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여, 다시 기침을 하자
한용국
김수영은 썼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김수영, 눈) 기침은 몸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외부의 위협에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이 자율적으로 반응하는 발작적인 반응이다. 김수영은 그 몸의 반응을 의지적 행위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눈’ 때문이다. ‘기침’이라는 의지적 발작행위가 ‘시’라면, 그 ‘시’를 ‘눈’에 뱉어냄으로서 어떤 구원을 꿈꿀 수 있었다. 구원이 없어도 좋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시’라는 행위는 시인과 시가 놓인 자리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 모두를 잠시 멈출 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눈’은 시의 외부에 존재하는 영토인 동시에 시에 내재된 영토였으며, 시를 읽는 사람들의 내부에 새롭게 마련되는 영토였다. 그래서 그 ‘눈’은 ‘살아있었’다. 현재를 멈추도록 작동하는 ‘눈’이고, 미래에 반드시 도래할 ‘눈’이었다.
그리고 이십년이 지나 이성복은 썼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 가족과 일과 거리는 무사했지만, 그 속에는 이미 폭력과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고, 그것은 세계의 면역체계마저 면역시켜 버렸다. 세계는 모순을 모순으로 지탱하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모두 “자기 삶을 솎아내고”, “자기의 하늘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을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순의 악순환이었다. 그 세계 속에서 시는, ‘기침’만으로는, 모순에 대항할 수 없었다. “모두 병들었으므”로 “눈”의 영토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아무도 ‘기침’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순에 면역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숨 쉴 수 있는가? 시는 스스로 ‘광기와 폭력’이 되는 길을 택했다. 모순의 악순환에 언어는 쉽게 동화되어버렸으므로,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모순을 충격할 수 있는 모순이 필요했다.
관객들 틈에서 우리는 왜 숨을 곳이 없을까요
소녀는 팔과 다리에 감긴 실을 튕기며 묻습니다
암전처럼 켜지는 둥근 조명은 늘 우리를 감시하지
입술에 코랄 틴트를 덧칠하며 휘장을 들춰보는데
자신들이 지르는 소리에 갇힌 저 사람들의 흥미가 무섭지 않니
소녀가 눈물점을 찍으며 웃습니다
저들은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몰라
몸속 깊숙이 꽂힌 서로의 칼날 같은 시선을 숨긴 채
소년이 녹슨 건반처럼 삐걱대는 뼈마디의 세기를 견딥니다
너는 관절 꺾인 다리를 만지면 어두운 상자 속 뭐가 보이니
마스카라솔로 실크속눈썹을 빗질합니다
어둠 속 얼굴을 비추면 나를 묶고 있는 박탈감이 보이지
소년의 무거운 목소리에 추에 달립니다
수천 개의 눈에 갇힌 나를 왈칵 토해내고 싶은데 어쩌지
타인의 삶이 살갗 같아서 벗겨 낼 수 없어
내일도 우리는 박수소리를 맞으며 춤을 팔고 있을까
낮게 속삭이며 소녀는 울먹입니다
저 환호성들, 어쩌면 박음질 된 입안의 통증을 앓는 소리일지도 모르지
우리처럼 말이야
손등에 터진 솔기를 접으며 소년이 입을 뻐금댑니다
타인의 얼굴로 타인과 밥을 먹고 타인과 키스를 하지요
빛 속에 갇혀 오늘을 더듬대는 장님의 춤, 타인의 춤을 추는 우리
흥얼대는 소년의 몸에 채찍이 감깁니다
소녀는 체념하듯 객석을 향해 포즈를 취합니다
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은 날이야
타인의 웃음 끝에 걸린 질긴 놀이를 무사히 끝내려면
객석을 봐, 저들의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아
당신은 누구의 마리오네트입니까
춤으로 묻지만 저들은 귀가 없잖아, 빈 환호성만 있을 뿐
소년의 말에 소녀는 관객들의 표정을 살핍니다
이은화,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2016 시로여는 세상 겨울호)
한병철은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시대였다”(한병철, 피로사회)고 규정한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를 말한다. 일종의 타자성에 대한 면역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은 그 면역체계마저 사라져 버렸다. 면역이 면역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타자 또한 마찬가지다. 질병이 질병을 대체하면서 질병 아닌 게 되어버리듯, 타자는 끝없이 타자로 연쇄되면서 타자 아닌 무엇이 되어버렸다. 타자의 위계와 권력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로서의 타자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있다. 타자의 시선이다. 스스로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타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시선이 빚어내는 공포는 현존한다. 눈은 사라졌지만 시선은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시선의 공포에도 면역되어 버렸다.
