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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2018년 시와 사람 겨울호 계간평

by 목관악기 2019. 2. 15.


                                                                                               스리랑카 인도양 해변 photo by Han yong guk


시와 사람 2018년 겨울호 계간평 

  • 부르는 일과 대답하는 일의 간절함에 대하여






내가 문득 읽던 책을 덮고

너의 이름을 부를 때

지상의 너와 똑같은 이름들은 무얼 할까 궁금했다


네가 왜?하고 다가와서 물을 때

양들의 잠을 위해 수천 톤의 눈꺼풀을 지불하고 있거나

영작 숙제로 푸른 형광등을 절절 끓이거나

점심을 기다리며 펜치로 나사를 조이고 있을

지상의 너와 똑같은 이름들 이름들


네가 무슨 일이야? 재차 물을 때

한 개의 이름을 지상에 내려놓고

수천 개의 이름 속으로 흘러들어간

너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사람들도 궁금했다


너는 싱겁긴 참, 하며 네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소리를 담을 고막도 없이

물결같은 이름들 위에 둥둥 떠 있는

앞으로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질 아기들, 아기들


내가 너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를 때

자석 같은 끌림으로 네가 돌아보는 게

나는 참 신기했다


문성해,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시와사람 2018년 가을호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가 닿는 일의 처음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것은 김춘수였다. 한 사람의 이름은 그대로 그의 전체성과 정체성을 동시에 규정한다.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처음 부를 때, 아이는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순간이며, 존재론적 사건이기도 하다. 아이는 그 순간과 사건의 지평선에서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씨앗이 되어 몸과 마음은 대지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대지 위로는 물의 길을 열어 밑둥과 가지를 키워 올린다. 그러므로 이름 부르는 행위는 한 사람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부름에 대답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그 대답 또한 존재론적 순간이자 사건의 지평선이다. “응”하고 대답할 때, 부르는 행위는 의미와 관계의 물길을 틀 수 있지만, 어떤 대답도 없을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와 연관을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어쩌면 부르는 일보다 응답하는 일이 더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타자와 세계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하나의 윤리적 명제로서 인문학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왜?”, “무슨 일이야?”는 부르는 사람에게 당연하면서도 얼마나 간절한 응답일 것인가?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구나 부모 자식 관계에서 부르는 일과 대답하는 일은 몇 만 번이든 새로운 행위이자, 순간이며, 사건이다. 


문성해 시인의 시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 당연한 일의 간절함을 아무 일도 아닌 듯 드러내면서도 행간에 깊고 넓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것은 “너의 이름”이, “지상의 너와 똑같은 이름들”로 확장되는 순간 일어난다. “지상의 너와 똑같은 이름들”은 아마도 “너”를 포함한, “너”와 관계를 맺을, “너”가 살아갈 이 지상의 세계일 것이며,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질 아기들”에서처럼 도래할 이 지상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궁금한 것은 단순하게는 아이가 앞으로 어떤 세계를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궁금함일 것이다. 시인이 궁금한 이름들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시인은 대답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를 때/ 자석 같은 끌림으로 네가 돌아보는 게/ 나는 참 신기했다”고. 그렇다. 세계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가족과 지인의 대답으로 세계는 나에게 응답한다. 



너는 내게 얼굴은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너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건 뭐냐고 물었다. 여섯 시에 온다고 말하던 얼굴이 저쪽에서 움직인다. 새벽 울음은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다. 나는 모르는 얼굴이라고 답했다. 너는 생존했으니 얼굴을 가지라고 말했다. 증언을 하라고 말했다. 나는 골속에 박힌 아무 얼굴이나 뒤집어쓰면서 골목을 걸었다. 그건 니가 아니야. 너는 말했다. 너를 뺀 나머지가 나야? 두 개 뿐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며 물었다. 나는 골속에 박힌 볼을 네게 던지며 물었다. 이것들이 정말 가짜야? 너는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내 볼이 너의 볼에 닿아 눈처럼 녹았다. 나머지들이 팔다리를 흔들면서 걸어갔다. 



손 미, 나머지, 2018 문학사상 10월호


내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어떻게 응답해야하는 것일까? 나를 부르는 나는 누구이며, 대답하는 나는 누구일까. 아니 왜 애초에 이런 사태가 생긴 것일까. 하지만 이미 그 사태는 분열을 초래했고, 그 이후 나는 나와 대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타자와 세계를 향한 어떤 부름에도 좌절과 절망만을 느낄 때, 나는 나를 부를 수밖에 없고, 나와 대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분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내가 나를 부르기 시작할 때, 나는 둘, 넷, 여덟 그리고 미지수로 확장되어 버린다. 육체가 그렇듯 그것은 자동적인 사태여서 제어가 불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그 분열은 이상하게도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지닌다. 다중적 접속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상하게도’라고 말한 것은 그것들 모두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나’ 모두와 접속할 수 없다. 그 ‘나’들은 ‘나’인 동시에 ‘나’의 타자들인 것이다. 현실에서 겪는 타자와의 관계와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분열된 ‘나’들은 언제나 접속 가능한, 열려있는 ‘타자’들인 동시에, 하나와 관계 맺을 때, 다른 타자와는 관계 맺는 것이 불가능한 닫혀있는 ‘타자’들이다. 분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나’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와 동시에 관계 맺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나를 부르는 세계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나’의 내부가 되어 버린다. 그 속에서조차 ‘나’가 진정한 ‘나’를 찾아 헤매야 한다는 것,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시는 그 끔찍한 헤맴의 흔적이라는 것을 손미의 시 「나머지」는 보여준다. 


