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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고진, 은유로서의 건축

by 목관악기 2007. 11. 11.


은유로서의 건축, 기리타니 고진

1장: 건축에의 의지


기리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을 읽는다. 그의 저작 중에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함께 영어권에 번역된 이 책은 그로 하여금 영어권에서 일본문학자로서의 그 의 위치를 확립시켜 준 책이다.

그는 우선 형식주의가 건축에 근거해 있다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즉 건축의 비유들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불안정한 철학체계를 안정시키고 지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에서 그의 논의의 출발을 시작한다. 이러한 시작은 해체론과 맞닿아 있는데, 그의 서문에 따르면 이성에 의해서만이 이성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그렇다.

그는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토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자신이 토대가 부재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역설을 질문의 시작으로 삼는다.

그에게 있어 형식주의의 출현은 관계의 존재론적 지위의 재검토에서 출발하지만, 호리려 관계의 존재론적 지위 자체에 대한 물음은 무시해 버렸다는데 문제가 된다. 형식주의는 차이의 관계학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과연 그 차이의 관계학이 놓인 자리는 어디인가라고 묻는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서 기의는 기표들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의미작용이 단지 차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그 관계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자들이 초월적 기의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적 이데아를 거부하면서 오직 기표의 사슬들만을 인정할 때에도, 기표는 지각 가능한 기호나목소리와 똑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자크 라캉도 마찬가지다 라캉은 무의식을 어떤 위상학적 공간에다 놓지만, 과연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느냐의 물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즉 형식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토대’를 묻지 않는다. 따라서 형식주의자들은 암암리에 플라톤적 문제틀로 되돌아가면서도 부주의하게도 플라톤을 배척하는 것이 된다. 하여 이 책의 근본 토대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이 논의의 전제가 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이상을 현실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나타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이상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키면서 건축에의 의지를 드러내는,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것의 실현을 주장하는 어떤 구조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2장 : 형식의 지위

후설의 위기론과 형식 비판 –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일찍이 갈릴레오 때부터 생겨난 무엇보다도 중요한 어떤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지각을 통해 실제로 주어지는, 항상 경험되고 또 경험될 수 있는 유일한 실재 세계, 즉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세계, 바로 그 세계가 수학적으로 구성된 이상적인 것들의 세계로 은밀히 대치되었다는 것이다”(후설)

고진은 후설의 위기가 수학의 위기와 함께 얽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후설을 인용하면서 “만일 모든 참된 이론들의 전개가 수학자의 영역에 속한다면, 철학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끄집어 낸다. 그것은 후설이 그의 사유의 토대로 삼고 있던 모델 또는 전제, 즉 형식 수학은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일반학문과 철학의 구분을 무효화할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후설의 현상학적 탐구에는 항상 “철학(혹은 철학자)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함께 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 사이버네틱스 : 하이데거 또한 말년에 물었다 “오늘날 철학이 그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사이버네틱스였다. 사이버네틱스는 모든 것을 차이/정보로 재구성함으로써 물질/생명, 동물/인간과 같은 전통적 이분법을 무화시키는 것으로 기능한다. 즉, 그것은 ‘영혼’과 ‘인간’이 더 이상 특권화된 선험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지평이다. 이는 후설의 물음을 계승한 지평으로서, 철학에 남겨진 것은 더 이상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며, 의식과 이성이 배제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실체보다 관계를, 동일성보다 차이를 우선시하는 철학이란 이미 하나의과학,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사태이며 우리의 관심은 사변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활동중인 현실화된 차이의 철학에 있게 된다. 즉, 우리는 형식체계를 실현시킨 컴퓨터와 대비하여 인류가 자신의 인간성을 지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해 더 이상 긍정적으로 말할 처지에 있지 않다. 대신에, 우리는 인류를 인간답게 만든 것이 그것의 바닥 없음(심연)에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데리다: 데리다는 “무엇이 철학에 남겨져 있는가?”라고 묻는 대신에 “그토록 오랫동안 철학을 지속시켜 온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철학적 질문이다. 철학 자체의 형식화든 뭐든 모든 형식화 과정에서 우리는 형식이 존재하는지, 어디에 존재하는지, 그 형식의 바깥이 존재하는지, 를 물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플라톤의 선택과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제 3 장

플라톤에서 낭만주의 그리고 헤겔로;  플라톤은 시인들을 추방했고, 낭만주의는 철학과 시의 관계를 전도시켰으며, 이성자체를 미학화한 헤겔에게서 시는 철학의 한 분과가 되었다.

