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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한용국, 고운기 시인 인터뷰 - 시인과 함께 설화 속에 들다

by 목관악기 2007. 11. 11.

고운기 시인 인터뷰 - 시인과 함께 설화 속에 들다



고운기 시인을 만나기로 한 곳은 신촌이었다. 아담하고 정갈해 보이는 독일식 맥주집에 소탈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83년 등단해 시력 20년이 넘은 시인,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삼국유사 연구의 권위자. 불교방송(BBS-FM)의 아침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그의 이력은 다양했지만, 맥주 잔을 들고 마주앉은 시인은 단정하고 소탈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남자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오며 대담자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고운기 시인의 시집을 읽고, 또 그의 이력을 조사하고, 그를 만나러 오는 동안, 나름대로 시인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정확하게 일치했다. 무엇보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사람 아닌가. 아직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편견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 중,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모두 따듯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맥주와 함께 한 두 마디 운을 떼며 시작한 인터뷰는 사소한 일상에서 시대적 영역까지, 그리고 개인적 상처에서 실존까지 넘나들었고, 그것은 마치 열차를 타고 유사 속을 여행하는 과거의 여행자가 된 느낌이 들게 했다. 가끔 옆자리에 월명사가 나타나 피리를 불어주기도 했었던가, 어느 창 밖에서는 두 개의 해가 뜨기도 했었던 것인가.

한용국 : 선생님께서는 시인으로서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는데요. 보통 시를 쓰는 학자라고 하면 현대문학을 연상하게 되는데, 고전문학을 연구하셨거든요. 그 동기라든가 또 시작에 미친 영향 같은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고운기 :시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잖아요. 특히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되면, 저같은 경우는 고전문학을 전공했거든요. 사실은 현대시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분야니까 많이 분산되더군요. 시에다가 전념을 못하는거죠, 잘 모르는 분들은 대학원 공부를 했다고 하면 현대문학전공인줄 알아요. 시 쓰는 걸로 먼저 알려졌으니까요. 사실 처음에는 오기도 있었죠. 시 쓰는 사람이 이론공부까지 하게 되면 안된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써야지. 근데 오기였던거 같아요. 이론 공부하면서 함몰될 수도 있겠지만, 그쪽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죠. 제가 학부 일학년 때 춘천에서 이승훈선생이 한양대로 오셨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이승훈선생님 시를 읽으면서, 수업시간에 자기 이론을 그대로 시로 가져다 놓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이제 이십년 지나고 이승훈 선생님의 궤적을 보면, 그 집중이 더 나았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지만요. 저 같은 경우에는 대학원 공부한다고 시에 전력투구 할 수는 없었고. 간간이 쓰면서 발표한 정도였으니까요. 얼마 전에 누가 생활에 근거한 시 어쩌고 하는 평을 썼는데, 사실은 그런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쓸게 없거든요,(웃음) 사실 실험적으로 새로운 것을 써보고, 발표하고 그런 적도 없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어요. 결국 삼국유사로 빠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 삼국유사는 설화적 신화적 상상력이니까 그것을 원용해서 현대화된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요. 하지만 제게 삼국유사는 시를 쓰기 위한 상상력 훈련이 될 수 없었지요.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대로 다른 메커니즘 속에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영향을 받기는 했겠지만, 삼국유사 연구에 있어서는 시가 주가 될 수가 없었지요. 그런 면에서 요즘 와서 후회스럽다는 느낌은 있어요. 나와 같이 등단했던 사람들이 기형도를 비롯해서, 안도현, 정일근, 이승하 등의 시인들은 어쨌든 시에다 전력투구를 했으니까요. 특히 안도현 같은 경우는. 이십년을 전력투구했는데 못쓰면 바보지(웃음, 하하), 재주도 있는데, 목숨을 걸고 썼으니까, 그런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요, 하지만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는 거지요.

그의 시집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되어 있다. 시인과 가족의 삶과 주변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날 것 그대로 듣고 있는 그런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전공인 고전문학 특히 삼국유사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고 했더니, 그는 별다른 이의 없이 그럴 것이라고 했다. 몸으로 익힌 것은 잘 잊어버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문학을 연구하다 보면, 그 연구는 머리를 타고 자연스럽게 몸으로 스며들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울렸다. 시인은 중학생 때 교회에 다녔는데 영향을 많이 받게 된 전도사님이 계신다고 했다. 그 분이 목사가 되셔서 미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급기야 병을 얻으셔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사모님이 서울에 와 계시는 데 목사님이 설교하신 원고를 모아서 삼월쯤 책으로 내기로 했는데 그것을 의논하는 전화였다. 자연스럽게 종교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시인은 공식적으로는 기독교지만 심정적으로는 불교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간단히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유대교 기독교하고 다신교 비교해 놓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요. 로마 사람들이 가졌던 다신교적 습성 속에서는 기독교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예요, 기독교 쪽에서는 기독교가 정복했다고 하지만, 로마 사람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했다고 말하거든요”라고 내비쳤다. 그리고 삼국유사 이야기와 잠시 절에 관한 이야기가 흘렀고, 그 부분에서 잠깐 우리는 같은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추억을 이야기했고, 신기해했다. 다시 이야기는 시인의 과거 활동으로 옮겨갔다.

