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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톱밥같은 얼굴로

by 목관악기 2007. 11. 11.

    톱밥같은 쓸쓸한 얼굴로



  이번 학기의 강의가 끝났다. 현대예술의 특징에서 한국 문학사를 거쳐서 시와 소설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들, 시 읽기 및 발표, 인접 예술과의 관계탐색 이외 몇 가지 등등을 강의했다.  충분히 전달했는지, 효과적으로 수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짐작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학기는 대부분 삼학년이나 사학년의 ‘청년들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톱밥같이 쓸쓸한 얼굴’(기형도의 시 중 한구절이다)들이었다. 한 시절은 나도 그랬다. 어느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데드마스크 같은 얼굴로 잠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강의의 대부분이 문학에 관한 이야기여서, 어떻게든 삶을 이야기하게 된다. 문학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랑과 취업과 인생을 돌아와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속물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본과의 싸움이 우리의 삶이다. 등을 그야말로 ‘나불’거리는데, 사실은 부끄러울 적이 많다. 사실은 나도 누구 못지 않은 속물임이 분명하며, 자본과의 싸움에서 애저녁에 패배한 채,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 아닌가. 강의를 끝내고 늘 가서 잠시 앉아 있곤 하는 호숫가의 벤치에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햇살 때문만은 아니다.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은 결국 폭력이 된다. 유월의 호수는 햇살로 가득하다. 반짝이는 호수의 수면은 거대한 거울처럼 빛나고 있다. 저 눈부신 은결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나는 한 여름의 환한 벤치 위에서 한 없이 어두워진다. 그러나 강의는 끝났지만 반성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국 타협하게 될 것이고, 나는 아무 것도 밀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타협하지 말라, 고독과 의지만이 무력과 굴욕을 넘어서게 하고, 이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고개를 들어 보니, 호숫가의 나무들이 의지적으로 푸른 이파리들을 은결 쪽으로 흔들고 있다. 이제 일어서야 한다. 나도 ‘무언가를 각오한 듯 톱밥 같은 쓸쓸한 얼굴로’.



                                                                                            04.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