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첼란 - 게오르그 뷔히너 상 수상 여설 여러분! 예술은 꼭두각시 격이나 운을 맞추는 – 이러한 특징은 그리이스 신화의 피그말리온과 그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밝혀진다. 무모한 것이라고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예술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감옥에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어느 방에서 벌어지는, 우리가 느끼기에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어 오지 않으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어 온다 예술은 다시금 나온다. 예술은 게오르그 뷔히너의 문학작품 보이첵에서, 무엇보다도 이름없는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 모리츠 하이만의 [당통의 죽음]을 비꼬는 말을 이리로 끌어 온다면 - <흐릿한 번개불>에서도 다시금 나온다. 이와 똑 같은 예술은 이 전혀 다른 시대에도 등장한다. 장터에서 큰 소리로 손님을 부르는 상인에 의해 내세워져, 이제는 그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던 때처럼 <불타는 듯한><용솟음치는> 그리고 <빛나는> 예술작품과는 관계없이, 하잘 것 없는 인간 옆에 그리고 이 인간이 걸치고 있는 아무것도 안 옆에 – 예술은 이번에는 원숭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똑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것이 입고 있는 <윗도리와 바지>로 곧 다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예술은 – 또 다른 뷔히너의 문학, [레온세와 레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기에서는 시간의 조명을 다시 알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는 <낙원으로 도피하는> 중이며, <모든 시계와 달력>은 당장 <깨부수어지거나 금지되어야 한다> - 그렇지만 그 전에 <남녀 두 사람>이 이끌려 나오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두 자동기계가 도착한다>, 그리고 자기는 <어쩌면 남녀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제 삼의 인간>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 사람이 나타나 <쩡쩡 울리는 소리>로 울한테 눈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 <예술과 기계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 두꺼운 종이 때기와 시계의 태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 눈을 크게 뜨고 보라고 재촉한다. 예술은 여기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대단한 패거리와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예술이 그와 같은 것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똑 같은 예술, 우리가 이마 알고 있는 예술이다. – 발레리오, 그는 그것을 널리 알리는 사람에 불과한다. 여러분, 예술은 또한 예술에 속하는 모든 것, 또 예술에로 다가오는 모든 것과 함께 하는 하나의 문제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아다시피 변화가능한, 질기게도 오래 살아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까미유, 그리고 오로지 그 죽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인간 당통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즉 예술에 관한 것은 좋은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러나 예술에 관한 말들이 오고 갈 때마다 늘 거기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잇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듣고 귀를 기울이고 쳐다보고.. 하는데 그 말이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쳐다본다>, 그는 말을 느껴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그리고 또 – 여기 이 문학의 분야에서 누가 그것에 의심을 품을 수 있을까? – 그리고 또 방향과 운명을 뜻하는 숨을 느껴 아는 것이다. 그는, 여러분도 벌써 알고 있겠지만, 그렇게도 자주 인용되는, 아니 뜻밖에도 그다지 자주는 인용되지 않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해마다 새로이 다가온다. – 그는 뤼실르이다. 이야기 도중에 무언가가 끼어들 때는 사정이 없는 법이다. 우리는 혁명의 광장에 도착한다. <마차가 와서 멈춰선다>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이 모두 거기 있다. 당통, 까미유, 그 밖에 다른 사람들. 그들은 모두 여기에서도 말, 곧 재치있는 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뷔히너를 인용하면, 함께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한 말이다. 파브르는 심지어 <이중으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들 최상의 컨디션이다. –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몇몇> - 이름없는 - <사람들>만이, 그 모든 것들이 <벌써부터 거기 있었으므로 권태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장이 난 여기에서, 이 지루한 순간에 까미유는 – 아니, 그가 아니라, 그 자신이 아니라, 함께 타고 온 어떤 사람이 – 그 까미유는 극적으로 운에 맞춰 죽으려 한다. 우리는, 그에게 낯선 – 그에게 그렇게도 가까운 어떤 말로부터, 두 장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까미유 주위에서 비장하고 단호한 문장은 <꼭둑각시>와 <철사줄>의 승리를 보증하고 있다. 이때 뤼실르가 거기 있다. 예술을 볼 줄 모르는 그, 언어에 개인적인 어떤 것, 느껴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따고 생각하는 바로 그 뤼실르가 갑자기 <왕 만세!>를 외치며 거기 또 다시 있는 것이다. 단두대 위에서 말하여진 모든 말들을 이어서 – 이것은 얼마나 기가 막히는 말인가! 그것은 맞서는 말이다. 그것은 <철사줄>을 끊어내는 말, 더는 <역사의 사열말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몸을 굽히지 않는 말이다. 그것은 자유의 행위이다. 그것은 나아가는 한걸음이다. 사실 그 말은 – 이것이 내가 지금, 그러니까 오늘 거기에 대해 감히 말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전혀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르는데 – 처음에는 <구체계>를 신봉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 페터 그롭폿킨과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책들과 함께 자란 사람에게 이것을 분명히 밝히도록 허락해 주길 바란다 – 여기에서는 어떤 왕정이나 보수반동적인 어제의 누구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적인 것의 현재를 위하여 증언하는 고귀한 부조리에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것에 의심의 여지없이 확정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
09 |
한용국 시인 평론, 書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