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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농담

by 목관악기 2007. 11. 11.


       濃談? 弄談!


    어떤 사람들은 항상 ‘차이’로서만 존재한다. 아니 스스로를 그렇게 합리화 시킨다. 물론 그것이 ‘열등’이나 ‘주변’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만 ‘차이’로서 ‘존재’했다는 데 있지, 한 번도 그 ‘차이’성을 설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반대로 그들 또한 한 번도 설득 당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설득당한다는 것은 ‘차이’의 거리를 스스로 삭제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고 나면 이상한 굴욕과 수치와 허전이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비록 ‘설득’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인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차이’에 거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차이’로서 존재한다 할지라도, 타자에게 그 ‘거리’가 무단 점유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차이’의 합리화와 함께 주변화된다. ‘거리’의 인정이 ‘차이’를 긍정하게 만들고 그럴 때 ‘차이’는 진정한 ‘차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굴종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왜 문득, 전유성씨가 낸 책의 제목이 떠오르는 것일까? 조금만 비굴하면 인생이 즐겁다? 조금만 비굴하면….오호홋! ^^


                                                                                04. 06.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