“생존을 했으니 얼굴을 가지라고 말했다. 증언을 하라고 말했다”는 최초의 분열이 일어난 사태를 암시하는 것이겠지만, 시가 놓여있는 자리는 사태가 아니라 사태 이후의 흔적이다. “얼굴은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물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분열 이후의 시적 사태가 지향하는 바를 말해준다. “여섯 시에 온다고 말하던 얼굴이 저쪽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그 “얼굴”이 도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어쩌면 도래의 끝없는 지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얼굴’은 나의 분열의 기원이자 근원이므로 그렇다. 나의 내부에 그것이 마치 달처럼 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다른 얼굴을 바꿔쓴다 할지라도 ‘나’의 얼굴을 가질 수 없다. 이미 그것은 “저쪽에서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리고 최후의 비명은 시작된다. “너를 뺀 나머지가 나야? 두 개 뿐이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것들이 정말 가짜야?”도 마찬가지다.  “너”와 “얼굴”만이 진짜이고 “나”는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질문일 뿐이다. 그래서 비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태 이후 “나”는 가짜다. “나의 볼”은 아무리 많이 꺼내 던진다 하더라도 “너의 볼”에 닿아 “눈처럼 녹아”버릴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짜 ‘나’에게서조차 튕겨져 나와 버린다. 그리고 “나머지들이 팔다리를 흔들면서 걸어가”는 것을 다만 바라볼 뿐이다. 아니 ‘나머지’들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끝없이 ‘나머지’를 생산하며 살아가는 어두운 세계에 ‘얼굴’이 떠 있다. ‘나’였다가 ‘너’였다가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손미의 [나머지]의 내부는 온통 그림자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비탈에서 나는 쏟아져내렸다


개를 풀어놓고 따라 간다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둘, 셋인 것도 같다


저 개는 어디로 가나

오솔길 지나

벌판을 가로질러


뒷산 공동묘지,

무덤 곁에 나는 숨어 있다

오래된 뼈 냄새 맡으며


나를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는 개를 끌어안는다


나를 안아준 개

쥐를 먹고 뛰어가던 개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리고

뼈만 남은 개가 나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나는 개를 따라 달린다


하얀 그림자를 남기고


신성희, 흰 개를 따라, 딩아돌하 2018년 가을호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내부에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을 기르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반려동물이 우리에게 일종의 정서적 안정감으로 존재를 지탱해 주듯 우리 내부에 그런 반려동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우리를 앞서가고, 때로는 뒤 따라오며, 때로는 나란히 걷고 있는 그 존재는 위태로운 삶의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존재는 분열의 응축된 형상이며, 끝내 그 형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버텨야 하는 간절함의 형상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나에게 왔으며, 달아나지 못하도록 내가 지켰으며, 다시 어느 순간 그 뒤를 쫒아야 하는 존재에 대한 응답을 「흰 개를 따라」는 보여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어떤 순간이 도래한다. 끝내 “비탈에서 쏟아져 내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줄은 “풀어놓고”가 아니라, ‘풀어지고’ 만다. 그러자 비로소 그 존재는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집착도 함께 쏟아져 내린 것이다.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둘, 셋인 것도” 같다. 그 모두가 다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저 개는 어디로 가나”는 개의 방향이 아니라 화자가 가고자 하는 방향일 것이다. 그 곳은 “오솔길 지나 벌판을 가로질러”야 갈 수 있다. 축약하여 말하자면 살아온 삶을 거꾸로 지나가는 길이다. 그러자 “공동묘지”가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삶은 죽음에서 온 것이고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시에서 이 당연함은 조금 다르게 드러난다. 


그것은 유년의 체험에서 기원한 것이다. “뒷산 공동묘지/ 무덤 곁에 나는 숨어 있다/ 오래된 뼈 냄새 맡으며” 유년시절 화자는 산을 헤매다가 길을 잃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함께 있었던 것은 “개”다. 시적 순간인 “개를 풀어놓고 따라간다”를 다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개를 풀어놓고 따라가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 길을 잃었을 때의 공포는 사실 삶의 기원적인 공포이기도 하다. 어쩌면 유년 이후 우리의 삶이란 길찾기가 전부라고 말해도 된다. 그 공포 옆에 바로 “공동묘지”가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길을 잃고 죽음 옆에 서 있는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라. 시에 드러나는 유년체험은 그대로 삶의 공포를 상징하고 있다. “나를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 때의 안도감을 화자는 개와 나누었다. 그리고 그 개는 화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다시 어떤 순간이 도래했다는 말로 돌아가자. 이제 “뼈만 남은 개가 나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개”는 다시 유년으로 달아난다. “나”도 따라 그 유년으로 달아난다. 그것은 ‘나’가 ‘나’에게 온 몸으로 응답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응답은 한쪽만 가능하다. “나”는 유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가능한 쪽은 “공동묘지”, 죽음뿐이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나”가 개를 따라 가고 싶은 곳은 어쩌면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림자만 남기고”로 시가 끝나는 것은. 어쩌며 단순한 대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림자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삶이 허상이었다는 말일까? 끝내 유년의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평생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말일까. 그림자는 ‘시’는 아닐까? “나”를 죽음 쪽으로 보내고 나서야 완성되는 ‘시’. ‘개’도 ‘나’도 떠나버린 자리에 남아있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