한용국 : 이런 저런 자료나 시인들의 추억담 속에서 선생님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시힘’ 동인을 만드신 분으로 등장하고 있는 걸 봤거든요. 시힘 동인이 만들어지게 된 경과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고운기 : 시힘 동인은 제가 만들었다고 말 할 수는 없어요. 다만 제안을 했을 뿐이지요. 학부 사학년에 등단을 하고 대학원을 연세대학교로 옮긴 뒤, 뭔가 동인을 한 번 시작하자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 때는 동인중심의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으니까요. 오월시는 약간 주춤했지만, 오월시적인 것과 시운동적인 것의 중간쯤 되는 것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 먼저 만났던 시인은 고형렬 시인이예요. 고형렬 시인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등단 년도로는 81년으로 두 해가 빨랐죠. 사실은 고형렬 시인도 김정환 시인하고 하종오시인과 김혜순 시인 등 그 또래들과 동인을 만들어 보려고 했었다고 해요. 마침, 내가 제안을 했던게 우선 맞아 떨어진거지요. 그때 안도현 시인이 등단을 했어요. 시를 보니까 딱 내가 생각했던 시였지요. 그래서 안면도 없었는데 무작정 전화를 넣었고, 전주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의기가 투합된거지요. 그때 세운 원칙이 있었어요. 지역이나 학연에서 벗어나자는 거였지요. 뭔가 새로운 걸 하기 위해,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팔도에서 시 잘 쓰는 사람을 뽑아보자. 그래서 대전에 양애경, 김백겸 시인, 전주에서 안도현(한 사람 더 있는데 지금 시를 아예 안써요), 서울에서 나하고 고형렬, 그렇게 전주에서 만났지요. 그랬더니 각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얘기가 되어서 안도현씨가 강태형시인을 이야기하고, 서울에서 오태환, 김경미 시인도 들어오고 그렇게 한 여덟 아홉명 정도가 순식간에 모이게 된거죠. 저는 그러니까 말만 꺼냈을 뿐, 서로가 알아서 네트웍이 형성된 거예요. 그 후 시힘은 정일근, 최영철, 박철, 이윤학 나희덕 박형준 등의 순서로 사람들이 해를 두고 들어오게 되면서 이어지게 되었지요. 시운동은 해체했지만, 시힘은 동인 활동한다는 것이 무슨 큰 영화를 볼 것도 아니고, 없어진다면 그나마 서로 연결되어오던 것이 사라지니까 그것까지 없앨 필요는 없지 않느냐해서 존속하게 된 거예요. 시힘이 문단권력이다 어쩐다 하는 소리는 말도 안되지요. 동인들끼리 만나면 어떤 형제적인 것은 있어도 그 이상은 아니에요. 3, 4년 전에 나희덕 시인이 동인지를 냈을 때, 동인지 뒤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요. 우리는 말하자면 오래된 내복같은 관계다라는 게 그것이죠. 내복을 입고 자도 낯설지 않은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거죠. 이제는 나이든 사람은 물러나고 젊은 동인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 결과가 두 번의 무크지이고, 이제 곧 나오게 될 21세기 전망 동인과의 합동 시집이예요.

한용국 : 아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시집에서 잘 알려진 ‘수화를 하지 않는 수화시간’을 읽다보면 ‘밥이나 사랑이나 시를, 밥이나 사랑이나 시로 내 맘에 들이질 못한다’는 시구를 읽었어요. 저는 그 시와 시집을 읽으면서, 시의 화자에게서 느껴지는 ‘정처 없는 사람’의 비애같은 게 많이 드러나 있거든요. 이제 그 시집 이후로 3년이 흘렀는데, 어떠신가요 여전히 정처없는 삶의 길 위에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이 질문은 그러니까 근황에 관련된 질문과 겹치겠네요.  

