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식 평론집, [불온한 시간](문학과 지성사, 2003) 들 중에서 메모.
근대의 가속도, 진보의 패러다임 아래서 모든 신성한 존재는 ‘한줌의 위안’으로 타락하며 그러한 타락은 ‘모독’과 ‘오염’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 일으킨다. 정전(canon)이 모독 되듯이 모든 책은 ‘오염’의 덩어리, 키치일 뿐이다. 폭풍 아래 흩어지는 잡동사니와 자신의 동일성을 지켜보고 있는 세대에게 근본적으로 주체의 정체성은 순결하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을 모방하며 그리고 오염되어 있다. 이런 오염된 주체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역설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하의 [세운상카 키드의 사랑],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김영승의 [반성] 등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의식이 이러한 모독당한 존재의 자의식이다. 그리고 모독과 상처에 대한 인식은 이윤학의 내면 속에 폐허,상처의 탐구나 함민복, 함성호, 차창룡 등의 자기 조소, 이수명, 이철성, 서정학, 함기석 등의 분열증적인 언어의 형태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죽음의 도시에서 모든 존재는 부유하는 여행자이며 갈가리 찢어져서 흩날리는 잡동사니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희망’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p. 66
… 90년대 시는 대중문화, 언어, 정치현실, 일상성, 성적 정체성의 혼란 등 모든 외적 상화의 속박, 타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왜소한 주체들의 자기 폭로와 반항을 담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고백이나 폭로는 자기 진정성의 지향이 치열하면 치열할 수 록 전략적인 것이 되고, 또한 그만큼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 ‘비교의 척도’를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말이 있을까. ‘자율적 주체’나 ‘개성’ 따위의 허구성을 자각하고 있는 창작주체들에게 내적 원리로서의 자기 증식성과 자기 규정성을 미학적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당치 않은 모순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이 90년대의 시적 현실 속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시적 상황에 대한 시인들의 철저한 인식은 90년대 시를 더욱 ‘전략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체의 견고함에 대한 신념이 무너진 상태에서 90년대 시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개인성’을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상황앞에서의 피할 수 없는 선책이 전략으로서의 시쓰기, ‘전략적으로 살아남기’라는 미학적 정면돌파이다.
다시 말해서 90년대 시의 전략은 ‘깊이 없는’ 혹은 ‘의미 없는’ 상실의 시대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다양한 방법적 변주이다. 이 점에서 구십년대 문학의 특징은 문명적 폐허 속에서 의미의 흔적에 대한 탐구와 향수에 몰두하는 것이 그 반을, 그리고 심층없는 표피의 현실을 조소하고 공격하거나 폭로하는 언어유희, 요설과 장광설 등이 나머지 반을 차지한다. 전자의 경우는 내면화와 진정성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나타내는 반면에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자기 파괴의 기원을 지시한다.
의미의 부재는 언제나 존재론적인 죽음과 통한다. 이 점에서 심층(의미)을 포기하는 시인들의 시는 치유보다는 죽음을 지향하는 시적 충동의 산물이다. 그들은 존재의 의미라는 ‘초월적 기의’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표현한다. 모든 심층적 의미는 누군가의 지배적 담론이나 권력욕을 반영하게 마련이라는 욕망과 권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유희’만을 유일하게 건강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타자에 대한 지배욕망을 담고 있지 않은 유일한 언어행위는 ‘언어유희’ 곧 ‘기표의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심층 없는 형식’은 이들에게는 ‘심층 없는 언어유희’의 배경에 불과하다. ‘유희의 시인들’에게 시적 새로움이나 위반은 그 자체가 권력적 담론이다. 그러므로 유희 속에 새로움이란 없다. 단지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변화와 반복만이 남겨진다.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변화와 환유적인 반복의 법칙은 창작적 주체의 경쟁이나 위선, 우월감, 타자에 대한 지배욕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혹은 전략에도 피할 수 없는 독선의 흔적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의미부여’의 욕망에 대한 경계가 ‘의미부정’으로 확장되는 순간 모든 소통이 차단되고, 시는 죽음과 자기파괴의 충동을 역설하는 또 다른 심층적 언술을 타인에게 강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의미의 부정은 예기치 않았던 또 다른 파괴적인 의미를 파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표의 유희’ 혹은 ‘물질적인 신체’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언어와 존재의 심층성을 부정하는 순간 남는 것은 되풀이와 반복뿐인 일상과 인간에 대한 무의미한 언술이다. 의미의 미끄러짐이라는 기표의 유희란 긴장 없는 반복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미의 소멸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기표를, 실체를, 육체를 강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90년대 시의 불온성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에 대한 ‘위반’을 통해 시인들은 전략적 글쓰기의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한 줌의 도덕’ 혹은 ‘한 줌의 환상’, ‘위로’에 대한 그들의 ‘환멸’로부터 얻어진다. 가치의 부재란 다리 말하면 허위와 위선 독선의 일반화, 대중화를 의미한다. 90년대 시의 양가성은, 허위와 독선을 전략적으로 차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들의 ‘환멸’은 ‘오염된 혹은 중독된’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자기환멸’을 동반한다.
