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인도양 해변 호텔 수영장
photo by han yong guk
발생하는 시, 사라지는 시.
시는 언어에서 태어나서 여백으로 돌아간다. 그것을 발생의 축과 소멸의 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모든 시들이 두 가지 모두를 완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시들은 움직인다. 발생의 축을 향해 움직이는 시는 그야말로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소멸의 축을 향해 움직이는 시들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자는 사유와 이미지를 뒤섞고 쌓아가면서 시가 되려고 하고, 후자는 끊임없이 모색하고 회의하면서 시를 지우려고 한다. 그것을 발생하는 시와 사라지는 시로 명명해 볼 수 있겠다.
대기가 내 체온을 넘어서던 날
집 안에 들어와 비비적대는 벌들을 파리채로 내보냈다
쌩쌩 날아다니는 놈들은 에프킬라로 반쯤 죽여놓은 다음에야
궁금해졌다 집을 짓다 잘못 들어왔나 애초에 집을 거꾸로 팠나
벌들의 체온은 얼마나 될까 사랑의 온도는
호기심도 연민의 시작일 수 있을까
두려움과 과도함은 사랑의 적
적대적이 되어간다 피할 데 없는 자들에게
어떤 자연은 폭력이다 폭염에 데여 누렇게 타버린 호박꽃 위에도
없고
에어컨 빵빵한 마트의 문명 속에도 없고 사랑은 어디 있는가 묻는 밤
달이 물고기 자리에 들었다
양파를 까다 펄펄 끓는 삼겹살집 바닥에 모로 누운 할매처럼
어제도 내일도 잊고 혼몽에 잠겨 물고기 사이를 흘러간다
살 만큼 살았다 나는 가을도 오기 전에 늙어버린 호박
혁명인 듯 추위에 불타던 시간도 얼었다 녹은 수박처럼 흐물거린다
시답지 않은 시간
병든 도시를 떠났으나 시골도 아팠다 곳곳에서 숨통이 끊겨버린
자연을 찬미할 수 없는 이 시대는 행복한 시인을 낳지 못한다
족보도 없이 과거와 미래를 떠도는 나는 난민
황도대를 거꾸로 돌아 문명 저편에서
차라리 춥고 배고파 암각화를 새기던 선사인들의
시다운 시간을 생각한다 돌로 돌을 쪼아 돋을새김하듯
미래는 하늘 위에서 쏟아지고
보증금도 월세도 없이 시간을 대출해 주는데
아서라, 나는 미래가 현재로 오고 있는 이 곳이 무섭다
서로 다른 시간 속으로 나아가는 쌍어궁 사이에서
달이 배부르고 있다.
황도대를 미끄러져 간 시원을 등에 지고
이미 오고 있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미래를 끌어안고
나를 먹어치우며
내가 나를 낳아야 하는 미래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디 먼 데서 내가 다시 태어나리라
김해자, 달이 물고기에 들다. 현대문학, 2018년 9월호
김해자 시인의 시는 사랑 없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대기가 내 체온을 넘어서는 날” 시인의 방에 벌들이 들어왔다. 시인은 거의 자동적으로 벌들을 파리채로 쫒고 에프킬라로 죽인 후에야 문득 자신이 일종의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벌들의 체온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한다. 인간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자연에 대한 폭력을 반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반성은 “사랑의 온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호기심도 연민의 시작일 수 있을까” 시인은 그 가능성을 연민에서 찾는다.
사랑은 가장 큰 적은 “두려움과 과도함”이다. 두려움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고, 과도함은 문명의 속성일 것이다. 두려움과 과도함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피할 데 없는 자들에게 어떤 자연은 폭력”이어서,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문명은 과도해졌다. 그러나 그 과도함 속에도 사랑은 없어서 시인은 묻는다. “사랑은 어디 있는가” 그때 시인은 하늘을 본다. “달이 물고기 자리에 들었다” 그러자 다른 시간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 시간은 시인이 살고 있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다. 시인의 시간은 “시답지 않은 시간”인데 “가을도 오기 전에 늙어버린 호박”같고, 흐물거리는 “얼었다 녹은 수박”같다. 원인은 “병든 도시” 때문이기도 해서 “시골”로 가보기도 했지만, 시골조차도 “곳곳에서 숨통이 끊겨버”렸다. 이제 어디서도 찬미할 수 있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한 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조차도 “족보도 없이 과거와 미래를 떠도는” 난민일 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물고기 자리에 든 달을 보면서 “문명 저편”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것은 문명 이전의 선사인들의 시간이고, “시다운 시간”이다. 쌍어궁의 한쪽은 시다운 시간을, 다른 쪽은 시답지 않은 시간을 향하고 있다고 거칠게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이에서 배부른 달은 어쩌면 시인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아니 문명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진행되지만, 시인이 찾는 사랑은 과거를 향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나를 먹어치우며/내가 나를 낳아야 하는” 모순을 견디는 일 밖에는 없다. 그 견딤이 결국 “시”일 것이다.이 시는 사랑없는 시대에 어떻게 시가 발생하는가를 질문하면서, 한 행 한 행 진행된다. 그렇게 일상에서 사유를 거쳐 이미지로 여백 위에 돋을 새김된다.
