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족문학 진영과 자유주의 문학진영이라는 인적 구성의 대립항은 거의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적 실천 안에 담긴 문학적 진정성과 완결성일 것이다. 근대문화의 불구성이 신비로운 경험이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인간의 이성과 욕망으로 분석,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왔다면, 우리 시대의 문학적 진정성과 완결성은 근대적 이성이 포착할 수 없는 개별화된 시적 주체들의 내밀한 경험을 중시하면서, 그것들은 현실적 연관으로 끌어들이는 역사적이면서 생태적인 상상력에서 가능성의 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태시학이 민족문학의 차원에서 자기 역할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그 동안의 민족문학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해왔다는 전통을 생태시학은 깊이 새겨야 한다. 말하자면, 인류 공통의 생태 문제라 하더라도 선진국의 핵폐기물 처리장이 급속하게 제 3세계권으로 유입되고 있다든가, 환경파괴의 심각성이 개발도상국에서 더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든가, 국내에서도 빈곤층이 더욱 환경 위기의 고통을 겪고 있다든가 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과 실천이야말로 왜곡된 식민지 근대 그리고 분단체제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 안고 있는 대다수 민족 구성원들에 대한 정당한 윤리적, 시적 관심이 될 것이다.
둘째, 부정성의 세계를 극단까지 파헤쳐 들어감으로써 역으로 그것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른바 ‘부정의 변증법’을 생태시학은 형상화해야 한다. 원래 리얼리즘이 ‘해방의 근대성’을 추구함으로써 완결된 근대를 이룩하려는 열정의 방법적, 미학적 산물이라면, 생태시학은 근대 일반의 적폐에 초점을 맞추는 탈근대의 시각이 반영된 미학이다. 그러나 이때 탈근대라는 것이 ‘근대’를 넘어서는 완결된 시스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근대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기율을 구상하고자 하는 데 잠정적인 목표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탈근대론의 하나로 제기된 생태시학이지만, 그 안에 우리 사회의 부정성을 구체적으로 파헤쳐 그것을 생태적 사유와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해야한다. 따라서 맹목에 가까운 자연의 신비화나 찬탄 혹은 문명과 근대과학 일반에 대한 강렬한 혐오의 이분법보다는, 구체적인 정황의 부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시가 역사적 개체를 일반적 법칙성의 차원에서보다는 일상과 감각의 현재성을 통해 계시한다는 말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셋째, 생태시학은 ‘근대과학’과 ‘남성’을 지나치게 대상화하여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급진적 시각을 떨치고, 근대문명과 생태적 사유가 공존하면서 인간의 삶과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을 앞에 놓고 볼 때, 최근 우리 시의 전개를 두고, 리얼리즘의 개념적 범주를 최대한 좁혀놓은 상태에서 리얼리즘의 퇴조나 몰락을 운위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리얼리즘의 시적 경향을 “사회현실에 대한 탐구와 현실인식에 민감한 경향의 시”(최두석) 정도의 광의로 규정하고, “투철한 참여정신과 엄정한 객관정신이 조화롭게 결합된 지공무사의 경지”(백낙청)의 시정신으로 이해하면서, 그 방법론적 확대를 생태나 환경 혹은 우리 일상의 수많은 문제군에까지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들을 통해 리얼리즘과 생태시학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지향점을 매개로 하여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민족문학의 시적 지향으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호, ”생태시학의 민족문학적 가능성”, 침묵의 파문, 창작과 비평사, 2002. pp.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