p. 135, ‘시적 위반, 한 줌의 불온성’ 중에서
의미부재의 시대에 시는 전략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허위적 포즈와 경박함이라는 자신의 숨겨진 얼굴과 마주쳐야 한다. 그것은 시쓰기의 차원이 궁극적으로, 어떤 본질적 의미, 혹은 진정성, 근원회귀의 열망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상실은, 곧 시의 죽음이 아닌가.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에 다가설 수 없는 모든 시쓰기는 권태로운 유희이고, 유예된 죽음의 시간이며, 절망적인 자기 증식 혹은 영혼 없는 육체의 재생산일 뿐이다.
“언어의 저편엔 아무것도 없다” 또는 “현실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시인들조차도 사실은 의미의 결핍에 불안해한다. 그들의 내면 속에는 자신의 시를 ‘한줌의 유희’로 만들고 싶지 않은, 채울 수 없는 결핍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언어 저편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거나 “모든 의미부여의 욕망은, 타자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권력적인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기표의 유희’를 시적 전략으로 삼는 ‘시쓰기’ 또한 자신의 시 창작 방법론에 대한 의미부여가 아닌가. 따라서 ‘그 욕망이 그 욕망이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얼마나 독선적이고 권력적인가.
의도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언어행위의 결과 속에도 욕망의 흔적이란 묻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시인이 행하는 기표의 유희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억지 놀이’를 강요당하는 폭력적 언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의미란 현존하지 않으며 언제나 흔적으로 떠돌아다닐 뿐이지만, 그것을 의미부재를 단정 짓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의미란 절대적으로 부재하지도 현존하지도 않으며 단지 ‘부재/현존’의 사이를 깜빡이는 흔적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의미의 현현이란, ‘순간성’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포착하기 곤란한 것이다. 순간적이고 우연한 것에서 의미를 포착하려는 유하의 ‘재즈적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이 점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같은 책 p 135- 136
함기석의 시에서 보듯이, 90년대 젊은 시인 중에서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시적 전략으로 삼는 시인들은 언어에 대한 공격성을 통해서 자아의 고통스러운 ‘재탄생’을 지향한다. 이들 시인들은 언어를 단순히 창조적 위반을 위한 질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의 출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90년대 시적 언어의 ‘위반’, ‘불온성’은 방법적으로는 ‘기표의 유희’라는 의미의 미끄러짐을 차용하지만, 그러한 전략의 진정한 목적은 오염된 언어에 중독된 주체의 복원이라는 점에 있다. 물론 이러한 복원된 주체는 타자를 억압하는 폭력적이고 근대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주체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염된 언어의 세계(라캉 식으로 말하면 상징계) 안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불온성은 시인들은 언어에 대한 ‘의미 지우기’와 ‘기표의 유희’를 자신들의 시적 전략으로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P 141.
병든 육체와 새로운 체위
육체와 의식 그리고 운명과 영혼은 시의 형식과 시정신의 관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은유이다. 그 은유는 이제껏 시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언어의 세계를 육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환치함으로써 얻은 결과물이다. 이제 시는 사물 혹은 의식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담는 그릇이 아니라 모든 감각과 욕망을 매개하는 육체이다. 그리고 경계이다.