이러한 면역의 악순환에 균열을 내는 존재들이 있다. 이 세계에 아직 편입되지 못했지만, 반드시 편입되어야 하는 존재들, 즉 성장하는 주체들이다. 이은화 시인의 시 [타인과 마리오네트]는 인형극 속의 인형이라는 장치를 통해 성장하는 주체들을 새롭게 호출함으로써 면역의 악순환에 내적 균열의 자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인형의 몸은 감염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어떤 공포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형의 비극은 사람을 꿈꾸는 데서 시작한다. 그 꿈이 실현되어 인형이 사람의 몸을 가지기 시작할 때,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시 속에 등장하는 소녀는 바로 사람의 몸을 갖기 시작한 주체다. 성장하기 시작했고 성장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면역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공포와 억압이 수반된다.
이 시에서 인형은 관객과 조명 그리고 무대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 ‘사이’는 ‘공백’과도 같다. 하지만 비어있는 공백이 아니다. 뜨거운 조명, 인형을 얽어맨 투명실, 그리고 관객의 시선들로 가득 차 있는 공백이다. ‘사이’라는 말을 ‘차이’라고 바꿔보자. ‘차이’에는 얼마나 공포가 가득차 있는 것일까. 시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인형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타자들의 시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르는 소리에 갇혀” 있으며, “몸 속 깊숙이 꽃힌 서로의 칼날같은 시선들을 숨긴” 존재들이다. 또한 “박음질 된 입안의 통증을” 입 안 가득히 숨기고 있으며, “귀가 없는 존재”들이다. 면역에 면역된 존재의 실존적 양상들이다. 이 타자들의 존재가 아니라 타자들의 시선이 공포를 유발한다. 타자에게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감염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이 살갖 같아서 벗겨낼 수 없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포는 인형들의 실존을 자각하고, 끝내 구토를 유발하게 된다. 감염과 면역의 과정은 이렇다. 인형 스스로의 인형을 게워내고, 그 속에 타자의 시선을 채우게 되는 것, 그렇게 인형들은 면역의 악순환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지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형’이라는 ‘성장하는 주체’들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이다. 면역에 감염된 사회에는 질병과 고통은 배제된다. 면역되지 않은 존재들을 통해서만, 면역에 감염되는 과정의 공포와 경악을 호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이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어요
비 온 뒤에 그곳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하던 말은 실족에 가깝고
네게 들었던 말을 네게 처음하는 것처럼
너의 입속에 손목들을 집어넣고
고백을 꺼내다가
유리로 된 몸을 관통하다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공간에 점점 더 늦어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몸 속에 불을 피워
마음을 밝히다가
연기가 된 시간을 만지작거리다가
우리는 수백 페이지의 멜랑콜리를 써내려갔어요
실물 크기의 밤들을 엮어
천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다가
또는
우리는 꽃에게 성기를 내보이며
우리를 행동으로 함축시켜 놓았어요
일란성같이
대칭 위에 우리를 눕혀놓고
혀를 파내다가
비닐 같은 온 종일을 하나하나 찢어발기다가
우리는
우리를 심연으로 대체하다가
우리는 어쩌면 촉각의 각도를 재고 있었어요
반성인 텍스트 속에서
점액질의 우리가 읽혔나요
아니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죽어야 했나요
윤종욱 인간이후, 시인동네 2016년 12월호
