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유스, 미적 현대와 그 이후
- [반자연으로서의 예술, 1789년 이후의 미적 전환에 관하여]에서 요약노트.
모도 마르크바르트는 먼저 좌절, 숭고, 아이러니 등의 현대적 미학의 문화현상들에서, 그 다음에는 충동적 자연의 탈주술화된 자연철학의 철학자들인 쇼펜하우어와 니체에서, 낭만주의, 자연의 탈주술화 과정을 추적했다.
하지만 이때 그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된 경향은 주목하지 않았는데, 아래의 고찰에서 나는 이 경향을 조명하고자 한다. 자연으로의 전향에서 좌절, 그 자체를 자기 입장으로 삼는 세계고(世界苦)라는 획기적인 기본모델에서 그 양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 문학이 낭만주의 이후의 아방가르드들 본래의 결론은 아니었다. 자연으로의 전향이 좌절된 데 뒤이어 – 보들레르에게 맨 처음 강령적으로 – 자연에 기반을 둔 미학 일체를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 진,선,미의 최고 심급이라는, 자연의 세속적 권리는 이제 기각된다. 이제부터 예술은 반자연으로 정초되어야 한다. 예술과 산업의 동맹이 시작된 시대에 예술은 인간의 미적 활동을 그의 완전한 자율성의 총괄개념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이성적 역사의 상실을 신성한 자연의 획득으로 변ㅇ요시키고, 그 자연을 구원자로 변용시키면서” 시작됐던 1789년 이후의 미적 전환은, 낭만주의적 희망이 좌초된 후에는 미학에서 자연을 점차 더 배척하는 쪽으로 급변했다. 낭만주의적인 자연의 미학은 자연 없는 현대적 미학으로 끝나고, 18세기 말의 역사비관주의는 19세기의 자연 허무주의로 끝난다. 하지만 이 자연 허무주의가 현대미학의 최종 결론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p. 155
20세기의 미학 – 모방된 자연이 아니라 예시(豫示)된 자연의 복귀
순수한 반자연으로서의 예술, ‘산업의 시’가 어떻게 전적으로 자기 자신 위에 세워진 인간의 자유로운 구상으로서의 미를 산출함과 동시에 사회적 행위에 규범을 제시한단 말인가? 이 질문에서 다음 시대의 유파들이 나누어진다.
상징주의 - 자연적대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감
자연주의 - 모방의 원리로 되돌아 가지만
자연의 심급을 새로운 사회적 심급으로 대체
(풍경에서 환경으로 변화)
상징주의의 경우 – 말라르메의 서정시 : 대상적 자연을 하나의 우연적 사건 혹은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물로 격하, 사물은 대상이 사라진 데에서 시의 순수한 언어가 생겨나도록 하기 위한 구실로만 사용, 시는 음악처럼 자신이 묘사한다고 지칭하는 영혼의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 결국에는 자기자신, 즉 시 창작만을 지시함. 현대시는 급진적인 탈 대상화에 기여.
인상주의 회화 – 미리 주어진 것, 동일한 것, 지속하는 것으로서의 자연을, 단지 색채의 힘만으로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만듬, 주체로부터 색채가 구성됨, 자연은(자체내에 깃든 풍경) 고양된 새로운 미적 지각의 순전히 시각적인 현실 속에서 사라짐, 자연의 존재는 지각되는 것으로 되어버림
모네의 분할주의 – “대서당의 시간들”의 경우 자연의 광경을 계속 새롭게 하기 위해 그것을 순간적인 것으로 환원
세잔느 – 가시적 자연을 순진한 눈에 색채적 뉘앙스만 제공하는 것으로 환원시킴, 이는 색채파적 구성에 맞서서 순수한 현상성으로 해소되어버린 자연을 다시 깊이의 자연으로. ‘현상하고 있는 것의 구체화’로 드러내기 위한 것..
