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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오생근, 현대성의 경험과 시적 인식

by 목관악기 2007. 11. 11.

    현대성의 경험과 시적인식 - 보들르레의 경우



현대성의 문제를 의식하고, 그것에 대해 미학적 질문을 던진 최초의 모더니스트로서 우리는 보들레르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근대적 대도시의 매력에 이끌리기도 하였지만 자기가 살던 시대의 현대성과 관련된 위기 의식으로 어둡고 우울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준 시인일 뿐 아니라, 현대 세계에 대한 예술적 재현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인식한 시인이었다. 그는 사회 현실의 빠른 변화, 새로운 생활 양식, 과학과 산업의 혁명, 19세기의 현실을 구성하는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의 혼재를 파악하면서, 그 모든 현상을 과거의 낡은 형식과 표현 속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현대 세계를 새롭게 재현하려는 욕망이 시인으로 하여금 기존의 규범과 양식을 결별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성에 대한 의식의 단초이면서, 모든 안일함을 거부하고 정형화의 틀을 벗어난 탐구와 모험의 세계로 시인을 뛰어들게 만든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보들레르와 더불어 예술창조는 현대성의 시대로 돌입하여 새로운 지평을 연다.

보들레르의 연구가들이 흔히 말하고 있듯이 그의 미학적 현대성은 모호하고, 모순되기도 하다. 그것은 영원하고, 변함없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우연적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현대성은 산업 혁명이나 사회적 근대화와 같은 맥락에서 병행해 나온 개념이 아니다. 그의 미학적 현대성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의 속물 취향과 속악한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경멸하는 부정의 정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거부나 부정이 아니라, 과거와 역사적 전통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구체적 삶의 현재, 살아 있는 현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면서 영원한 미의 가치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의 결과인 것이다.

보들레르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대립시키지 않고 종합함으로써 상황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어떤 미적 이론을 만들어 낸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당대의 화가 콩스탕텡 기즈에 주목한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일상적 삶의 풍경을 스케치로 그린 이 화가야 말로 보들레르와 같은 이중적 현대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 시대적 유행을 반영하는 여인들의 옷차림, 공원의 풍경 등은 나중에 보들레르가 쓰게 될 산문시의 주제들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 생활의 화가로 알려진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유행적 장면이나 인물들의 모습을 빠른 직관력으로 포착하여 묘사한 것을 보고 보들레르는 감탄하였을 뿐 아니라, 현재를 증언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대상에 대한 주관적 이상화의 방법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보들레르에게 현재는 시적으로 재현되고 부활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의 현재적 풍경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비현실적이며 유령처럼 떠오른다. 모든 위대함과 정신성이 사라진 시대, 영웅적 정신이 소멸된 시대, 생활방식과 사고 방식이 획일화된 시대, 부루주아적 속물 대중의 시대, 이 시대를 비판하고 부정하면서도, 이 세계에 담긴 진정한 현존의 가치를 다시 찾는 일, 다시 말해서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 현실에 숨어 있는 드 높음 가치를 찾는 일이 시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보들레르는 현대 세계의 모순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거부하듯이 그린다.

현대세계, 혹은 도시의 세계는 때로는 환각적 풍경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악마적인 패러디의 시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시적 표현의 본질은 세계를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조롱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시인과 현실, 시인의 이상과 현실의 모순 사이의 여러 가지 분열은 그의 시적 언어 속에서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미적 형태를 이룬다.

