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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지암사 일기

by 목관악기 2007. 11. 11.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썻던 쪼가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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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역시 춘천답다. 어느새 안개가 산 아래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산책로가 없기 때문에 조그만 마당위를 그냥 하릴없이 맴 도는 걸음
        이래도 사방을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숲 속을 오래 걷고있는듯
        한 느낌, 별들은 너무 가까워 투망이라도 던져 올리면 하나 가득 빛
        나는 별무리를 담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새 울음 소리와 가끔 지
        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 그리고 고요 속을 나는 물 속처
        럼 걸어 방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비록 산 속의 암자라 하더라도 여긴 티브이도 있고,  전화도
        있다. 아직 절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라서 내가 묵는 컨테
        이너 방 한 구석에는 법당에 쓰일 자재며 용구들이 한켠에 들어차있
        어 조금 어수선하다. 책상 하나를 전세내서는 노트북도 올려놓고,몇
        권의 시집도 올려놓았다. 어제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여기서 며칠묵
        으면서 시집들도 새롭게 필사하고 몇 편 정리도 해서 돌아갈 생각이
        었다. 그러다 지치면 암자주변이며 가까운 산 근처도 산책하는 그런
        한가함을 꿈꾸었지만, 역시 내게 그런 복이 있을리가 없다.

        지금 내 팔은 아주 벌겋게 잘 익어 있다. 아주 예쁘게 달구어져서남
        의 살이면 한 점 베어먹고 싶을 만큼, 도착해서 어제 짐 풀고 몇 년
        만의 오래전에 익숙한 고요 속에서 잠들고 난 후, 오늘 아침 부터는
        내내 삽질이며 모래 나르기며 벽돌 나르기 등등 거의 데모도의 일을
        해야 했다. 아직 법당이 완공되지 않은 탓이다. 곧 27일이면 낙성식
        을 한다는데, 이 산골에 비하면 화려한 법당건물이 문과 벽  그리고
        단청을 기다리며 서 있다. 완공되는 날엔 오랜 고찰의 대웅전에버금
        가는 화려함과 위용을 자랑할 만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살이 벌겋게
        익었지만 내가 한 일이래야 겨우, 삽질이며 벽돌 나르는 일 정도 밖
        에는 없지만.

        스님은 94년에 이 곳에 들어와 슬레이트 건물로 작은 법당과 거처를
        마련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래도 백중 날이면 200여명의신
        도에게 안내장을 보낼 정도는 되셨다고 한다. 이 근처의 땅들을  매
        입해서 오갈 곳 없는 아이들 50여명 그리고 노인들 30여명  정도 수
        용할 수 있는 복지사찰로로 만드는 원을 세우셨다고. 원을 말씀하시
        며 와불모양의 능선을 쳐다보는 스님의 표정에 어떤  결연함이 서려
        있다. 그 표정의 한켠에서 오대산에서 행자생활과 살림을 보시며 함
        께 살던 세월이 은은하게 양각되어 온다. 스님께서 행자생활을 마치
        고 절 살림 보는 일을 맡았을 때, 나는 막 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입시에 실패한 후 주경야독 하면서 한 편으로는 스님의 가벼운
        시중을 들던 때였다. 종무소 생활이며 스님과 함께 지내던 날들은참
        평화로웠고, 힘들었지만 활기차 있던 시절이었다. 자칫하면 적막 하
        기만 한 산사의 종무소를 이런저런 이야기며 활달함 그리고 마음 깊
        은 배려들로 평화롭게 하셨던 스님이셨다. 그 시절도 이제 까마득히
        십년 전, 나는 그 시절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떠나온지도 어느 새 7년이 되어간다. 참 아둥 바둥하며
        살았다는 생각, 도시 생활이란,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내게엄청난혼
        란이었다. 그나마 대학원을 다니면서 학문 혹은 문학의 힘을 빌어어
        설프게나마 버티려고, 수많은 자극과 억압들을 중화시키려고 노력했
        지만, 아무래도 약한 정신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공부도 마쳐가
        는 시점인데 내가 얻은 것은 덜 된 시 수십여편과 거의 무지에 가까
        운 공부 그리고, 혼돈에 가까워져 있는 마음 뿐이다. 삶이 이렇게폐
        허에 가까울 수 있다니. 그래도 무난하긴 했다고 위로해 보지만그건
        변명이나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알고 있다. 시궁창인 삶을살
        면서 가끔 위로 머리를 내밀고는 아, 살아 있구나 잠시 외치는 정도
        의 것이 내 삶이며 문학적이려고 애쓰던 모습임을  누군가와의 대화
        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 경악 속에서 돌아보
        니 어느새 서른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서른은 다 이런 느낌인가
        . 생각해 보지만 쓰라리게도 아니었다. 분명히 다르게 살아 가는 사
        람들이 있었다. 아주 사소하게 직장의 옆 동료에게서도 혹은 대학원
        의 동료들에게서도 그걸 확인하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자본이 실
        존을 규정하는 거야 따위의 어리석은 말이나 중얼거리면서, 어느 날
        부터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아침 일찍 잠이 깨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게 그리고 멍청하게!

