지어질 수 밖에는 없다. 이는 난장이가 주장하던 사랑의 세계로 이르는 통로를 알지 못한 것에서 이루어진 행위로 읽히기도 하지만 여기에 드러나는 작가의식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소설의 극단적인 대립적 세계상 설정에 있어 하나의 원리적 사고로서 작용한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일은 망원 렌즈를 지키는 일야. 달에는 먼지가 없기 때문에 렌즈 소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렌즈를 지켜야 할 사람은 필요하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위의 인용문에서 ‘살기가 힘들다’와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사이에는 근원적 질문의 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세계관의 거리이다. 그 공간에는 형이상학적 달관의 거짓 위안의 삶과 극단적 현실주의가 공존한다. 난장이의 자살이 의미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달관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그것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세대의 끝이자, 비극적 세계라는 토양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난장이의 아들인 영수에게로 이어져 사랑의 새로운 통로를 모색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뫼비우스의 띠와 대립적인 세계상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이 소설이 제시하는 하나의 화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의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안과 밖이 대립되어 있는 평면을 휘어서 붙이기만 하면 이루어지고, 클라인씨의 병은 측면으로 구멍을 뚫어 입구로 빼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세계에 존재할 뿐, 이차원적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는 이 띠를 통해서 현실을 구속하는 원리는 과연 현실적 논리인가 아니면 추상적 원리인가라는 질문을 세계에 던지고 있다. 산업사회의 이원화된 계층적 대립의 세계는 어디서 이루어진 것인가? 그것 또한 하나의 추상적 원리에서 탄생한 것이 아닌가. 작가는 이 현실을 구성하는 논리가 아닌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새로운 추상적 원리를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서 안과 밖은 이원적으로 분명하게 대립되어 있다. 부자와 빈자의 대립이 그것이다. 난장이 일가의 삶은 70년대 산업화 사회 속에서 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받는 계층의 전형적인 삶이다. 증조부가 노비였던 난장이는 평생을 신체적 불구와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 받으면서 살아왔다. 지극히 역설적으로 설정된 ‘행복동’의 무허가 판자집에서 끝내는 쫓겨나게 되고 만다. 그리고 영수와 그 동생들의 삶은 은강 공장에서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비인간적인 노동의 결과로 최소생계비마저도 보장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삶은 다르다. 그들은 노동력을 착취하고 탄압한 대가로 경제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살며 의식주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살아간다.
이 부자와 빈자의 대립의 내면적 양상에는 부도덕성과 도덕성의 대립 이 놓인다. 가진자의 안락한 삶은 주어야 할 것을 다 주지 않은 데서 온 것이고 난장이의 아들 딸과 그 동료들의 계속되는 희생 위에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법조항을 무시하며 그 결과로 안락과 밝음을 누린다. 따라서 그들의 안락과 밝음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을 증거 한다. 가진자의 편에 가담하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칼날]에서 세무서 조사과 직원네 집인 뒷집의 흥청거림은 부정의 대가이며 제과 회사 선전부 직원네 집인 앞집의 떠들썩함도 뇌물 수수의 대가이다. 그들이 부정으로 얻는 수입은 결국 국민의 세금의 일부로 충당되거나 근로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일부로 충당되는 것이다.
그러한 타락은 그들의 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드러나 있다. [칼날]의 뒷집 딸은 애를 배고는 음독 자살을 꾀하고, [우주여행]에서 윤호의 누나는 놈팽이와 붙을 궁리만 한다. 인규네 패거리는 과외공부를 하면서 은밀히 포르노 슬라이드를 보고 환각제를 맡으며 남녀가 어울려 호텔에서 잔다. 이에 반해서 영수와 명희의 사랑은 지극히 수줍은 형태로 나타나며, 영수는 인쇄소에서 일하는 틈틈히 원고를 읽고 동생에게 읽히기도 한다. 요컨대 내면적 양상에서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부자와 빈자의 생활의 대립상을 작가는 지극히 단순화, 추상화 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세계가 이 뫼비우스의 띠 이전의 세계에서의 안과 밖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립적인 세계를 이어놓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의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가.
그 이분화 된 세계의 거리를 좁히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이 소설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사랑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저항을 통해 가진 자의 몫을 덜어내는 행위이다. 사랑주의는 난장이의 것이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문제는 지배계층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존재한다면 이 세계는 평화롭고 안락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난장이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 주의의 세계는 이상주의에 닿아있다. 난장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위의 세계, 그러나 꿈꾸어야 할 세계이며 결국은 자살을 통한 삶 이후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저항을 통해 가진자의 몫을 덜어내는 행위에는 위에서 보인 바처럼 사랑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주의가 아니다. 영수는 ‘아버지가 그런 세상도 이상사회는 아니었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법을 가져야 한다면 이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내가 그린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법률제정이라는 공식을 빼버렸다. 교육의 수단을 이용해 누구나 고귀한 사랑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난,쏘,공]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고에는 이미 이 제도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깔려있다. 그러므로 난장이의 사랑주의는 영수라는 인물에 의해 내면화 되면서 저항의 힘으로 작용한다. 즉 지배계층에게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 사랑의 결핍 상태가 충족될 수 있는 기대 혹은 희망을 갖지 않고, 그 결핍자체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미 영수에게 가진 자의 사랑의 실현에 대한 기대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지배계층의 자선행위는 허위로 제시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비약은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저항의 살인으로 귀결되고 만 것은, 결핍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는 대립만이 극단화 될 뿐, 결국 사랑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클라인 씨의 병의 또 다른 우화가 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클라인씨의 병이야, 안팎이 없는데 갇힌 공간이 있어.”