포에게서 발레리로; 포는 시를 합리적으로 짓고자 하였으며 보들레르는 포의 시작의 엄밀성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시작의 엄밀성을 강조하였다.

발레리; 시인은 건축가다. 플라톤에 의해서 한 때 추방되었던 시인은 잊 오직 건축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돌아왔다.

발레리는 인간이 만든 것의 표시는 그것의 형식이 지니는 구조가 그것의 질료가 지니는 구조나 구성에 비해 단순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었다. 예컨대, 어떤 문학 작품의 구조를 파악해 보면, 그 구조는 항상 텍스트 자체보다 단순한다. 비록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텍스트는 구조보다 더복잡하고 더 초과한다. 텍스트는 언어라는 자연적인 질료가 혼합되어 짜여진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구조는 어떠한 구조든지 간에 그 구조가 형성될 때의 어떤 의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텍스트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는 항상 감추어진 의미 내지 작가가 전제되게 마련이다.
‘누가 이것을 만들었지’ – 대답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제작 자체의 입장에서 요구된 물음, 사실상 작가의 부재를 암시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렇게 대답된다.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어떤 것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자연이 그것을 산출했다고 말한다”

‘자연’ – 제작에 대해 남김없이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한계나 불가능.

제 4장 자연도시

발레리적 물음에 기초한다. 즉 제작은 항상 구조를 초과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건축에서의 나무구조와 반격자구조.

알렉산더라는 건축가의 인공도시와 자연도시: 알렉산더는 수많은 세월에 걸쳐 출현해 온 도시들은 자연도시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를 인공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인공도시란 디자이너들과 기획자들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창조된 도시를 말한다. 그는 인공 도시들이 도시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계획된 이러한 대도시들을 점점 더 받아들이길 꺼려하는 것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지적한 대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연도시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인공도시의 현대적 양식에 활기를 불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도시 자체의 내적 구조는 파악하지 못하고 대신 자연도시의 겉모습이나 이미지만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자연도시가 반격자(半格子)형태로 조직되는 반면에 인공도시는 나무의 형태로 조직된다고 말한다.

나무구조: 닫힌 구조, 상위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횡단적 연결도 가능하지 않은 구조.

반격자구조: 열린 구조, 부분집합들의 관계가 성립하는 구조. 관계 생성의 구조. 새로운 텍스트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

“어떤 조직화딘 대상이건 간에, 내적 요소들의 극단적인 구획화와 분리는 다가올 파멸에 대한 첫번째 신호다. 한 사회에서 분리란 무정부적인 상태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있어서 분리란 정신분열증과 임박한 자살에 대한 표시다” – 알렉산더.

                   
  제 5장 구조와 제로

알렉산더의 방법론 – 그의 방법론은 여전히 플라톤적인 건축에의 의지를 통해 알려진다. 즉, 인간이 만든 것 바깥이 바로 자연이라는 그릇된 생각에 호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것의 핵심에 있는 어떤 부정적인 형상이 바로 그 바깥임을 드러낸다.

구조주의의 언어학과 야콥슨의 방법론
; 구조주의는 언어학을 통해서, 그 가운데서도 특히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으로부터 과감하게 갈라져 나온 야콥슨의 음운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소쉬르는 “언어에는 오직 차이들만이 있다. 실질적인 항들은 없이라고 주장했으며 야콥슨은 소쉬르가 뒤죽박죽인 채로 남겨 두었던 바로 그 음성조직의 체계화를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접근법을 제안했다. 이 체계화는 조직적인 구조를 이원적 대립들의 집합으로 다시 생각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언어에서 모든 음소들의 변별적 특징들.  

