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일종의 가난의 윤리가 있다. 힘의 포기는 동시에 집착의 포기, 구걸의 포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십 대가 된 황인숙의 ‘헐벗은 나무’는 지상에 매인 자에게 적용된 옛날의 탄성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의 탄성이 현실로부터 튕겨나가 솟구치는 반동의 동력이라면, 나무는 지상적 속성의 일부를 탄성으로 변환시켜 내 보내는 데서 헐벗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때 헐벗음, 즉 가난함은 성스러움과 동렬에 선다. 현실의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는 고결함
문학공간 좌담, 황인숙 시집에 대한 정과리의 평 중에서
문학과 사회 04년 봄호
강계숙 :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자면 ‘호모 비데오쿠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호모 비데오쿠스가 시를 쓰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즉 목표도 없고 경험도 없고 그저 심심하고 지루해서 끊임없이 티브이 채널을 재핑하는 존재들이 세상에 미만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런 존재들의 등장은 아주 다른 지각 방식을 출현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전 시대의 시인들 가령 황지우의 시를 보자면 무의미한 파편들이 모여서 어떤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김행숙의 시에서는 파편들이 은유적이거나 환유적인 연결도 없이 그냥 죽 나열되고, 나열되면서 삭제되고 삭제된 채로 지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도 체계도 없이, 오직 유희만이 있는데 그 유희는 아주 지루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동반한 유희이다. 마지막 시 [폭풍속으로]에 “으으으 달릴 뿐이다”라는 진술이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인용하고 있는 쥘 쉬페르비엘의 시에, “과도한 질주와 과도한 자유, 또 그럼에도 그 변함없는 지평선 때문에, 우리들이 절망적으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초원은 내게는, 다른 감옥들보타 크기는 해도 감옥의 모습을 띠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이 김행숙의 시적 주제를 대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는 유희, 그러나 무의미가 가중되는 유희라고 할 수 있다. 해설에서 이장욱이 ‘다른 서정’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까지의 한국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계가 아닌가 한다. 신세대의 글쓰기를 가장 앞서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시집이다.
정과리 : 재미있는 관찰이다. 이전 시인들과 비교를 하자면, 황지우보다는 오히려 김혜순과의 비교가 더 유익할 것 같다. 말을 듣고 보니, 복제의 인간학은 김혜순에게서 먼저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혜순에게서는 시원적인 ‘하나’가 이 복제물들 사이를 어둔, 음험한, 요사한 배경처럼 흐르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복제물들 사이에 일종의 상호반향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김행숙에게는 그 ‘하나’가 없다는 거지? 나는 얼마전에 그럼에도 김행숙 시의 ‘인물’들이 ‘하나’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고 썼는데, 내가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김행숙의 시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를 진술의 시와 묘사의 시로 나누는데, 김행숙의 시는 이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시에 나오는 사건들은 진술 자체로서 즉각적인 행동들이다. 진술과 묘사는 말하는 때와 말해지는 사건 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김행숙 인물들의 행동들에는 그 거리가 없다. 그것은 ‘수행성’ 그 자체다. 확언이 없다는 것이다. ‘수행성의 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가 ‘여성’은 수행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이게 뭐냐? 이렇게 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신세대의 존재양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는건가?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는 이 시집이 처음부터 ‘무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었다” “없지” “아니네” 등의 어법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렇게 해서 행동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 ‘의미’를 공백으로 남겨놓는다. [오전 5시를 보다]의 마지막 구절,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의 거리에 남자가 남긴 몇 장의 종이 중에서 아직 구겨진 것은 없네”를 보면, 이 의미의 공백은 가능성의 최대치다. 바로 앞의 시, [기억은 몰래 쌓인다]의 마지막 구절은 “나는 오래간만에 눈을 뜨니까 매일 어리둥절해. 그리고 눈곱처럼 떼어놓아야 할게 있다고 느끼지”인데, 꽤 엉뚱한 구절이다. “오래간만에”는 이 수행성의 존재가 문득 ‘자기 확인’을 위해 행동을 멈춘 것으로 읽힌다. 그랬더니, ‘매일’’어리둥절하다’ 즉 때마다 낯선 세상이다. 그러나 아마도 수행성 그 자체가 ‘눈곱’처럼 분비해서 퇴적시킨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의미가 눈곱이라면 의미는 잉여의미, 즉 무의미다. 눈곱을 떼는 행위는 조금이라도 쌓인 의미를 떼어놓는 행위이고. 그것은 의미의 공간을 최대치로 열어두기 위해서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이 가능성의 최대치를 열어놓는 것은 ‘기계의 나르시시즘’(에코)에 저항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기계의 나르시시즘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놀라운 속도로 순수해졌다”라고 쓰고 있다. 즉 무의미가 가중되는 해동 그 자체의 질주가 어느새 ‘순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게 아마도 ‘눈곱’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행숙의 시는 강계숙이 ‘호모 비데오쿠스’라고 정의한 세대를 정확히 복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돌파하고 있다.
04년 문학공간 좌담, 04년 문학과 사회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