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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술!> 여러분도 아다시피, 나는 까미유의 이 말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철저히 의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악센트를 둘 수 있다. 즉 오늘날과 관련하여 악센트를 둘 수도 있고, 역사적인 것 또는 문학사적인 것과 관련하여 둘째 악센트를 둘 수 있으며, 영원한 것이라는 장음부호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나는 악센트를 둔다.
예술은 -<아, 예술>은 변화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술은 [당통의 죽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또한 [렌츠]에서도 곁줄거리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식탁 저편에 렌쯔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문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만들어진 것이 생명을 갖고, 이 둘을 넘어서 그것이 예술작품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느낌..>
나는 여기서 두 문장만을 뽑았다 – 여러분은 여기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 이것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문학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 대목은 앞서 [당통의 죽음]에서 인용된 대화와 함께 읽어야 한다. 여기에는 뷔히너의 미학적 개념이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부터 사람들은 뷔히너의 렌쯔 단편을 떠나 [연극에 대하여]의 저자 라인홀트 렌쯔에게 다다르고, 다시 그를 넘어, 즉 역사 속의 렌쯔를 넘어 계속해서 문학적으로 그렇게 풍부한 <예술을 넓혀라>라는 메르시예의 구호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전망이 열린다. 여기에는 자연주의가 있고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앞서 나타나 있으며 또한 뷔히너문학의 사회적 정치적 뿌리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러분, 내가 그것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 잠시나마 나의 양심에 위안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예술과 관련되어 있을 성 싶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다시 나의 양심을 불편하게 한다. –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난다.
나는 [렌쯔]에서도 그것을 찾는다. –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렌쯔, 그러니까 뷔히너는 <아, 예술>, 즉 <이상주의>와 <꼭둑각시나무인형>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말을 말한다. 그는 그것들에 반대한다. 이어서 <보잘 것 없는 것의 생명>,<경련>, <사>, <매우 섬세하고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표정> 등에 반대하여 자연스러운 것, 인간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예술관을 한 체험을 통해 보여준다.
<어제 그 골짜기 옆으로 올라갔을 때, 나는 바위 우에 두 처녀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 한 처녀는 머리를 땋아 올리고 다른 처녀는 그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처녀는 금발을 드리우고, 창백하고 진지한 얼굴은 무척이나 젊었으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처녀는 친구를 무척이나 세심하고 돌봐주고 있었다. 옛 독일 학교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내적인 그림도 이런 생각을 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이런 모습을 돌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메두사의 머리라도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한다.>
여러분, 주목하기 바란다. <사람들은 메두사의 머리가 되고 싶어한다> 예술을 수단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여기서 <사람들이 되고 싶어한다>는 물론 <내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인간적인 것을 향하고 있는 섬뜩한 분야 – 그 속에 원숭이의 모습, 자동기계 그리고 동시에.. 아 또한 예술이 자리잡고 있는 듯한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역사 속의 렌쯔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뷔히너의 렌쯔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뷔히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무언가 섬뜩한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악센트를 주었었다. 나는 – 여러 물음 중의 하나인 – 예술과 문학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뷔히너 자신의 물음을 찾아내려고 그에게 다가 갔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뿐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속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알고 있다. 발레리오의 <쩡쩡 울리는 소리>를 못들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자주 나타난다.
그것은 분명 오래된 어쩌면 가장 오래된 섬뜩함일 것이다. 뷔히너의 목소리가 나를 그렇게 추측하도록 한다. 내가 오늘 이렇게 고집스럽고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은 분명 공기 중에, 우리가 숨쉬어야만 하는 그 공기 중에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물어봐야겠다. – 뷔히너에게서, 이 인간적인 작가에게서, 어쩌면 단지 반만 들리게 하는, 어쩌면 단지 반만 의식적인 그러나 그 때문에 덜 근본적이라고 할 수 없는 – 또는 바로 그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에서 근본적인 예술에 대한 문제제기, 이러한 방향에서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문학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반드시 그리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그러한 문제제기가 아닐까? 다시 말해서, 빠뜨린 몇 마디 말을 하자면, 지금 곳곳에서 그렇게 하듯이,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또 무조건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예술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해도 좋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헤서 우선적으로 – 대개- 결국 말라르메를 생각해야 할까.
나는 좀 앞질러 갓따. – 충분히 멀리는 아니라는 걸 나도 알지만 – 좀 멀리 나아갔다. 나는 다시 뷔히너의 [렌쯔]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식탁 저편에서> 렌쯔가 <기분이 좋아져서> 말한 삽화적인 대화로 돌아간다.