누구에게 나는 자꾸
질문을 했다.
누구세요. 누구일까요. 누구는 왜
조금씩 어긋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를 만나 담소를 나눌 때 누구는 꼭
토끼의 뿔을 달고 있었다.
토끼의 뿔을 휘휘 휘두르며 친근감을 표시하다가 의혹을 드러내다가 결
연히 싸우다가 끝내
이별을
누구는 조금씩 이상해 보이는 데는 천재
누구세요 누구일까요 대체 넌 누구냐
궁금해서 알 수 없어서 점점 괴로워져서 질문을
그것이 쓸쓸하고 좁고 가족 같은 동굴이어서
나는 밤마다 누구의 토끼뿔을 붙잡고 누구의 캄캄한 아가리를 벌리고 누
구의 내장 속으로
누구의 악몽까지
도달하려고 했다.
이제 누구는 나의 의혹과 나의 사랑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나는 누구의 무엇도 누구의 어떤 것도
추억으로 만들지 않았는데
누구가 떠난 뒤에도 나는
토끼의 뿔을 생각하였다. 토끼의 뿔에 사로잡혔다. 토끼의 뿔을 열심히
키워서
팔지 않았다
비 내리는 밤마다
나는 누구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우리의 사랑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를
왜 내 머리에서 토끼의 뿔이 자꾸 돋아나는 지를
누구는 길고 아름다운 뿔을 휘두르며 오늘도
가깝고도 먼 곳에서 조금씩
나를 그리워하는데
이장욱, 누구의 토끼풀, 창작과 비평, 2018년 여름
‘누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의문문에 쓰여)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 2. 특정한 사람이 아닌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 3. 가리키는 대상을 굳이 밝혀서 말하지 않을 때 쓰는 인칭대명사”로 등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구는 익명성과 실재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는 “누구”에게 “누구세요”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질문에는 사실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해자 시인의 “사랑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떤 답이 전제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지만, 이 시는 그렇지 않다. 다만 질문으로 끝날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시는 시를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이다. “조금씩 어긋나는 것”은.
그 어긋남이 사라짐의 시작이라면, 통로는 2연의 “토끼의 뿔”이다. 그 토끼의 뿔 속으로 누구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누구는 존재하는 동시에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다. 토끼의 풀처럼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 “누구”를 찾아다니고 있는 “나” 또한 “누구”일 것이므로,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것은 결국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고 말할 때 나는 존재하지만, “누구”라고 말할 때 나는 익명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질문은 실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어떤 불교적 사유를 품은 질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질문 자체가 투명한 질문이라는 것에 있다.
그렇게 질문 자체도 사라질 때, “누구”는 떠나는 것이다. 누구는 끝내 사라지고 질문만 남는다. “나”도 “누구”도 사라진 자리에 질문만 남아 “토끼의 뿔”이 된다. 이 뿔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익명성과 실재성이 공존하는 것이다.“나”의 머리에서 자라나는 뿔도 마찬가지다. 두 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어쩌면 이 시를 “누구”의 발생에 대한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진행되면서 “누구”는 “길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어떤 존재로 시 속에서 살아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끝내 “누구”는 없다. “토끼의 뿔”이니까. “나”도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문은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도 텅 비어 있다. 이렇게 시는 한 편의 시 속에서 자신을 삭제하고 여백이 되어 버린다.
발생하는 시와 사라지는 시는 어쩌면 너무 거친 분류일지도 모른다. 모든 시들은 시와 여백 사이에서 팽팽하게 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일 뿐이다. 이것은 시에 대한 사유인 동시에 어쩌면 여백에 대한 사유일 수도 있다. 아니 시를 향하는 사유와 여백을 향하는 사유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 사유의 끝에서 “사랑”이 모든 “누구”들에게 열려 있는 대지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