고운기 : 이 시집에 들어간 시들이 대부분 일본가 있던 시절에 쓴 시가 많으니까 그렇기도 할거예요. 대학원 공부 시작하면서 대부분 소망이 똑같겠지만, 대학에 자리잡고, 그걸로 생계도 유지하고, 연구도 하고 시도 쓰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사실 내 인생의 목표는 ‘좀 안정되게 살아보자’였어요. 대학원을 마치고, 명지대학교에서 서른 다섯에 임용이 되었었어요. 아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좀 안정되었다. 라고 생각을 했죠. 열심히 시 쓰고 가르치고 그러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삼년 만에 뜻밖의 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것으로 인해서 받았던 상처가 크지요.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니까 이게 내 운명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상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생각해 보니까, 딱 삼년이상을 어디서 일해 본적이 없더군요. 그 기준이 군대삼년이예요(웃음) 명지대 이후, 일본에서 삼년동안 있게 되었었고, 또 돌아 온 뒤에 동국대학교 연구원으로 삼년, 또 지금 연세대학에 와 있는데, 아마 여기도 또 삼년 쯤 있지 않을까요?(웃음) 제일 싫은 게 그런건데, 그게 그렇게 돌아갈 팔자라면할 수 없는 일이죠. 지금도 저는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제발 좀 어디 집 한 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한용국 : 그리고 또, 선생님의 시는 일상이 시적으로 잘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자칫하면 이런 시는 비시의 영역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기도 합니다. 물론 선생님의 시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요(웃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선생님의 시에 대한 생각이랄지, 시론이랄지 하는 것이 있다면..


고운기 : 전 사진을 참 좋아해요. 그렇다고 사진을 잘 찍거나 하는 것은 아니예요. 제가 사진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김수남이라는 사진작가 때문이예요. 한국의 굿이라는 사진을 찍은 분인데, 그 분을 구십년대 초반부터 알게 되어서 그 분의 사진 작업을 따라다니며 많이 보게 되었지요. 그분이 굿판에서 무당들의 춤사위를 찍은 걸 보면 정말 다른 사람이 찍은 것과는 달라요. 어떤 디자이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다른 사람이 찍은 굿사진과 이 사람이 찍은 굿사진은 정말 다르다. 김수남씨는 춤사위가 어떻게 돌아오는 지, 어떻게 돌아갈 지를 알고 찍는다. 가장 절정의 부분을 알고 찍는다.” 물론 그것은 김수남씨의 오랜 시간의 연구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이가 찍었던 유명한 무용가들의 춤도 있는데, 그 사람의 책 속에는 몇 시간의 춤판 중의 몇 장면만이 그 사람의 책 속에 실려있거든요. 하지만 그 몇 장면만 봐도, 아 이 굿이, 이 춤이 이렇게 흘러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게 되요. 아마 시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 장의 스틸 사진 같은 것이지요. 어느 한 장면을 잘라서 찍으면 그 앞뒤가 보이는 그런 스틸사진 말이예요. 우리 삶은 일상들로 이루어지고, 그 일상에는 의미 있는 단면들이 있는데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요. 소설과 시는 이 지점에서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소설은 흐름을 끌어가 주는 장르지만, 시는 그 흐름을 잘라서 그 단면을 보여주는 장르랄까요. 그러니까 잘 못 쓴 시들은 소설처럼 쓰는 시들이고, 잘못 쓰는 소설은 시처럼 쓰는 소설들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나무의 성장을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시라는 것은 어느 한 단면을 잘랐을 때, 그 사람의, 흑은 삶의 전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일상을 잘라내서 내놓았을 때, 아, 이 사람이 이 시를 쓸 때의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앞뒤의 상황과 정서를 전달 할 수 있으면 그게 전부인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늘 시를 쓰고 나면 생각하죠, 과연 내가 잘 잘라냈을까. 그런데 일상에 집중하는 시를 쓰는 데는 부담이 있어요. 일상에 자기 주변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거든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중에 그게 상처가 되는 사람도 있어요. 또 자기 얘기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구요. 굳이 그걸 꼭 써야 되나?하고 말이지요.