이런 악순환의 세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라는 단어에는 늘 어떤 종류의 윤리나 가치의 함의가 묻어있다. 그런 함의없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문제는 그 윤리나 가치가 한 번도 현실에서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것이고, ‘꿈꾸어야 할’ 이상향으로만 존재했다. ‘인간’은 그러므로 영원히 유예되는 추상명사다. 면역의 악순환에 감염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끝없이 ‘인간’을 호출하면서 ‘인간’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인가. 윤종욱의 시 ‘인간 이후’는 ‘인간 이후’를 통해서 ‘인간’의 추상성을 삭제해 버린다. 그러자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주체’와 ‘타자’를 아울러 지칭한다고 할 때, ‘우리’는 주체중심적이다. 그러나 이 악순환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체’는 실종되어 버렸고, ‘타자’만 남았으므로, 서로의 대화는 서로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주체의 의도가 부재하는 전언은 더 이상 전언이 아니다. 타자의 언어로 타자에게 말 건네는 것이니 “우리가 하던 말은 실족에 가까운” 것이 되고, “네게 들었던 말을 네게 처음하는 것”이 되고 만다. “고백”이라는 행위는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고백”을 들으려면 “입 속에 손목들을 집어넣어 꺼내”야만 한다. 대화가 불가능하니 관계맺기 또한 불가능하다. 시에서 보여주는 관계는 끔찍하리만큼 악순환적이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통과해서 두 번째의 자리에 선다. 또 다른 인간이 그 둘을 통과해서 다음의 자리에 선다. 두 번째 인간이 세 번째 인간을 세 번째 인간을 통과해서 그 다음 자리에 선다. 그렇게 무한히 순환하며 원을 그리는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악순환이 악순환을 대체하며, “인간이라는 공간에 점점 더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시도 또한 존재한다. “몸 속에 불을 피워 마음을 밝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연기가 된 시간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허무에 도달하고 말 뿐이다. 그 허무에서 황급히 빠져나와서 선택한 방법은 수백 페이지의 “멜랑콜리”를 쓰는 것이다. 멜랑콜리는 우울의 감정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러나 수백 페이지의 멜랑콜리는 단지 수동적일 멜랑콜리가 아니다. “밤을 엮어 천사를 만들고”, “꽃에게 성기를 내보이며”, “혀를 파내고”, “온종일을 찢어발기”는 행위들은 고통을 가상으로 행위함으로써 고통을 직시하고자 하는 행위다. “심연”으로 대체되지만, 끝내 “촉각의 각도를 재는” 행위로 마무리되는 이 멜랑콜리는 결국 사랑의 행위다. 자기 파괴에 가까운 사랑의 행위만이 이 악순환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끔찍한 전언일까?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죽어야 했나요.” 이은화 시인의 시를 다시 떠올린다. 성장하는 주체들이 악순환의 세계에 편입되어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새롭게 성장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기파괴를 통한 균열을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의 잘려나간 두 팔이 나를 제자리에 세우네요
조바꿈표처럼 두 다리로 서게 되는 제자리는
사람에게 과거를 재해석하게 하나봐요
자신이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게 하네요
지금껏 수많은 나를 재해석해왔지만
당신의 사라진 두 팔이후는 찢어진 악보처럼 난감해요.
하지만, 의수가 건반을 두드릴 때
익숙한 멜로디가 떠올랐어요.
그것은 타자의 현재가 나의 과거이기 때문이겠죠.
지금 당신의 연주는 내 미래를 바꾸는 순간이예요.
타인이 부른 노래는 나의 반주가 되므로
어느 날 아침 나는 당신의 노래를 되뇌며
내 두 팔로 나를 안아주고 있을 것만 같아요.
