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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

파울 첼란, 게오르그 뷔히너 상 수상 연설 3

by 목관악기 2007. 11. 11.

3

렌쯔 – 곧, 뷔히너 – 는 여기서 뤼실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의 <왕 만세!>는 더 이상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말막힘이다. 곧, 그와 또한 우리가 – 숨을 못쉬고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문학, 그것은 숨돌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일리, 어쩌면 문학은 길을 – 또한 예술의 길을 – 그러한 숨돌림을 위하여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닐까? 낮선 것, 그러니까 심연과 메두사의 머리, 심연과 자동기계가 정말로 한 방향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문학에서 낯선 것과 낯선 것 사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여기서, 이 한 번의 짧은 순간에 메두사의 머리가 쭈그러들고, 자동기계가 말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여기에서 나 – 여기 이렇게 자유롭게 된 낯설어진 나 – 와 더불어 또 어떤 다른 것이 자유로와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시는 이때부터 그 자체가 아닐까…… 그리고 이제 예술없이, 예술없이 풀려나 시의 다른 길을, 그러니까 또한 예술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 다시 새로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쩌면 모든 시에는 <1월 20일>이 적혀 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오늘날 쓰여진 시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바로 여기서 분명하게 그러한 시점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한 시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느 시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시는 말한다! 시는 그 시점을 잊지 않고 있지만 실로 자기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것에 대해서만 늘 말한다.
그러나 시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 이런 생각이 이제 여러분을 놀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낯선 – 아니, 이제 이 말을 쓸 수가 없다. –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예로부터 시의 희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가 알리, 어쩌면 전혀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누가 알리가 거기에 이제 나 자신이 다다르고 있음을 보거니와,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도 내가 나로부터 그 옛 희망에 덧붙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어쩌면 – 이제 실제로 – 이 <전혀 다른 것>이 너무 멀지 않은, 전혀 가까운 <다른 것>과 함께 만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시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머물러 서 있다.  – 이것은 동물한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다름 숨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이 숨의 사이 –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머물러서 생각하기 – 가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 지는 아무도 말 할 수 없다. 벌써부터 늘 <바깥에>있떤 재빠른 것은 속도를 얻었다는 것을 시는 안다. 그러나 시는 스스로 닿을 수 있는 것으로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비어있는 것으로서 또한 – 아마도 뤼실르처럼 – 자기를, 곧 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그 <다른 것>을 향하여 의연히 나아간다.

실로 시는 – 오늘날 시는 – 분명히 심한 말막힘의 경향을 보인다.  –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에, 언어 선택 상의 만만치 않은 어려움, 점점 더 빨리 기존의 문장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또는 생략할 때 더욱 살아나는 의미 등과는 간접적으로만 관계가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여러 번 극단적 표현을 썼지만, 이번에도 나는 극단적 표현을 하겠다. 시는 제 가장자리에서만 자신을 주장한다. 시는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소리지르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제는 아닌 것>에서 나와 자신의 <여전한 것>에로 되돌아간다.

이 <여전한 것>은 그러나 단지 말한다는 것뿐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고, 또 낱말과 <같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언어에 의하여 자기에게 그어진 한계, 언어에 의하여 자기에게 열린 가능성을 동시에, 또 근본적으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어느 인격의 발전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현재에 의미있게 만들어진 언어이다.
이러한 시의 <여전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자신의 현존재의 기울어진 구석, 그 인간성의 기울어진 구석 아래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의 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시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분명히 개인의 모습이 지어진 언어이며 그 가장 내적인 본질상, 마주 대하고 있는 현재인 것이다.
시는 고독하다. 시는 고독하고 도상에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 그에 딸려 함께 가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시는 바로 그럼으로써, 말하자면 벌써 여기에서 무언가와 만나고 있는 – 비밀스레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는 어떤 다른 것을 향하고자 한다. 시는 이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곧 시는 상대를 필요로 하며 그것에게로 간다. 그리고 시는 그것에게 자기를 전한다.
다른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시에게 모든 사물과 사람은 다 이 <다른 것>의 모습이다.
시가 자기와 만나는 모든 것에 바치려 하는 주의력은 세세한 것에 대한, 윤곽에 대한, 구조에 대한, 빛깔에 대한, 또는 <경련>과 <암시>에 대한 더욱 날카로운 감각은, 이 모든 것은, 내 생각에는 나날이 더욱 완벽해지는 기계들과 경쟁하는 눈이 얻어 낸 성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시점을 모두 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집중이다. 벤야민이 쓴 카프카 연구에 나오는 말브랑슈의 말을 인용하면, <주의력은 영혼의 자연스런 기도이다>

시는 여전히 느껴 아는 이의 시, 현상에 얼굴을 향하고 있는 이의 시, 이 현상을 문제로 삼고 그것에 말을 거는 이의 시가 된다. – 이 얼마나 지당한 조건들인가! 시는 대화가 된다. – 그것은 때로 절망적인 대화인 것이다!
비로소 이 대화의 공간에서 말 걸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이름을 불러주는 나 주위에 모인다. 그러나 그 말 걸어진 것, 이름이 불리움으로써 말하자면 너가 된 것은 또한 저에게 있어서 다른 것을 이 현재 속으로 가져온다. 시의 지금 여기에서 – 시 자체는 늘 한 번 뿐이요. 개별적인 점인 이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 이처럼 직접적이고도 가깝게 시는 그 다른 것에게 가장 고유한 것, 곧 시대로 하여금 함께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물과 이야기할 때, 늘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함께 묻는다. 곧, 우리는 <열려 있으며><막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물음, 열린 곳, 비어있는 곳, 자유로운 곳을 가리키는 물음을 갖고 있다. – 우리는 넓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러한 곳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시가 있을 수 있을까?
시의 비유와 수식적인 표현을 가진 시가?