렌쯔는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진지하게> 그리고 이제 그 대화가 끝나자, 그에 관하여, 그러니까 예술의 문제에 몰두한 사람이며 동시에 예술가이기도 한 렌쯔에 관하여, <그는 완전히 자기자신을 잊어버렸다>고 쓰여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며, 곧 그 자신에 관한 말을 읽으며 뤼실르를 생각한다. 예술을 마음 속에 두고 생각하는 사람은 – 여기 {렌쯔} 소설에서 –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예술은 나와 – 먼 것을 만들어낸다. 예술은 여기 어떤 일정한 방향에서 일정한 거리, 일정한 길을 요구한다.
그러면 문학은? 예술의 길을 가야만 하는 문학은? 그렇다면 여기에도 실제로 메두사의 머리와 자동기계로의 길이 주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빠져나갈 길을 찾지 않겠다. 나는 렌쯔 단편에 주어져 있는 그 방향과 같은 방향에서 –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좀 더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어쩌면 – 나는 물을 뿐이다. – 어쩌면 문학은 예술처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나와 더불어 그 섬뜩하고 낮선 것을 향해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 어느 곳에? 무엇과 함께? 또 무엇으로서? – 다시금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은 문학이 지나쳐야 할 길일 것이다.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다른 지름길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문학도 때로는 우리를 앞서 같다. 문학, 그것도 우리의 길을 앞질러 간다.
나는 예술에 몰두하는 사람이나 예술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에게서 떠난다. 나는 뤼실르에게서 문학과 만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뤼실르는 바로 언어를 모습이요, 방향이며, 숨이라고 알고 있었다. – 나는 여기 뷔히너의 이 문학에서도 같은 것을 찾는다. 나는 문학의 마당을 위하여, 자유롭게 자리잡을 마당을 위하여, 한걸음 나아갈 마당을 위하여 그의 모습을 찾는다.
여러분 뷔히너의 렌쯔는 하나의 단편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존재가 어떤 방향을 갖고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역사 속의 렌쯔를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짐이었다. – 그렇게 그는 살아갔다. ..>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문학은, 뤼실르처럼, 그 방향에서 모습을 보려 한다. 문학은 앞질러 같다. 우리는 안다. 그가 무엇을 향하여 살았는지를, 그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갔는지를 안다.
1909년 라이프찌히에서 발간된 – 로사노프라는 모스크바 대학의 강사가 쓴 – 야콥 미하엘 라이홀트 렌쯔에 관한 책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구원자로서의 죽음은 자기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1792년 5월 23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렌쯔는 모스크바의 한 거리에 죽은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어느 귀족이 낸 비용으로 묻혔으며,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그는 살아갔던 것이다.
그 진정한 렌쯔, 뷔히너의 렌쯔, 뷔히너다운 모습, 우리가 소설의 첫 장에서 느껴 알 수 있었던 살아있는 인간, <1월 20일 산을 넘어가고 있던> 그 렌쯔 – 예술가요 예술의 문제에 몰두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나로서의 그.
우리는 지금 어쩌면 낮선 것이 있던 마당,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의 – 낯설어진 – 나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마당을 찾은 것일까? 우리는 그 마당을, 그 나아가는 한 걸음을 찾은 것일까?
<.. 때로 자기가 머리로 걸을 수 없다는 것만이 언짢게 느껴졌다> - 이것이 그 렌쯔다. 이것이 그와 그의 나아가는 걸음이며, 그와 그의 <왕 만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로 자기가 머리로 걸을 수 없다는 것만이 언짢게 느껴졌다.> 여러분, 머리로 걷는 사람은 하늘을 심연으로서 자기 밑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 오늘날 문학은 그 어두움에 대하여 비난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여기서 직접 빠스칼의 말을 인용하려 한다. – 여기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열려 보이지 않았던가? – 얼마전에 나는 그것을 레오 쉐스코프의 책에서 읽었다. 즉 <우리는 명료하지 않다고 비난하지 마라. 그것을 우리는 자랑으로 여기니까.> 나는 그것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어떤 만남을 위하여 – 어쩌면 그것이 스스로 그려넣은 – 먼 것 또는 낮선 것에서부터 나와 문학에 따라다니는 어두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한 방향 속에 두 가지의 낮선 것이 – 나란히 붙어 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