새로운 걸음을 요구하는 당신이 조바꿈에 따를게요.
자신과 미래를 단절하려던 나에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 그려넣는 현재에 대해 말해줄게요
그랬군요, 당신은 내 실종된 보폭을 연주하고 있었군요
맞아요 내 걸음은 타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제, 두 팔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하지 않을게요
내 몸을 내 두 팔로 감싸 안으면
조바꿈이 시작된다는 것 알게 되었으니까요.
첫걸음을 낳는 이 흉통을 따라가 볼게요.
차주일, 조바꿈표 그리기, 시산맥 2016 겨울호
이런 악순환의 세계에서 주체를 회복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주체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미망일 수 있다. 하지만 타자의 연쇄는 다르게 말하면 부재하는 주체를 의미하는 것으 아닐까. 새로운 주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주체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차주일의 시 [조바꿈표 그리기]는 그 모색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시에서 두 팔을 잃고 의수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은 시인을 “제자리에 세운다.” 이것은 단순한 멈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잠시 놀라 멈추었다가 다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멈춤의 자리 자체를 “제자리”로 치환시켜 버린 것이다. 그 “제자리”는 우선 성찰의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과거를 재해석하게 하고”, “자신이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게”만든다. 여기까지는 일견 평범한 성찰이다. 누구나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사라진 두 팔이후는 찢어진 악보처럼 난감”하다. 자신의 고통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행복의 정도를 가늠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단지 멈추기만 했다면, 다시 가던 길을 갈 것이다. 서서히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며, 다시 만나게 될 때는 충격의 강도는 미약해진다. 그렇게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제자리”가 됨으로써 의미는 진화한다. 타자의 고통에 직면하여 철저하게 타자의 고통 뿐만 아니라 주체의 삶까지 호출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의수로 된 연주는 시인에게 “타자의 현재가 나의 과거”라는 인식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나의 욕망의 연쇄도 아니고, 타자의 욕망의 연쇄도 아니고, 타인의 고통의 연쇄라는 인식으로 전환된다. 부재하는 주체의 자리에 “타자의 고통”이 호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연주는 내 미래를 바꾸는 순간”이 된다. 조바꿈이란 방향의 바꿈이고, 시선의 바꿈이다. 욕망을 바라볼 때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되지만, 고통을 바라볼 때 악순환의 고리는 녹아내린다는 전언이다. 타자에서 주체로 각성한 어떤 존재가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다시 철저하게 그 속에 녹아들어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 혹은 그 고리에서 자신을 삭제함으로써 단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주체는 사라져도 악순환은 남는다.
하지만 차주일 시인의 “제자리”는 다른 자리다. 부재하는 주체의 자리를 타인의 고통으로 대치한 자리다. 그러므로 “내 걸음은 타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어요.”는 흔한 진술이 아니게 된다. 부재하는 주체와 고통받는 타자는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합일의 경험이다. 그 속에서 욕망의 연쇄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주체가 스스로를 안아주는 일이, 타자의 고통을 안아주는 일이 되었다,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며, 주체인 동시에 타자인 합일의 자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는 다시 고통스러운 자리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첫걸음을 낳는 이 흉통을 따라가 볼게요” 고통에는 주체도 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고통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통은 은폐되고 면역만 창궐하는 세계에서 시의 역할은 무엇인가. 악순환하는 단어들로 시는 어떻게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을 드러내고, 잘못된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시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면역세포가 신체를 파괴하듯, 면역이 세계를 조금씩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는 세계와 싸울 뿐만 아니라, 시는 오염된 시 뿐만 아니라, 잘못 면역된 시와도 싸워야만 한다. 그렇게 진정한 멈춤을 수행하는 시, 그 멈춤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시작하는 시가 가능해질 때, 다시 “살아있는”,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할 수 있는, 병든 사람들이 마음놓고 아프다고 외칠 수 있는 ‘눈’의 영토를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시산맥 봄호 계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