시인의 시론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예전에 시를 가르치는 어느 시인의 인터뷰에서 보았던 것을 상기해냈다. 아마 어느 잡지에서 김혜순 시인을 인터뷰한 것이었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과 가까운 일상, 주변과 소통하는 법을 잘 몰라요.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시의 시원은 과연 어디일까? 그리고 다시 시인의 시로 화제가 돌아갔다. 나는 시인의 시 중, ‘오줌’이 좋다고 했다. 내친 김에 오줌이야기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어려서 우리 옆집 할아버지는/내 오줌을 받아먹었다, 무슨 병이었는지/어린 아이의 오줌이 약효가 있다 했다/동네 아이들 중에서 내가 선택된 이유를 몰랐지만/지금이라도 드러낼 만한 자랑은 아니지만/세상에, 내 오줌으로 사람을 살린다니//술을 많이 먹고 난 아침/당뇨낀 내 오줌은 아무에게도 쓸모없겠다/어느덧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소박하고도 깊은 이타주의적 반성인가. 문득 술과 시에 생각이 미치고, 이제 고인이 되신 분들에 대한 추모가 가슴 속에서 잠깐 일었다. 그리고 시인의 시에 죽음을 말하는 시가 유독 많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한용국 : 그런데 선생님 시를 보면 문상가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죽음에 대한 시가 많이 나와요. 아직 선생님의 연세도 그렇고 아직은 한창 활동하실 나이이고, 죽음 쪽 보다는 삶에 집중할 때인데, 어떤 동기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고운기 : 제가 시를 써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은 이승훈 선생이 교지에서 준 상을 받은 일이었어요. 그 때 그 시가 죽은 우리 매형을 대상으로 쓴 시거든요. 제 개인사적으로 놓고 보면 안타까운 죽음이었어요. 죽음 자체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책임이 너무 커졌어요. 조카아이들 건사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고, 그리고 누님조차도 일찍 돌아가셨지요. 그게 첫 시다 보니까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이 늘 뇌리에 남아 있게 되드라구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제 시들에서 드러나는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어서, 아직은 피상적일 뿐이겠지요. ‘영안실 쪽 육교’라는 시도 그랬을 거예요, 아마. 그런데 이번 특집에 실리는 여섯편의 시 중 뒤의 네 편의 부제를 ‘애사(哀詞)’로 달아서 썼는데, 그 시들은 사실은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예요. 같이 일하던 동료였는데, 서로 여러 가지가 맞아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지요. 그런데 암이라는 게 발견되고 팔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건 제가 잘 못해줬어요. 전 좀 더 오래 살 줄 알았어요. 암환자들이 그렇잖아요. 보통 적어도 일이년, 길면 삼,사년쯤의 투병기간이 있으니까요. 투병결과는 생각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그 와중에 때때로 만나서 밥이라도 먹고, 여행도 갈 수 있을것이라고 낙관적으로만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 작년 여름에 그 친구와 어딘가를 갈 기회가 있었어요. 여러 사람이 함께 갔던 자리였는데, 예정에 없이 일정이 길어진 거예요. 저는 돌아와야 할 일이 있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와야 했는데, 그 친구가 매우 섭섭해 하는 것 같았어요. 전 그저 또 다음에 보면 되지 했던거죠. 그랬는데 그 이후 석 달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 사이에 한 번도 만나질 못했는데 말이예요. 죽음조차도 친구의 가족을 통해서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장례식장에 갔다가 오면서. 그 석달 전의 일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내 마음은 그랬던 건 아니지만,  또 만날거니까라고 생각해서 온 거지만, 그까짓 일이 뭐라고, 겨우 두세 시간을 같이 더 못 보내고 매정하게 돌아왔던 게 너무도 미안했어요. 나중에 그 가족에게 들은 얘긴데, 마지막 한 달간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무도 못 오게 했다는 거예요. 너무 몰골이어서 보여주기 싫다고, 원래 깔끔한 성격의 친구이긴 했지만, 내 가슴 한 편에서는 그 때 내가 그랬던게 정말 섭섭했었던가 보다. 정말 보고 싶으면 오라고 했을텐데...연락하지 말라고 한 것이 저 사람은 인정머리 없는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저는 내세를 믿지는 않아요. 하지만 내세라는 게 있어 정말 만나게 된다면 그 친구가 되게 섭섭해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만 나한테 섭섭해 할 거 같지는 않더군요.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지금 주변에 사람들한테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하지요.