클라인씨의 병의 원리가 제시하는 것은 결국 부자와 빈자의 대립의 세계로 구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원래는 공동체적인 세계이며 공동체적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현재 영수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립된 세계 속에서 역설적으로 갇혀 있는 공간의 세계이다. 그 갇힌 공간의 세계는 영수가 말하는 것처럼,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듯이 우리도 집단으로서 보호를 받았다.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세계이다. 그 세계는 소년들이 중학교도 다니다 말고 공장과 상점에 취직하며 줄 끊어진 기타를 치고 고장난 라디오로 통신강의를 받아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과학자의 질문에 대한 영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도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아갈 수가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이죠.

이 세계란 본래 안과 밖이 없듯이 모든 인간도 안과 밖이 없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살아야 하는 공간이며 나아가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삶을 실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클라 인 씨의 병은 동시에 그러한 사회의 구현을 위해 실천적 방법까지도 암시해 준다. 그것은 스스로 구속의 벽을 깨뜨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중심인물 영수는 안과 밖이 없는 공간을 깨닫고 노동 운동가에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종국에는 분노에 의한 살인으로 귀결된다. 그 귀결은 바로 윤리적 질문의 자리이자 이 서사가 필연적으로 가 닿을 수 밖에 없는 자리일 것이다. 대립과 투쟁의 극단은 결국 패배이거나 전복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대립의 극단일 때 그것은 결국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이상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서사는 경계선의 자리에 서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 경계가 추문화의 자리이자 문학이 놓인 부정성의 자리일 것이다. 그리하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서사의 진행은 희망의 축이 아니라 절망의 축에 닿아 있다.

4.    화해의 모색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은 절망의 서사인가. 그러나 작가는 소설 속에 매개적 인물과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극단적 절망의 서사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첫번째는 반성적 의식을 가진 매개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결 태가 아닌 잠재태로서의 인물형에 속한다.
이 연작형에서는 난장이 일가와 영수의 삶이 중심에 놓여있지만 그 겉이야기들에는 [우주여행], [궤도회전],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등에서처럼 자본가 측에서의 반성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서사를 진행시켜나가고 있으며, [칼날], [육교 위에서] 등처럼 중산층 인물들을 등장시켜 자본가와 노동자의 극단적인 대립적인 세계를 절충할 수 있는 계층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각 계층이 서로의 삶에 대한 인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계층들 간의 타자의 발견은 다만 추상적인 희망과 기대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갈등과 저항, 즉 데몬스트레이션의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뿐이다. 여기서 의미있는 인물은 ‘지섭’이다. 우선 이 소설에서 난장이 일가의 이대에 걸쳐, 그들의 삶을 매개하고 간섭하는 인물로서 중요한 인물로 드러난다.

