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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김춘식, 불온한 비평 중에서

by 목관악기 2007. 11. 11.

… 근대의 가속도, 진보의 패러다임 아래서 모든 신선한 존재는 ‘한줌의 위안’으로 타락하며 그러한 타락은 ‘모독’과 ‘오염’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 일으킨다. 정전(canon)이 모독되듯이 모든 책은 ‘오염’의 덩어리, 키치일 뿐이다. 폭풍 아래 흩어지는 잡동사니와 자신의 동일성을 지켜보고 있는 세대에게 근본적으로 주체의 정체성은 순결하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을 모방하며 그리고 오염되어 있다. 이런 오염된 주체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역설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김영승의 [반성]등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의식이 이러한 모독장한 존재의 자의식이다. 그리고 모독과 상처에 대한 인식은 이윤학의 내면 속의 폐허, 상처의 탐구나 함민복, 함성호, 차창룡등의 자기조소, 이수명, 이철성, 서정학, 함기석 등의 분열증적인 언어의 형태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죽음의 도시에서 모든 존재는 부유하는 여행자이며, 갈갈리 찢어져서 흩날리는 잡동사니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희망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    김춘식, 불온한 시간, 문지, 기형도론 조각난 시간 중에서, 66



90년대 시는 대중문화, 언어, 정치현실, 일상성, 성적 정체성의 혼란 등 모든 외적 상황의 속박, 타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왜소한 주체들의 자기 폭로와 방황을 담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고백이나 폭로는 자기 진정성의 지향이 치열하면 할수록 전략적인 것이 되고, 또 그만큼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비교의 척도를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말이 있을까. ‘자율적 주체’나 ‘개성’ 따위의 허구성을 자각하고 있는 창작 주체들에게 내적 원리로서의 자기 증식성과 자기 규정성을 미학적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당치 않은 모순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이 90년대의 시적 현실 속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시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90년대에 시를 더욱 ‘전략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체의 견고함에 대한 신념이 무너진 상태에서 90년대 시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개인성’을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상황 앞에서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전략으로서의 ‘시쓰기’, ‘전략적으로 살아남기’라는 미학적 돌파이다.
다시 말해서 90년대 시의 전략은 ‘깊이 없는’ 혹은 ‘의미 없는’ 상실의 시댈르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다양한 방법적 변주이다. 이 점에서 90년대 문학의 특징은 문명적 폐허 속에서 의미의 흔적에 대한 탐구와 향수에 몰두하는 것이 그 반을, 그리고 심층없는 표피의 현실을 조소하고 공격하거나 폭로하는 언어유희, 요설과 장광설 등이 나머지 반을 차지한다. 전자의 경우는 내면화의 진정성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나타내는 반면에 후자는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과 치유의 불가능성을 폭로함오로써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자기 파괴의 기원을 지시한다.
의미의 부재는 언제나 존재론적인 죽음과 통한다. 이 점에서 심층(의미)를 포기하는 시인들의 시는 자유보다는 ‘죽음’을 지향하는 시적 충동의 산물이다. 그들은 존재의 의미라는 ‘초월적 기의’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표현한다. 모든 심층적 의미는 누군가의 지배적 담론이나 권력욕을 반영하게 마련이라는 욕망과 권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유희’만을 유일하게 건강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타자에 대한 지배욕망을 담고 있지 않은 유일한 언어행위는 ‘언어유희’ 곧 ‘기표의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심층 없는 형식’은 이들에게는 심층 없는 언어유희의 배경에 불과하다. ‘유희의 시인들’에게 시적 새로움이나 위반은 그 자체가 권력적 담론이다. 그러므로 유희 속에 새로움이란 없다. 단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변화와 반복만이 남겨진다.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변화와 환유적인 반복의 법칙은 창작적 주체의 경쟁이나 위선, 우월감, 타자에 대한 지배욕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혹은 전략에도 피할 수 없는 독선의 흔적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의미부여’의 욕망에 대한 경계가 ‘의미부정’으로 확장되는 순간 모든 소통이 차단되고, 시는 죽음과 자기파괴의 충동을 역설하는 또 다른 심층적 언술을 타인에게 강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의미의 부정은 예기치 않았던 또 다른 파괴적인 의미를 파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표의 유희’ 혹은 ‘물질적인 신체’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언어와 존재의 심층성을 부정하는 순간 남는 것은 되풀이와 반복 뿐인 일상과 인간에 대한 무의미한 언술이다. 의미의 미끄러짐이라는 기표의 유희란 긴장없는 반복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미의 소멸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기표를, 실체를, 육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시적 위반, 한 줌의 불온성 35

…… 그렇다면 우리는 90년대 시의 불온성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도데체 무엇에 대한 위반을 통해 시인들은 ‘전략적 글쓰기’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한줌의 도덕’ 혹은 ‘한 줌의 환상’, ‘위로’에 대한 그들의 환멸로부터 얻어진다. 가치의 부재란 달리 말하면 허위와 위선 독선의 일반화, 대중화를 의미한다. 90년대 시의 양가성은 허위와 독선을 전략적으로 차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들의 ‘환멸’은 ‘오염된 혹은 중독된’ 스스로의 자에 대한 ‘자기 환멸’을 동반한다. (135)




                               김춘식, 불온한 시간 중 90년대 시에 관한 비평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