육체의 새로운 상징적 의미와 기능에 눈을 뜸으로써 90년대의 시인들은 비로소 육체를 세계와의 구체적인 교감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러한 인식은 시와 언어를 생각하던 이제까지의 기능적, 이성적 사고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다. 시가 의식을 매개하는 것으로 생각됨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육체(구체적 감각)과의 괴리를 이제 몸의 시학이 극복하려고 한다. 그것은 모든 형식(운명)을 만드는 원인이 시간, 공간을 헤쳐나가고 있는 육체의 한계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제 온 몸으로 시를 쓰는 단계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모든 시의 형식은 순간적이고 장르는 운명이다. 육체는 바로 실존을 순간에서 영원으로 밀고 나가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매 순간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영원을 꿈꾸는 것 그것이 시이다. 그래서 몸은 거대담론체계(랑그)와 사적 언술(파롤)의 어긋남 위에 서 있고 의식과 사물의 경계 위에서 타자와 교감하려고 한다. 육체는 사적 언술의 극한점에 있는 영혼과 욕망이 랑그와 사물의 세계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장소이고 세계와 교감하며 의식과 사물을 바꾸어가는 틈이다.
시의 양식에는 대체로 세개의 층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세계의 양식(혹은 사물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 그리고 몸의 양식이다. 이제까지 한국 현대시의 양식을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이 주류를 이루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적 인식은 이 둘의 양식 사이에서 그동안 그 존재의 변별성 혹은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양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 높은 경지에 있거나 소외된 변두리로 밀려나 잘 눈에 띄지 않던 몸의 양식이다. 의식과 사물의 경계이고 동시에 끊임없이 시가 들끓고 만들어지는 장소이면서도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육체의 구체성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시를 감각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한다. 지금 시는 ‘느끼는’ 기질의 문제이며 그것은 생각하고, 표현하고, 발견하는 것과 다른 차원에 있다. 감각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는 직관의 차원에서 시는 ‘관념-언어-사물’의 이성주의적 인식차원 밖에 있다. 그것은 ‘아프다’와 ‘병들다’에 대응할 만한 절박함과 순발력이 낳은 시적 체위이다.
세계는 불순하며 의식은 오염되었고 육체는, 언어는, 병이 들었다. 시의 죽음과 재생은 병든 육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육체성으로부터 나오는 직관의 언어에 의해 시는 병든 몸을 해체하고 운명을 만나 영원으로 간다. 병든 육체로부터 사라진 영혼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모든 의심스러운 거짓에 대한 진지한 대응이다. 그리고 육체와 시, 삶의 진정한 틀인 운명을 우리는 그때 만나는 것이다.
pp. 284-286
시인과 몽상가
송수권 시인의 [해식동굴]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1.이 땅에는 도사와 신선이 된 시인들이 많다/최근에는 부쩍 그 수효가 늘어났다/저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철버덕 철버덕/죽을 먹는 소리
2.죽에 잠기는 세상, 죽 쑤는 세상/…… /캄캄한 입, 검은 입, 저 죽통 같은 아가리에 처넣어야 할 것은/粥이 아니라 한 시대의 궁핍한 정신인지 모른다/어떤 날 궂은 날에는 한숨 같은 안개가 하루 종일 스며나올 때도 있다/마치 모래밭 속을 파는 염낭게들의 혀처럼!
3.벽에는 많은 박주가리떼들이 거꾸로 매달려/한 시대의 몽상가들은 이렇게 처형해야 마땅하다는 듯이/우산처럼 펼쳐져 있다. 펼쳐지면서 몽상을 꿈꾸는 중이었다/하나같이 눈을 퇴화해 있고
4.어둠 속에서 형광물질 같은 등지느러미를 뒤채는/학꽁치 한 마리/희번덕 박주가리떼의 발톱에 찍혀 사라진다.