은강에 온 지섭은 여러가지 면에서 목사, 과학자와 비슷한 사람이었으나 한 가지 면에서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노동자였다. 그의 표현을 빌면 그 자신이 많은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행복동 집이 헐린 직후 피를 흘리며 공터를 가로질러 끌려나가던 그의 뒷모습을 우리 식구들은 보았었다. 쫓겨나듯 서울을 떠는 그는 여러 지방의 공장을 전전하며 떠돌이 임시공으로 일했다. 철공소 절단공, 자전거포 땜장이, 주물 공장 쇳물 주입반 보조공에서부터 새로 생긴 공업 도시의 대단위 공장 보통 노동자, 미숙련 노무자 단순 작업 노동자로서 그는 일했다. 그는 부두, 조선, 고무, 방직, 자동차, 전기, 시멘트, 제빙, 피복 등 여러 종류의 공장에서 조금씩이지만 일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내가 은강 공장에 나가며 겪은 일은 그가 여러 공장에서 겪은 일 중에서도 아주 작은 어느 한 부분에 지나기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한 지섭이 아버지에게 경제적 고문을 퍼부었던 시대에 노동운동가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난장이 일가도 그에게는 하나의 관찰대상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따뜻한 애정으로 아버지를 대했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달나라의 이름으로 펴보인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는 그의 머릿 속에만 있었다. 그것을 밖으로 실현하기 위해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은강에 왔다.

그는 난장이에게 달나라의 세계를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그가 들고 다니는 책인 [일만년후의 세계]라는 제목은 상징적이다. 난장이가 꿈꾸는 세계 그리고 지섭이 꿈꾸는 세계는 말 그대로 일만년 후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난장이의 ‘사랑’이라는 추상적 원리를 현실에서 꿈꾸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영수의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을 밖으로 실현하기 위해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의 전복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다만 가진 자들이 부당하게 취한 이득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책의 제목처럼 적어도 ‘일만년 후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라는 함의를 품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섭은 이 소설 속의 또 다른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지섭의 ‘교사’로서의 역할은 각 계층에게 하나의 타자성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고 반성적 인식과 저항으로 나아가는 매개적 인물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빈자의 대립계층에서 반성적 의식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윤호이다. 지섭에게 영향을 받은 윤호는 난장이 일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노동수첩을 읽으며 소외계층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기 계층의 부와 도덕적 타락상을 반성하고 미약하게나마 저항하는 인물이다.

너희 할아버지는 모든 법조항을 무시했어. 강제 근로, 정신 신체자유의 구속, 상여금과 급여, 해고, 퇴직금, 최저 임금, 근로 시간, 야간 및 휴일 근로, 유급휴가, 연소자 사용 등, 이들 조항을 어긴 부당 노동행위 외에도 노조 활동 억압, 직장 폐쇄 협박 등 위법 사례를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야. 난장이 아저씨의 딸이 읽던 책을 보았어. 너희 할아버지가 한 말이 거기 씌어 있었다구.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고 축적할 때라고 씌어 있었어.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는 돌아갔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나누어 주지? 너희 할아버지가 죽은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 딸과 그 어린 동료에게 주어야 할 것을 다 주지 않았어.[궤도회전]

그는 위의 셀파티의 의사고문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의 계층이 누리는 삶에 대한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같은 계층의 타자에게로 그 인식을 확장시켜 나간다. 그리하여 결국은  경애로 하여금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쓰도록 만든다.

화를 쉽게 냈던 무서운 욕심쟁이가 여기 잠들어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죽었다.평생을 통해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했던 어른이다. 자신은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라하고는 했으나 국민 생활의 내실화에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경애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과제를 떠올린다. ‘그 과제란 사랑. 존경. 자유. 윤리. 정의. 이상과 같은 목록들이다.’ 그 항목들은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그늘 속에 희생이라는 미명하에 은폐되었던 것들이며, 이 세계가 회복해야 할 근본 원리이다. 이 단편에서의 윤호의 인식은 단편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궤도 회전’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기대이자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의 사촌 또한 그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경훈에게 속삭인다. ‘인간을 위해 일한다면서 인간을 소외시켰어’
심지어 가장 지배계층의 속성에 충실하면서 ‘그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일만 하게 하는 약을 만드는 거예요. 그들이 공장에서 먹는 밥이나 음료수에 그 약을 넣어야죠. 약은 우수한 연구진을 구성해 만들게 해야 해요. 처음엔 경비가 많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이상 좋은 방법은 있을 수 없어요’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경훈조차도 당숙을 죽인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양심의 꿈을 꾸며 ‘그들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고 중얼거린다.
비록 연작들 중 다루어진 비중은 적지만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인물은 신애이다. 신애는 신흥 중산층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 부패, 서정 쇄신이라는 말이 신문에 거의 날마다 난 적이 있다. 그때만은 뒷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작았었다. 그 집 식구들은 냉장고, 세탁기, 피아노, 녹음기 들을 지하실 구석에 쓸어넣고, 새삼스럽게 묵은 옷을 꺼내 입고 다녔다. 신문에는 부정이 드러나는 공무원은 의법조치하겟다는 높은 사람들의 말이 자주 실렸다. 그러나 뒷집 남자는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던지 까딱없었다. ‘부정이 드러나면’이라는 말에는 참으로 묘한 풍자가 있었다.
어쨌든 뒷집은 까딱없었고, 텔레비전 연속극은 계속되고 남자와 큰 딸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는 이 시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큰 딸은 이 시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부정부패를 통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앞, 뒷집 가운데에서 살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지 않으며, 당시의 현실의 숨은 의도를 읽어낼 줄 아는 비판적인 의식을 갖춘 인물이다.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가난한 소외계층의 인물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인물로 제시된다. [칼날]에서 그녀는 안나오는 수돗물을 위해서 우물을 파지 않고 난장이의 권유에 따라 수도꼭지를 낮게 다는 일을 선택한다. 그러자 우물을 파는 사업체에서는 난장이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난장이에게 폭행을 가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난장이를 그의 폭력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생선칼을 휘두른다.

