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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2018년 모멘트 봄호 계간평 - 수난의 기억과 내적 초월의 길

by 목관악기 2018. 7. 2.


수난의 기억과 내적 초월의 길




1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사적인 의미를 넘어서 공적인 언어가 되었다. 개인을 넘어 사회와 역사의 언어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에는 더 이상 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선언이 담겼다. 이 사회의 모순과 병폐에 대한 자기 반성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넘어 자라나는 세대와 고통 받는 이웃에게로 흘러넘쳤다. 그 물결은 끝내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타올랐고, 끓어올랐으며, 세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미안하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는데,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했다

미안

잘못을 저지를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보았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4월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인간적인 한에서 이미 악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면

그때 바다에 귀 기울이자

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그 무엇이어서

봄은 먼 분홍을 가까이에 두고 사라질 것


성급한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오래 이어질 기억투쟁 특별구간


멀리서 가까이서 분홍분홍 들려오는 밤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고 있을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선언이어야 할 것


봄을 닫기 전에, 닫어버리려 하기 전에

누군가


이은규, 봄의 미안, 창작과 비평 2018 봄호



그 날 이후 더 이상 봄은 예전의 봄이 아니고,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게 되었다. 봄과 바다를 떠올리는 순간 아무도 그 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원죄의식처럼 가슴 속에 통점으로 각인되었다. 모두가 공통감각이라고 할 만한 고통을 가슴 속에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날에 대해서 썼다. 그 날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모두 그 날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받아쓰고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 말들은 희생자들의 것인 동시에 또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희생자들과 나와 역사가 고통이라는 깊이에서 휘감기는 체험이기도 했다.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은 봄꽃을 말하겠지만 그 날의 기억 앞에서는 꽃마저도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양되지 않은 희생자들로 인해, 또  인양되지 않는 진실로 인해 봄꽃들마저도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다시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 그것은 시인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이다. 그 이유는 그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책은 펼쳐지고 읽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은 “덮어놓은 책”같은 것이다. 

그 날 이후 봄은 울음의 다른 말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래서 이 시에서 분홍은 울음이 된 것일까.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분홍의 따스함과 화사함은 먼 것이 되었고, 울음만 남게 된 것일까. 이제 봄은 오로지 그 날의 기억으로만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한에서 이미 악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면/그때 바다에 귀 기울이자/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무엇이어서”가 보여주듯이, 그 기억은 새로운 윤리감각을 불러낸다. 그 날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한다면 어떤 악에도 변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그래서 4월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 된다. 그것이 투쟁이어야 하는 이유는 “성급한 용서는/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투쟁 앞에서야 덮어놓은 책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간절함을 품고 있는 기원으로서의 기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기도만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행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오고 있을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선언”이어야만 한다. 선언과 행동을 통해서만  이 세계는 바뀐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봄을 닫아”버릴 것이다. 고통은 끝없이 되풀이 되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봄은 그러므로 이은규의 시에서 고통인 동시에 고통을 관통하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 






2. 


가끔 혼자 중얼거려 볼 때가 있다. 나는 과연 이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인가. 그럴 때 떠오르는 것은 익숙하다는 느낌이다. 주변의 것들과 합리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느낌, 우연이라는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거라는 믿음 같은 것들, 그것들은 삶에 일종의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세계에 대한 소속감을 부여한다. 그러니까 세계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세계와 내가 개연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예측과 상상이 가능한 장소라는 생각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가능한 생각인가. 어쩌면 전혀 개연성 없는 세계에 억지로 개연성을 부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걷는다 바람은 억새가 되고

저녁이 마저 눕는 길을 

붉다 만 벚나무 잎사귀가 맴도는 불광천 여울 곁을


걷는다. 마른 잎사귀처럼 주저 앉은 사람을

나는 모른다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을. 자전거 타는 사람을, 걷는 속도가 같은 사람을,

개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을


걷는다. 바람과 어떤 바람이 지탱하는 다리 밑을

열차가 달려가는 그 다리 밑을

천둥같은 날을


걷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익숙하므로

저기서부터는 낯선 길이므로

폭삭 내려앉은 낙엽들이 떠가는 천 옆을, 좁은 수로에 몰려 있는 메마른

어깨 곁은


걷는다. 슬쩍 부딪치자마자 애써 멀어지는 가벼운 사람을

나는 모른다

어쩐지 처음 걷는 길을, 어깨가 굽어 있는 긴 그림자를, 낙엽처럼 망해버린 색깔들을


걷는다

나는 모른다

여기 모르는 사람이 살아있다. 