        그럴수록 그 시절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왔다. 무모했지만  분명
        한 의지, 그리고 강한 믿음 그리고 늘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던 스님
        들이며 사무실 직원들, 그때 나는 지극히 평화로왔고  고요했으면서
        도 확신과 의지에 차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는 이런 저런 우여곡
        절로 인해 그곳은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그 우여곡
        절 가운데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상처조차 그
        시절을 지워버리지 못할 만큼 산사의 십년은 내게 마르지 않는 맑은
        연못과 같은 것이다. 스님과 벽돌을 쌓고 공구리를 치면서 그  시절
        이야기며 뿔뿔이 흩어진 스님들 소식이며를 들으면서 사무침은 더해
        왔다. 도대체 무엇을 아둥바둥 살았단 건가. 그 7년 동안,  나는 뿔
        뿔이 흩어진 스님들을 찾아다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함께 살던아
        이들에게조차 거의 연락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직장생활 그리고
        한 삼년 된 통신생활에서는 거의 스쳐가듯 사람들을 만나왔던  것이
        다. 과연 그 칠년 동안 나는 누구 한 사람 제대로 만난 적이 있던가
        . 아직 이른 나이에 제대로 만났다고 할만한 한 사람은 아예 이세상
        떠나고 없다. 사랑이 몇 번 나를 지나갔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내
        게는 마찬가지. 내가 살아왔던 모든 관계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
        지. 그 모든 허망함이란 내 탓이겠지만,

        이런저런 추억이며 후회를 되씹는 동안에도 햇살은 강렬했고,  스피
        커에서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와 새소리 외에는 모든 게 고요했다.일
        을 잠시 쉬는 동안, 가끔 앞산을 바라보기도 했는데  녹음이 짙어서
        마치 짙푸른 잔디언덕 같이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격렬해진 마
        음은 그 언덕 위를 한달음에 달려 오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삽질을 하고 물통을 나르고 벽돌을 쌓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내려가
        서는 다르게 살아야 하리라. 우선 내가 심리적 거리로 멀리 두고 그
        리워만 했던 장소와 사람들에게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십 년
        뒤에 이 곳에 와서 다시 똑 같은 후회를 되씹게 되지 않아야 했다.
        그 장소와 연락처를 알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지
        쳐 고향에 돌아가거나, 단지 추억을 확인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
        니라, 새롭게 되살아내는 것이리라 믿는다. 그래 가지를 두고  뻗어
        나가야 할 곳에 뿌리를 두느라 애썼던 나는 마른 땅 속을 떠도는 어
        리석은 뿌리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망치를 든  스님에게 여
        쭈어보았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까요 스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
        했다. 어떻게 살긴? 좇나게 열심히 살어. 그러면 되는거여.

        이 글을 쓰다말고 잠시 돌아다니다 온다. 소설처럼 고즈넉하고 어둠
        은 때로 괴괴하기까지 한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잠시 눈을감
        았다가 뜨고 하늘을 보니 어느새 밤하늘은 정말 별의 꽃밭이다.  슬
        쩍 슬쩍 져버리는 꽃들도 있다. 은빛의 금을 짧게 그으며 하늘 속으
        로 사라지는 별똥별들, 문득 아, 소원을 빌었어야 했는데 하며 안타
        까워하며 어둠 속을 조금 오래 걸어다녔다. 내일 아침이면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허리가 아프셔서 더 작업을 못하시겠다고 하
        셨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사실 좋아라 했지만 겉으로는 은근히아
        쉬운 척하다가는 히히 웃었다. 아마 아침나절에는 잠시 일을 마무리
        하고 올라가게 되리라. 아무래도 가서 하루는 쉬어야 또 출근해서일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 한 오년 후면 여기도 절 모양새를 거의 다
        갖출 것이고, 아마 그때 내가 결혼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거나  한다
        면, 그때 휴가때는 와서 한 이틀 쉬어갈 수 있게 되리라. 이 글을읽
        고 여기가  궁금하신 분은 뭐 그냥 지금 와보셔도 된다.  춘천 지암
        리 지암사.

        오시면 저물 녂 법당앞에서서 꼭 앞 능선의 와불을 보고 가실 것,인
        연 닿는 사람에게만 보인단다. 나도 어제 저물녂에는 스님 이야기들
        으면서 아무리 봐도 와불이 안보이더니, 하루 뼈빠지게 일하고 나서
        담배를 피워물고 앞마당에 서 있다가 문득 고개 들었을 때야 겨우볼
        수 있었다. 이런 걸 공덕이라고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