; 음향악 분야에서의 소리의 인지의 예를 통한 랑그의 언어학

; 랑그의 언어학도 말하는 주체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환우너에 의해, 즉 예를 들면 물리적 말소리, 지시 대상, 문맥을 괄호침으로서 도출된다. 따라서 랑그의 언어학은 자신의 전제로서 주체를 요구한다. 그것에 의해서 발견되는 차이의 형태가 더 높은 차원의 조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항상 목적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구조는 초월적 자아를 상정하고 이것과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가 아닌 후설의 현상학 읽기에서 자신의 비판-해체론-을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자아를 포기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것’을 넘어서는 초과분을 하나로 묶어 구조 속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장치, 즉 제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로 음소는….변별적 특징이나 불변의 어떤 소리 특성 어느 것도 없다는 점에서 프랑스어의 다른 모든 음소들과 맞서 있다 하겠다. 또 다른 편에서, 제로 음소 0는 어떤 음소든지 간에 그 음소의 없음과 맞서 있다”(야콥슨)

제로 –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원래 주판 위의 구슬을 움직이지 않는 것 에 대한 이름이었다. 만일 제로가 없다면, 숫자 205와 25는 구별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말라르메의 제로의 역할:: 시의 지적인 갑옷은 연을 분리하는 공간 속에 그리고 종이의 여백 가운데 숨어 있고 거기에 남아 있다. – 그 속에서 생겨난다. 시 자체를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그 의미심장한 침묵::여기서의 여백은 노자의 쓸모있는 것으로서의 무,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두 개념은 철학적이다. 그러나 야콥슨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구조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적 자치며 순전히 이론적인 측면에 없어서는 안될 어떤 것이다. 구조주의는 제로기호의 도입과 함께 출현했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한 제로 기호의 인류학 도입과 철학적 함축의 시작

레비스트로스: 모스의 마나와 하우라는 관념을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제로 기호는 인류학에 도입되었고 철학적 함의를 가지게 된다. 원시 폴리네시아의 하우에서 모스는 어떤 능력을 발견했으며 그것이 선물/교환의 상호성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의 의식에 의존하는 모스의 방법론적인 접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하우나 마나를 초월적 범주로 제시했다. 야콥슨의 제로 음소로부터 배운 레비스트로스는 마나 같은 관념을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는, 따라서 어떠한 의미도 받아들일 수 있는”것으로 재정의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제로기호를 떠다니는 기표와 동일시했다.:숫자놀이의 예:떠도는 기표 또는 제로 기호는 구조의 구조성을 보장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그저 신이나 초월적 자아의 대리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

롤랑 바르트의 기표와 기의; 한 기표의 기의는 또 다른 기표이고, 따라서 의미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오직 기표들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롤랑 바르트는 서구에서는 기표의 연쇄를 추적하다 보면 궁극적 기표인 신과 만나게 된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신은 무한 후퇴하는 연쇄를 끝내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 기호체계를 완성한다. 모든 기호체계는 이러한 궁극적 기표, 즉 없음의 부정인 제로를 상정해야만 한다. 바르트는 궁극적인 기의의 지배로부터 기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빈 기호 또는 기호의 영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제로에의 호소; 초월적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것. 제로는 구조의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 바로 여기에 현상학적 코기토가 거주한다. 데리다는 구조주의적 전략을 통해서 현상학적 주체나 추월적 자아를 넘어가는 것이 환상임을 예견하였으며, 이 토대 위에서 현상학 비판을 시작했다. 그는 ‘현상학’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체시켜 버린다. 데리다는 차이의 숨겨진 작용을 드러낸다. 거기서 현상학의 특권화된 현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비현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즉 현전으로 이해되는 구조는 항상 울타리 쳐져 있는데, 그것은 그런 구조가 차이의 불가피한 운동을 억누르기 때무인 것이다.

불가피한 차이? = 구조 또는 형식체계 그 자체의 자기지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