큐비즘에서 오르피즘으로의 진행 – 채색은 대상적인 것에서 완전히 분리됨, 즉 추상적인 회화가 “세계의 생명력이 왕성한 운동”의 표현으로 이해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에서 동시적 대조의 유희는 자기 목적이 아니라, 미적 이념의 형성을 위한 조건, 신비적 근원시(uropoesie)의 숭고, 빛 속에서 조화롭게 된 우주 등의 형성을 위한 조건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다음 단계의 미적 전환
-현대의 미학에서 축출되었던 ‘자연적 자연’이, 자연의 탈대상화의 정점인 추상적인 회화가 나타났을 때, 동시적 대조의 유희를 ‘채색된 문장들’처럼 읽을 줄 아는 눈에는 생명의 신비한 색채조화의 근원으로 다시 현상됨.
pp.182-187. 요약 정리
위스망스 – 보들레르의 뒤를 이어 자연적대성을 인공적인 것의 미적 숭배로 전환시킴,
[거꾸로] – 물리적 자연과 시민적 민주주의에 대한 반항, 자연과 사회는 인간의 평등한 신체적 자질이라는 자연적 평등의 원리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평등의 요구에 대한 증오에서 하나가 됨, 건강한 것, 자연적인 것, 그리고 사회에 의해 신성화된 것과는 거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 데카당의 표지가 드러남
[테제생트](위스망스 작품의 주인공의 난초가 있는 방) – 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명백한 반박을 위한 예시, “자연의 꽃들을 흉내냈던 조화들에 따라서 그는 가짜 꽃들을 모방하는 자연의 꽃들을 원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
발레리 – 모방원칙의 도치로부터 미학적 결과를 최초로 추출, 발레리의 시적 구성의 원리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포이에시스 개념을 재수용한 것, 아리스토 텔레스의 경우는 산출하는 행위로서의 포이에시스이지만 발라리의 경우는, 자기 재생산 속에서 영원히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자연 더욱이 돌연변이와 도태의 맹목적 법칙에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그 자연의 형성과정이 지닌 포이에시스적 성격 자체를 문제 삼음,
자연이 미리 제공하지도, 가능성으로 붙잡고 있지도 않았던 것을 자기 자신의 활동공간에서 창조하는 영예, 그리고 인간만이 접근할 수 있는 참된 것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영예를 얻는 것은 더 이상 미메시스적이지 않은 예술 뿐, 현대적인 시는 비록 그것이 최초로 주어진 자연의 한 부분만을 묘사할 뿐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때 비로소 가능성 속에 있는 그 대상을 실제로 창출해 냄. 발레리에게는 자연적대성이 완전히 ‘조롱’으로 됨. 풍경으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참되다고 한 ‘루소의 우스꽝스러운 착오’에 대한 조롱이자 또한 자연의 잃어버린 것, 시원적인 것, 온전한것, 전체적인 것,에 대한 현대적인 향수에 대한 조롱.
발레리 전집의 구절 – “30년이 걸려 ‘자연’의 발견에 이른 그 견해보다 더 소박한 견해는 없다. 자연이란 없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언제나, 조만간에, 산출되었던 것이다. 사물들을 다시 그 근원성에서 파악한다는 생각은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근원적인 것이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바다와 나무들과 태양은, -게다가 인간의 눈마저- 모두가 다 예술이다. ‘자연이란 없다’는 말은, 자연의 이상상은 그것의 생성을 망각함으로써 얻어지며 인간이 표상이 전혀 없더라도 자연은 자연이며 그 자체로 알아 볼 수 있다는 환상에 근거한 것, 발레리는 그의 대상을 잊게 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방식, 텍스트에 기입된 텍스트의 작성에 대해서만 경탄하도록 하기 위해 바다나 나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
각주에서 :
야우스의 미적 경험의 세가지 기본 범주
포이에시스 – 미적 경험의 생산적 측면, 스스로 생산한 작품에 대한 향유
아이스테시스 – 미적 경험의 수용적 측면, 인식하는 관찰과 관찰하는 재인식의 즐거움
카타르시스 – 미적 경험의 소통적 측면, 말과 문학에 의해 발생되는 효과의 즐거음
낭만주의적 기대 – 감성적 인간은 은밀한 조화를 통해 자연의 모든 사물과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달리 말해서 내적인 마음상태는 외적 자연으로서의 풍경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고 보는 것.
알레고리 – 친숙한 세계의 탈현실화, 낭만주의적 자기 감정의 탈 개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