보들레르의 현대성은 벤야민이 잘 말했듯이 도시의 거리와 군중의 발견이다. 당신의 파리는 나폴레옹 3세의 권위와 오스만 시장의 결단으로 고대 중세 도시의 틀이 완전히 해체되고 재건설된 도시였다. 수백 채의 건물이 허물어졌고, 수천 명의주민들이 도시 변두리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누추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수백년 동안 이웃으로 지내던 인간관계는 모두 해체되었다. 번화가에는 온갖 종류의 상점과 회사가 들어섰고, 길가에는 멋진 카페와 음식점들이 자리잡았다. 새롭고 넓은, 화려한 도시의 풍경은 익명의 다양한 군중들을 모여들게 했다. 보들레르는 그 군중들 틈에서 산책하고 그들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 거니는 자유를 누리며, 또한 거리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사람과 사물의 흐름 속에 잠겨 있을 수 있었다.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그의 산책은 “상징적으로 자기 시대의 거리를 정복하러 나간 사람”의 산책이었다. 거리는 그에게 피신처였고, 거리와 공원, 혹은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가 “영혼의 매음”이라고 불렀던 상상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현대화된 도시의 주역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에게는 집단의 힘을 느끼게 하는 대중의 무리가 흥미없었고,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었다. 외로운 산책자 시인의 관심을 끈 대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족이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 견고한 사회 조직 속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 밤거리를 배회하는 넝마주이,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들, 돌보는 이 없는 불쌍한 노파, 맹인, 병자 혹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 창녀, 도둑, 사기꾼, 곡예사, 노동자, 창유리 파는 행상 등, 산업화 사회에서 일탈해 있거나 소외된 사람들이다. 보들레르의 도시시에 나타난 인물들은 대체로 이처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관점이나 감정은 그 어떤 동정이나 자비로움을 담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자비가 있다면 악마적 자비일 뿐이다. 그들에게서 시인이 찾는 것은 바로 타자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으로 머물면서 타자가 될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시인은 진정한 체험의 단계로 올려 놓으려 한다. 또한 세속적인 대중들과 천박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건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부르주아적인 물질과 금전의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는 오만스러운 정신적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도시의 번화가를 배경으로 한 시 중에서 보들레르적 현대성의 중요한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시로 [후광의 분실](파리의 우울 46번)을 예시할 수 있다. 마샬 버만이 이 산문시를 “현대적인 장면의 원형”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배경과 주제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강렬한 대결의 양상을 통해 현대생활의 독특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시인과 어느 평범한 사람이 도시의 어느 술집이거나 아니면 어떤 환락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대화를 나눈다. 시인을 그처럼 불명예스러운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놀라워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자네는 내가 말과 마차를 얼마나 무서워하는 지 알겠지. 좀전에, 내가 황급히 가로수 길을 건너가다가 진창이 있는 곳에서 펄쩍 뛰어갔는데, 살인적인 마차가 사방에서 질주하며 달려드는 혼란의 와중에서, 그만 내 후광이 갑자기 머리에서 흘러내려 쇄석을 깐 도로의 진흙탕 속에 떨어져 버렸어. 나는 그것을 집어 들 용기가 없었네.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는 것보다는 내 휘장을 잃어버리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지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이제 보통 사람들처럼 아무도 모르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 저속한 행동도 할 수 있고 방탕한 생활에 빠질 수도 있게 되었네. 그래서 보다시피 자네나 마찬가지로 이런 곳에 온 것이지.

-- 후광을 찾는다고 광고를 내보거나 경찰의 도움을 청해보지 그래.

-- 천만에 이대로가 좋아. 자네만 나를 알아봤을 뿐이지. 게다가 품위라는 것이 나는 아주 질색이네. 형편없는 시인이 그런 후광을 주워서 뻔뻔스럽게 쓰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면 재미있네.

예술가의 후광을 중심으로 한 아이러니와 풍자적인 어조를 느낄 수 있는 이 시는 후광으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권위와 시적 임무, 시적 가치가 이미 보장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예민한 통찰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처럼 저급한 시인, 현대성의 감각이 없는 시인은 시인에 대한 전통적인 후광의 보호막 속에 안주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안일한 후광에 의존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시대 착오적인가.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잘 논리화 했듯이 모든 정신적 작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임금노동자로 바뀌게 된 현실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또한 이 시에서처럼 예술가가 후광을 분실하게 된 폭력적인 상황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넓은 도로와 엄청나게 증가한 교통량은 시인으로 하여금 한가롭게 도시를 산책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중심 교통 기관이 오늘날의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감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새롭게 만든 쇄석의 도로는 대단히 넓어 마차의 질주를 용이하게 했으며 그 도로 위로 마차를 탄 사람과 말을 모는 사람 모두가 질주함으로써 폭력적인 교통량의 흐름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마차들의 난폭하고 불규칙적인 돌진과 이동은 보행자에게 대단히 위험스럽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보행자의 한가로운 산책은 더 이상 안심하고 보장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러한 보행자의 상황이 바로 현대 사회에서의 시인이 처한 상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군중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야 말로 일상 생활의 ‘움직이는 혼란’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고, 예술가는 바로 그러한 공간 속에서 외롭게 던져진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후광을 분실하게 된 아이러니의 상황은 위기의 상황이지만, 시인은 그 위기 속에서 새로운 현대성의 시학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좋은 환경에서 안전한 후광의 위엄을 누렸던 시대는 끝났다. 시인은 그러한 시대인식에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인의 모습을 긍정하고, 일상인의 자유로움-물론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유로움이겠지만-을 누리며 도시 생활의 새로운 현실을 발견하고, 그처럼 나쁜 환경 속에서 풍부한 시적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역설을 깨달아야 한다.

보들레르의 현대성은 안일한 타협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탐구와 경험을 모색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것에 대한 피상적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깊이 있게 인식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혼란스러운 양상을 새로운 형태의 의미와 아름다움 속에 담아 표현하려는 열정과 전투적 의식의 결과이다. 이러한 시적 탐구는 현대성의 문제가 지속되는 한 결코 완성되고 정지된 것일 수 없고, 미완성으로 열려 있는 것이며, 현대적인 움직임의 혼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긴장된 의식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오생근 평론집,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