한용국 : 그런데 선생님의 시에는 그런 성찰과 아울러서 슬픔을 지탱해 주는 위트라고 할 만한 것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은근히 미소를 짓게 만들어요. 그 위트는 시 속에서 시를 꽉 붙잡아 주기도 하고, 시집 전체에 드러나는 비애같은 것을 잘 견디게 해 준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는 누님께 시집을 빌려드렸더니, 도통 시를 안 읽으시는 분인데 하루 만에 다 읽으셨더군요. 누님의 말씀이 정말 진솔한 시집을 읽었다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전 언제나 시집을 오독하지만요...(웃음)  
고운기 : 일연은 삼국유사를 썻는데, 일연이 살았던 시대 13세기는, 아마 지금 이십세기 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 오히려 우리 역사에서 13세기만큼 어려웠던 시대가 없어요. 무인정권, 몽고전쟁 몽고의 간섭기가 죽 이어졌지요. 일연이 1206년 생이예요. 그러니까 내년이 탄생 팔백주년인데요. 일연의 삶은 태어나던 해부터 시작해서 백년간이 온전히 그런 어려운 시대 속에 있었지요. 그 백년 동안에, 아마 2000년 동안 가장 고통스러운 백년은 13세기 백년과 20세기의 백년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연이라는 사람은 평생을 평화 속에서 살지 못한 사람이지요. 그런 시대를 살아왔으니 승려가 아닌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비극적 세계관이 훨씬 강했을거예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저는 늘 삼국유사를 얘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곤 해요. 황룡사에 사는 정수라는 스님이 한 겨울 천암사라는 절 앞에서 한 거지 여자가 애를 낳고 얼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안아서 체온으로 녹이고, 살아나니까 입고 있던 옷 다 벗어주고, 맨몸으로 황룡사까지 뛰어 가서, 옷이 없으니 거적데기를 덮고 밤을 새웠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이 점잖은 스님이 옷 다 벗어주고 스트리킹으로 뛰었다는 거거든요. 황룡사는 경주 한 복판이고, 게다가 인구가 십만이던 번화한 도시예요. 일연은 그걸 그냥 맨 몸으로 뛰었다, 그리고 거적데기를 뒤집어 쓰고 밤을 새웠다고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그걸 쓰면서 ‘아 이 친구 발가벗고 뛰었군’ 생각하며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을 거 같아요. 물론 나중에 일연은 국사도 되고 하니까 나름대로 권력을 누렸다고도 하겠지만 그런 시절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 괴로운 거예요. 단 한 편도 마음 편하게 살아 봤을 리 없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라고 하는 거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그리고 조신의 꿈을 쓰는 대목을 보면, 조신이 꿈 속에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요. 그래서 나중에 여자가 헤어지자고 먼저 얘기를 꺼내지요. 그때 이 대목이 재밌어요. 그 때 ‘조신이 너무 기뻐하며’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 정신들을 삼국유사에서 배웠던 거 같아요. 그게 자연스럽게 시에 녹아든 게 아닌가 생각하죠. 한 마디 더 하자면, 선배문인들 중에서도 마음에 존경스러웠던 분들은 그런 분들이었어요. 젊었을 때, 자유실천문인협회가 부활되었어요. 험한 시절이었잖아요. 누가 잡혀갔다고 농성하러 가고 등등.. 시절도 시절이었고 모두들 암울했어요. 그런 농성장에서도 그 분위기를 바꿔 준 분들이 있었어요. 김정환 시인이나 채광석 평론가 등등, 그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함께 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힘을 주었던 분들이죠. 그런데 나는 그게 되게 존경스러웠어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 어렵던 시절을 버티게 했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나중에 화가 나는 건 그런 분들은 다 뒤에 가 있고, 나서서 하는 사람들은 그때도 폼만 잡던 사람들이라는 거지만요. 생각해 보 면,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 아닌가 싶어요. 모두들 어려울 때, 힘내게 해주는 광대같은 사람들 말이지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모두 남기지 못해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하나 더, 환경문제에 관해 물었더니 고운기 시인은 일화 하나를 더 들며 소박하게 이야기 하셨다. “불교에서 보면 미륵이 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거 가운데서도 제일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이 똥을 누려고 하면 땅이 짝 갈라져, 누고 나면 딱 닫히고, 하하하. 나는 그것이야 말로 자연이고 환경이고 생태가 아닌가 해요. 정말 더 이상 뭐가 있겠어요. 다른 것 없이 자기가 먹고 사는 것 하나만 잘 정리하면 돼, 남한테 얘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사실은 그렇다. 생태시나 환경시가 굳이 시적 전략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경계하는 말이 여기에 다 들어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이야기는 그야말로 샘솟고 있었다. 설화전공이신 탓일 법도 했다. 시인은 그리고 연세대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시인이며 소설가들과 법성포 소주를 마시면서 함께 했던 일 년이 가장 즐거웠다고 문청시절을 회고했으며, 치기어린 신인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문단 어른들께 혼나기도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은 설화의 숲처럼 유쾌하고 편안했다. 그 사이에 끝없이 술은 비워지고, 뭐랄까 이어도에 다녀온 것처럼 한꺼번에 한 천년은 그러나 평화롭게 늙어 버리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아!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미소 짓고 계시는 당신들은 누구신가? 허허, 3005년을 살고 있는 당신들의 세계는 어떠신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은 더 살 만은 하신가, 아니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