신애는 인공조명을 받고 있는 닭장 속의 닭들을 생각했다. 달걀 생산을 늘이기 위해 사육사들이 조명 장치를 해 놓은 사진을 어디에선가 보았었다. 닭장 속의 닭들이 겪는 끔찍한 시련을 난장이도, 저도, 함께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알을 낳는 닭과는 달리 난장이와 자기는, 생리적인 리듬을 흩트려 놓고 고통을 줄 때 거기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에서 병리 증상을 일으키게 될까 하는 실험용으로 사육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피범벅이 된 난장이와 칼을 든 두 손을 힘없이 내리고 서 있는 신애를 뒷집 여자가 담너머로 보고 있었다. 앞집 여자도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신애의 시선과 마주치자 두 여자는 목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신애가 말했다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자, 괜찮다고 말씀해 보세요.”
“네, 괜찮습니다”
난장이가 말했다.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어느 사이에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그는 터진 입술로 웃어보이려고 애썼다. 끈질긴 생명이었다. 약한 몸 어디에 그 끔찍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감추어져 있을까 놀랄 정도였다. 이때까지 그와 그의 식구들은 더러운 동네, 더러운 방, 형편없는 식사, 무서운 병, 육체적인 피로, 그리고 여러 모양의 탈을 쓰고 눌러 오는 갖가지 시련을 잘도 극복해왔다.

닭장 속의 닭들의 비유는 산업사회 속의 인간들의 위치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난장이의 생명력,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어 온 힘을 본다. 그 생명력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비로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며, 앞에서 제시했던 자본가의 시각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난장이에게 그녀는 말한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예요’.  이 대화가 드러내는 것은 난장이 일가로 상징되는 소외된 계층과의 연대의식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의 작가의 시선과 닮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난장이가 말한 바의 ‘사랑’이 결핍된 세계라는 것, 인간이 기능적으로 도구적으로 취급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애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중산층의 비판적 시각과 연대의식의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이 꿈꾸는 ‘달의 세계’는 자본가의 도덕적 각성과 함께 계층적 연대감, 그리고 상실된 사랑의 원리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윤호, 신애 등의 잠재태로서의 인물들이 완전한 현실태로 변화되었을 때 가능한 세계이다. 그것은 영희가 꿈꾸는 난장이들의 나라인 릴리푸트읍과 같은 세계로 드러난다. 그 세계는 절대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다.

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읍처럼 안전한 세계는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용품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난장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어떤 종류의 억압, 공포, 불공평, 폭력도 없다. 권력을 추종자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무서운 법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 릴리푸트읍에는 전제자가 없다. 큰 기업도 없고, 공장도 없고, 경영자도 없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난장이들은 세계를 자기들에게 맞도록 축소시켰다. 그들은 투표를 했다. 그들은 국적 따위는 무시했다. 모두 열심히 투표에 참가하여 마리안느 샤르를 읍장으로 뽑았다. 여자 읍장의 키는 일미터이다. 독자적인 마을을 열망한 작은 힘들이 난장이 마을을 세웠다. 나는 그곳 난장이들은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자녀의 출산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거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너무 불행했었다.