5.밤새도 아니고 낮새도 아닌 이 슬픈 시인의 운명이, 이 불꽃 같은 삶의 운명이/어디서 탄생하였던가를/저 캄캄한 입을 벌리고 서 있는/동굴 속을 들여다보고서야/나는 비로소 알았다.
위 시 1의 1,2행은 최근 시의 정신주의적 경향을 비꼬는 시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정신주의가 신부주의로 추락할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지적된 적도 있지만, 최근의 느슨한 열반송, 스타일의 서정시에 대해서는 실제로 이러한 일침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자기 구원을 위한 깨달음의 추구를 담고 있는 90년대 후반의 내면화된 시풍은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자기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적에 의해 쉽게 재단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신주의적인 시풍도, 그 진정성의 정도에 따라 포즈와 시정신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1,2행은 포즈 혹은 폼으로서의 ‘달관’을 비판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비판적인 경계는 2의 “저 죽통 같은 아가리에 처넣어야 할 것은/ 죽이 아니라 한 시대의 궁핍한 정신인지 모른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신의 빈곤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정신을 지탱하는 알맹이인 사상, 정신, 전망도 없이 폼만 재면서 ‘도사연’하는 이 시대의 시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에 잠기는 세상’, ‘죽 쑤는 세상’이라는 조롱과 냉소 뒤에는 이 시대의 궁핍한 정신에 대한 시인의 ‘한숨과 걱정’이 감추어져 있다. 그 한숨은 3.에서 보듯이 꿈꾸는 몽상가들의 처형지로서 이 시대(동굴, 암흑, 야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꿈꾸는 몽상가인 시인은 눈이 퇴화해서 새라고 하기에도 뚜 쥐라고 하기에도 어설픈 방외인적인 주변 존재로 몰락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노래하거나 시대를 예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서 보듯이 눈은 이미 퇴화해버려 야만의 시대인 동굴의 환경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시인은 한낱 ‘몽상가’에 불과하며 그 정신은 지극히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시인의 시각은 이 시대의 야만과 시인들이 처한 정신적 궁핍의 환경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나 이 시의 후반부에는 그러한 정신적 빈곤의 원인과 몽상가로 퇴락해 버린 시인의 운명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동굴 속을 바라보는 시인의 표정은, 이 시대의 ‘캄캄한 물밑’을 보는 그것과 같다. 그리고 시인과 몽상가의 사이에는 어두운 동굴과 캄캄한 물 밑이라는 환경이 존재한다. 4.의 시대의 물밑에서 건져 올린 ‘학꽁치’를 채가는 박주가리(몽상가)의 모습은, 구원의 한 가닥 희망을 향해 촉수를 세우는 이 시대의 정신주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심층부에 있는 진리를 예언하지 못하지만 사라진 ‘영혼과 정신’에 대한 향수와 흔적을 애써 기억하고 꿈꾸는 몽상가의 비극적인 운명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의미있는 것은 이 시대 시와 시인의 운명에 대한 자기 점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의 빈곤은 단순한 포즈와 기억, 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 현실과 떨어진 시적 몽상과 기억은 낮쥐도 밤새도 아닌 경계인적인 존재로서의 시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반복해서 낳을 뿐이다. 90년대 시를 두고 말한다면, 시는 자기 허위와 기만, 자기 도취, 낭만적 미학의 영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90년대 시의 전망은 반미학주의를 어느 정도 내포할 수 밖에 없음을 이 시는 시사한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외지에서]와 [해식동굴]의 공통점은 시가 자신의 존재 근거인 선로와 기차를 버리거나 ‘학꽁치’, ‘야광찌’가 존재의 근원에 대한 향수, 흔적, 미적 취향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지는 점에 있다. 즉 이 두 편의 시는 시의 운명을 개척하는 새로운 정신의 발견을 위해서 과감하게 현재를 구속하는 과거의 틀을 버린다. 그 과거의 틀은 ‘학꽁치’, ‘야광찌’처럼 진실이 사라진 거짓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나 녹슨 철로로 상징되는 시정신의 낡은 관습이다. 따라서 이 두편의 시는 새로운 전망을 찾아가기 위한 자각 혹은 길떠남의 원점을 보여주고 있다.
P.307-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