여러분, 내가 이러한 방향에서부터 이러한 방향 속에서라는 말을 가지고, 아니, 그런 시라는 말을 가지고, 아니, 그런 시라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나는 도대체 근본적으로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 있지도 않은, 그런 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시. 아니, 그것은 분명없다.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현실적인 시와 함께, 그 가장 요구없는 시와 함께 이러한 떨칠 수 없는 물음이, 이러한 들어본 적도 없는 요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유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번, 지금 여기에서만 한 번 그러면서도 늘 다시금 느껴 알아지는 것, 그리고 느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는 모든 수식적인 표현과 은유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마당인지도 모른다.

토피아의 탐색은 있을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탐색될 수 있는 것의 빛 아래, 유-토피아의 빛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피조물은?
이 빛 아래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물음인가! 이 얼마나 엄청난 요구인가! 이제 방향을 바꿀 때이다.

여러분, 나는 이제 끝에 와 있으며 다시 시작에 와 있다.
예술을 넓혀라! 이 문제는 옛날부터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으리으리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뷔히너에게 갔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나는 거기서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으며 나는 벌써 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뤼실르다운> 맞서는 말이엇다. 나는 무언가 대립적인 것을 내세우려 했고 반대하려 했다.
예술을 넓혀라?
아니, 이 예술과 함께 너의 가장 독자적인 좁은 곳으로 가라.
그리고 너를 자유롭게 하라.

나는 여기 여러분 앞에서도 이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하나의 원이었다.
예술은, 또는 메두사의 머리는, 기계주의는, 자동기계는, 섬뜩하고 그렇게 구별하기 힘든 것은, 결국 어쩌면 하나의 낯선 것에 불과한 그것들은 – 그 예술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두 번, 뤼실르가 <왕! 만세>라고 할 때와, 렌쯔의 발 아래서 하늘이 심연으로서 열렸을 때, 숨돌림이 거기에 있는 것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또, 내가 결국 뤼실르의 모습 속에서만 분명해졌던 그 먼 곳, 그리고 자리잡을 수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을 때도,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물과 인간에 바치는 주의력으로 열린 곳, 그리고 자유로운 곳에 가까이 다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토피아에 가까이 다달았다.

여러분, 문학은 소리높은 죽어야 함과 헛됨을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다시 한 번 짧게, 그러나 같은 것을 다른 방향에서 묻기 위하여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야겠다.
여러분, 나는 몇 년 전에 다음 네 행을 쓴 적이 있다.
<쐐기풀 우거진 길에서 나는 목소리들,
우리에게 손으로 오라.
등잔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사람만이
그것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다>
또 일년 전에 엥아딘으로 만나기로 했다가 못 만난 일을 생각하며, <렌쯔처럼> 한 사람이 산을 넘어가는 조그만 이야기를 적어 보낸 적이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1월 20일>, 나의 <1월 20>일에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과 만났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시에 관하여 생각할 때면, 시와 함께 그러한 길을 가는 것일까? 이 길은 단지 너에게서 시작하여 너에게로 돌아오는 길에 불과한가? 그러나 다른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도상에서 언어가 목소리를 갖게 된다. 그것은 만남이다. 그것은 느껴야 하는 너를 향하여 어느 목소리가 가는 길이다. 살아 잇는 것이 걸어가는 길이며, 아마도 현 존재가 자신의 윤곽을 그리는 것,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며 자신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전하는 것..일종의 귀향이다.

여러분 나는 끝으로 말하겠다. 내가 주어야 했던 악센트를 가지고 끝으로 나는 [레온세와 베나]에 관하여 말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 두 마디 말에 주의해야겠다.
나는 팔십 일년 전 프랑크푸르트 자우얼랜더 출판사에서 간행된 [게오르그 뷔히너의 전작품과 친필 유고의 첫번째 교열판]의 편집자 칼 에밀 프란쪼스처럼, 내가 여기에서 다시 찾은 동향사람 칼 에밀 프란쪼스처럼, 나도 라는 말, 지금은 라고 사용되는 <다가오고 있는 것>이란 말을 주의해서 읽어야겠다!
하지만 정작 [레온세와 네라]에는 이 말에다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내는 이 인용부호, 어쩌면 <>보다는 “ ”로써, 즉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인용부호는 없지 않았을까?

여기서부터, 그러니까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유토피아의 빛 아래에서, 나는 이제 토피아의 탐색을 해보려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길에서 만났으며 게오르그 뷔히너의 작품 속에서 만난 라인홀트 렌쯔와 칼 에밀 프란쪼스가 태어난 곳을 찾아나선다. 또 나는 내가 시작했던 곳, 거기에 다시 있는 셈이니까, 나 자신의 출발지를 찾아본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부정확하게, 지도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곧 대단한 일이 생길 것처럼 찾아본다.
그 아무 곳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곳은 없다. 하지만 나는 특히 지금, 그런 곳이 어디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 앞에서 이 불가능한 길, 이 불가능한 것에로의 길을 갔던 것에 대하여 조금 나를 위안해 주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나를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 또 시처럼 만남으로 이끄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무언가 – 언어처럼 – 물질적이지 않은 것, 하지만 지상의 것, 땅에서 사는 것, 무언가 원형인 것, 두 극을 지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 그리고 동시에 – 경쾌하게 – 수식적인 표현조차도 무효로 만드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하나의 자오선을 발견한다.

나는 방금 여러분과 게오르그 뷔히너와 그리고 헤센지방과 더불어 그것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