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꽃힌 시집들을 보며 멍하니 앉았다가 그 중의 한 권을 꺼내 몇 편 훑어 보다가 말다가 한다. 무엇이 시인지 믿을 수 없다. 마치 이게 삶이야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한편 한편 들마다 구성이 꽉 짜여 있는 듯하고 이미지들은 통일되어 있기도 하고, 어딘가 돌출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수렴되고 있으며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시야? 이렇게 쓴 걸 시라고 하는거야?라는 질문앞에서 여전히 그것들은 까마 득한 미지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시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자 메타질문을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한데, 그것은 삶에 대해서도 아까처럼 그렇다. 늘 메타질문앞에서 어디로도 걷지 못하고 서 있다. 물론 삶도 그렇다. 무엇을 삶이라고 하고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이 주절주절은 내 시에 해당되고 있다. 내가 쓴 것들이 시가 맞아?라고 질문하고 있다. 아니다 시가 되었어?라고 질문하고 있다. 정말 시가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위의 단락을 유치해하면서 왜 이런글을 쓴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메타. 되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처음에 나는 책장에 꽃힌 시집들 중에서 거꾸로 꽃혀 있는 이문재의 시집을 보았고, 거꾸로 꽃힌 삶도 있다.라는 구절을 생각했다. 책장에 꽃힌 책을 모두 사람처럼 보고 있다. 나도 누군가의 책장에 꽃히고 싶다. 아니 전시되고 싶다. 그리고 가끔 들추어보여지고 싶다. 질문받고 싶다. 이게 삶이야?
그리고 그 질문과 대화하고 싶다.는 천한 욕망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추어보여지는 것. 나 아닌 다른 것으로. 그에게 간다는 것. 그것은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부정에 근거하지. 결국은 자기부정이고 자기 혐오다. 이게 시야? 이게 삶이야? 가끔 나는 내가 아무것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는 무식한 지경에 문득 들어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 아무 것도 고민해 보지 않은 듯한 무식한 지경에 걸어들어와 있는 걸 발견한다.
아아 아주 무식한 밤이다. 이게 시야? 이게 삶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