5.    맺음말 – 연작형과 시적인 문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결국 하나의 근원적 질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질문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추상적 원리인가 아니면 세계 그 자체의 운동인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명백하며 다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우리는 후자의 질문 추상적 원리가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이다. 그것은 물론 유물론적 세계관보다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이 소설에서 연작형식과 시적인 문체와 결합한다.
난장이 연작형의 작품 내적인 의미 는 작품에서 중시되고 있는 대립과 갈등, 화해와 사랑,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거리, 의지와 좌절, 어둠과 빛,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 등이 모두 자굼 구조의 특성과 직결괴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작품이 활용하고 잇는 연작성의 방법은 계기적인 결합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열두 편의 단편 소설들은 각각의 단편 소설들 사이에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내적인 결합이 가능한 서술상의 단계가 고려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물의 행위의 연결을 근거로 하는 플롯의 개념에 따라 단편소설들의 결합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작성의 방법은 이 작품이 거두어 들이고 있는 소설적 성과와 직결된다. 그것은 대조의 효과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는 기법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전체 이야기 가운데에서 그 중간 부분은 난장이 일가의 비참한 몰락을 중심으로 꾸며지고 있으며,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아가는 자본계층의 삶이 대조적으로 연결된다. 어두운 그늘이 있는 만큼 더욱 밝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는 판단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는 대조적인 두 세계의 모습에서, 난장이의 존재는 하나의 좌절된(소외된) 삶의 상징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같은 대조의 효과는 연작성의 방법에서 오는 주인공의 순환, 주제의 심화, 상황의 확대 등을 바탕으로 극대화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를 저널리즘이나 장편 소설이라는 쟝르적 형식 에 가두지 않고 더 큰 틀에서 바라볼 때,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 구조라는 점에서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소설형식이며 당위로서의 이상세계를 향한 하나의 디딤돌로서의 소설이 되게 한다. 이 소설은 그러므로 소설이 끝난 자리에서 독자 혹은 다른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김병익 교수 는 이 소설의 문체를 스타카토 식의 문체라고 부른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의 시적인 문체는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사회적 현실적 주제에도 불구하고 문학(예술)만이 가능한 정서적 울림을 강하게 일으키고 이 울림을 통해 사회적 실감과, 개인적 혹은 주체적 실감과를 일치시킨다. 이 소설에서는 대립된 두 계층의 대결이 절망적인 대결로 유도되면서 타락한 장르로서의 소설과 승화를 지향하는 서정시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두개의 대결은 표면적으로는 실패일 수 있지만 [난장이]의 두 대결은 심층적으로 보아 미묘한 상관관계를 지님으로서 실패의 가능성을 오히려 독특한 효과의 발휘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 상관관계란 두 집단의 대립과 그 표현방법의 대립을 대응시켜 단순한 세계관을 근본적인 단절로서의 방법론으로 수용시키고 대결의 처참한 상황을 초월에의 의지로 승화시킨다. 즉 방법적인 상관관계를 통해 집단적 실감과 주관적 정서간의 변증법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개인과 사회,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 혹은 형식과 내용을 대립시키면서 복합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가령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고 있었다.

와 같은 부분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 속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치 않은 가운데 우리는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그녀의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대립은 꽃과 꿈, 폐수와 현실이라는 중층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자명한 요소들의 복합적인 심층구조를 구성하면서, 사회적 실감과 주체적 정서를 동시에 얻어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소설의 연작형의 형태가 상상력과 사건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라면 시적인 문체는 주관적 실감과 함께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이상주의에 독자들로 하여금 내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당대 산업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극적으로 제시하면서 정서적 충격을 유도하여 반성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만든다.
그 반성은 당대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욕망의 지배가 전면에 드러난 세기인 지금도 유효하다. 이 소설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랑주의’이다. 그러나 그 형이상학적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는 당대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동시에 낭만주의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데서 온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적 세계관이 꿈꾸는 세계는 피안과 같은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이루어져야 하는 가능성이 세계인 동시에 초월의 세계이다. 그것은 문학이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 혹은 꿈꾸기의 장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결국 이 소설은 이 시대의 독자에게 또한 이 세계는 ‘살만한 세계’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반성의 자리에 서게 한다. 과연 지금 21세기는 살만한 세계인가. 어느 시인의 시구를 빌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것이 문학이 역사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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