백상웅, 산책, 창작과 비평 2018년 봄호




산책은 휴식의 시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여백을 만드는 것이며 그 속에서  삶의 수난을 잠시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산책의 시간은 길지 않고, 산책의 공간은 멀지 않다. 잠시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조금 더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조금 멀리 걸어간다고 해도 그 공간은 낯선 곳이 아니라 익숙한 장소다. 이런 산책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종의 자기 본래성의 회복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느린 걸음이 주는 사색과 성찰을 통해 일종의 자기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을 회복하고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백상웅의 시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준다. 시 속의 화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불광천변으로 산책에 나섰다. 억새와 벚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의 불광천 여울에는 화자 말고도 산책을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걷는 속도가 같은 사람, 개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아마 그들은 산책길에 늘 만나는 사람들일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산책 속에서 사람들은 익숙함과 친숙함이라는 공동체적 느낌을 갖고 안정감을 느낀다. 산책의 목적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다. 비록 익명적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유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화자는 단호하게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개연성의 영역을 제거하고 사실의 영역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들과 한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과 나는 철저하게 단절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나는 그들의 삶을 모르고 그들도 나의 삶을 모른다. 그 관계란 시에 따르면 “바람과 바람이 지탱하는 다리”같은 것이다. 그들과 나는 ‘열차가 달려가는 천둥같은’ 시간 속에 있으며, 그런 관계로 맺어져 있다. 좀 더 비극적으로 말하자. 그들과 화자는, 그들이나 화자가 방에서 홀로 죽어간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익숙한 길은 “저기서부터는 낯선 길”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첫 연에서 제시된 천변의 낭만적 풍경을 향하던 화자의 시선은 삭막한 풍경으로 향한다. 아니 화자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천변은 “폭삭 내려앉은 낙엽들이 떠가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고 만다.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슬쩍 부딪치자마자 애써 멀어지는 가벼운” 것일 뿐이다. 소통의 의지가 아니라 단절과 고립의 의지로 가득차 있다. 산책은 더 이상 낭만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철저한 익명성과 단절성로 가득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모른다.” 그렇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나를 모른다’. 그곳이 어디든 이 세계는 다만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살아가는 장소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괴리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선택한 행위가 끝내는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일 뿐이라는 끔찍한 전언이다.  


3. 


차이에 대한 욕망, 그것은 고유성과 개별성에 대한 욕망이다. 그 욕망은 건강한 욕망이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많은 우상을 낳는다.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고유성과 개별성을 가진 인물들이 끝없이 생산되고, 그 인물들은 대중과는 다른 삶을 살았노라고 선언되며, 모두가 그런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런 식으로 차이에 대한 욕망은 단순한 차이의 문제를 우등과 열등, 중심과 주변이라는 격차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차이는 사라지고 차별과 격차만 남는다. 차이의 본래적 기원이 이렇게 상실되고 만다.



꼬마 셋이 지나간다. 같은 곳에서 머리를 자른 듯 머리 모양이 똑같다. 가운데 아이가 작은 저금통을 거꾸로 들어올린다. 셋이서 동전구멍을 올려다본다.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눈송이가 민들레가 사탕 한 알이, 어떤 것이 나오면 좋을까. 꼬마 셋은 닮았다. 하나쯤은 닮지 않아도 되지만 그들은 닮았다. 더 많이 닮다가 슬슬 달라지겠지. 과일을 사거나 팔거나 과일 가게를 지나가겠지. 튀어나온 자동차에 흠칫 놀라 물러서겠지. 사랑하거나 그랬다고 믿겠지. 매미 소리를 듣겠지. 겨울에도 푸른 잎들을 무심결에 지나치겠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지. 닮았다가 달라지다가 다시 닮아가겠지. 


아마도 셋은, 임곤택, 모멘트 002, 2017년 겨울호


임곤택의 시는 묻는다. 삶에 과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누구나 조금씩 닮고, 또 누구나 조금씩 다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상투적이라고 생각되는 사유를 짧은 시 속에 그러나 길고도 깊게 펼쳐 보인다. 짧은 미로 같지만 들어서고 보면 한없이 길어지는 마술의 미로 같은 풍경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꼬마 셋이 지나가고 있다. 머리 모양이 똑같다. 셋 중 하나가 저금통을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세 아이의 눈길은 모두 그 동전구멍으로 쏠려있다. 무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 이 풍경은 기원적이라고 할 만한 삶의 풍경을 드러내 보여준다. 어린 시절, 우리가 저금통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바랐던 것, 그것이 어쩌면 삶이었다. 삶에는 무언가 신기하고도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바람, 거기서부터 모든 삶은 시작되었다. 눈송이든, 민들레든, 사탕 한 일이 되든 그게 신비였고, 삶의 전부였다. 

그 닮은 꼬마 셋, 얼굴이 몸이 닮은 게 아니라 머리 모양이 닮은 꼬마 셋은 그렇게 닮다가 슬슬 달라질 것이다. 성격에 따라, 환경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고 삶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시는 말한다. 어떤 다른 삶을 살게 되든, 닮음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무엇이 닮았느냐고? 시는 그 항목들을 늘어놓는다. 세상 어느 누구도 과일가게를 지나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자동차가 튀어나오면 흠칫 놀라 물러설 것이고, 사랑하거나 그랬다고 믿을 것이다. 매미 소리를 듣지 않고 살 수 없고, 겨울에 푸른 잎을 무심결에 지나치게 될 것이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항목들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과연 이 항목들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 삶이 있을까. 삶의 길은 이렇게 짧고도 길게 펼쳐진다. 시보다 삶이 길다.  

어떤 삶을 살아간다하더라도 삶은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닮았다가 달라지다가 다시 닮아지겠지”. 그렇게 물처럼 어느 지류에서 만났다 다른 지류로 흘러갔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할 뿐이다. 세 소년은 어쩌면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 보자. 어디서 살아가든 세 소년은 “튀어나오는 자동차에 흠칫 놀라 물러설” 것이다. “매미 소리를 들을” 것이다.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세 소년의 삶은 이렇게 사소한 사건들 속에서 만나고, 또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동화같은 이야기는 정말 심심한 결말을 가진다. 그러나 결말이 중요한 것일까. 이야기가 없으면 결말도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게 삶이다. 고유성과 개별성에 대한 욕망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차별도 격차도 마찬가지다. 삶은 그렇게 무덤덤한 일상의 지속이라고 시는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를 계속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바로 이렇게 지속되는 일상은 아닌 것일까. 

 이 수난의 세계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도 삶이지만, 우리를 위로하는 것도 삶이다. 수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살아가는 일이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이자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유일한 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