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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시인 산문, 幻

길이 끝나는 곳에서

by 목관악기 2007. 11. 11.




1.

와도 온 자리가 없고 가도 간 자리가 없으니 이 법을 일러 무엇이라 하겠는가. 범어사 경내를 걷고 있을 때, 홀연히 떠오른 구절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다. 와도 온 자리가…가도 간 자리가..그 구절은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음직하게 아름드리 곧게 뻗은 소나무 둥치에 내려앉거나 간간히 자리잡은 푸른 대나무숲 사이에 또아리를 틀기도 했다. 하늘 전체가 종이야!라던 H시인의 말처럼 경내를 거닐던 내내, 處處가 화두였다. 게다가 이 범어사는 나로서는 처음 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낮설지가 않았다. 여기저기 거닐거나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관람객들도 예전에 어디선가 본 사람들 같았으며, 법당 건물들이며, 앞으로 완만하게 늘어선 산세와 녹음이 분명히 내가 여기 언젠가 왔었다는 느낌을 주고 있을 정도로 친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한다던가. 여기 어릴 적에라도 내가 와 본적이 있었던가. 어떤 기억의 갈피에도 범어사는 없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내내 머릿 속을 구르던 생각 하나가 툭 눈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어쩌면 내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닐까. 그 생각은 한 후배의 소설을 읽으면서 떠 올린 것이었지만, 내내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이후부터 삶이 멱살 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하던 나는 휴가를 낸 뒤, 떠날 것을 결심했고, 여기 범어사는 그 여행의 마지막으로 정해놓은 곳이었을 뿐이다.

삼일 전 S의 집에 도착하는 것이 여행의 첫번째 종착지였다. 거의 예고 없는 출발이었음에도 그는 흔쾌히 맞아주었다. 그는 내 생애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도움 입은 바 적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 친구에게 도움될 만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 존재 그 자체일 뿐 그 외에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가 꼼꼼하고 치밀한 반면, 나는 덜렁거리고 산만한 편이었으므로. 결혼 육년 차, 아직 아이 없음. 몇 개 방송국의 프로듀서를 거쳐, 정말 느닷없는 중국 유학, 그리고 지금은 느닷없이 유학원을 개업하고 있으면서, 다큐 집단에 제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개업은 삼사개월 되었지만, 그가 관계했던 사람의 느닷없는 동업의 파기로 인해서 약간의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었다. 늦은 도착이었으므로, 부인과의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마련해 준 방에 누웠다. 함께 온 M은 몸이 조금 좋지 않은 상태였고, 게다가 오랜 버스의 일렁거림에 지쳤는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B시의 밤은 무더웠고 더위에 약한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꿈과 의식 사이를 오고가는 혼몽 속에서 뒤척이는 시간이 꽤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물을 마셔야 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은 더위와 어둠이 희부윰하게 섞여, 마치 안개 속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어둠을 멍하니 응시했다. 너는 도대체 여기 왜 온 것이지? 왜? 왜? 마치 선문답에 걸려버린 사람처럼 머릿 속은 그 질문으로 가득했다. 물론 사소한 이유들은 몇 가지 있었다. 여행 기간 동안,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숙식은 즈음의 내 경제사정을 볼 때, 충분히 비용절감의 효과가 있기도 했고, 오랜만에 친구와 정담을 나눌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너무 민감해져 있는 탓일 수도 있었다. 한 두 번 최종심에 오른 내 시들은, 답보상태에서 질척거리고 있었고, 일을 줄이면서까지 논문준비를 시작했으나, 도서관의 서가 사이만 왔다갔다할 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어딘가 낮선 곳에서 그 간의 생활을 점검해 볼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가 불을 켰다. 물 한잔을 꺼내 들고, 식탁에 앉았다. 깊은 밤, 텅 빈 부엌의 식탁 위는 뭔가 알 수 없는 공복감을 일으키는 장소였다. 무언가 한 상 차려졌을 때와는 달리, 제 용도를 잃고 텅 비워진 갈색 목제 식탁 위의 유리가 빛 속에서 내 얼굴을 반사해 주고 있었다. 갸름한 턱에 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고, 그 얼굴 조금 위쪽에 검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라고 그 눈빛이 묻고 있는 듯했다. 글쎄, 나도 몰라. 하지만 이런 질문은 너무 고전적인 것 아냐?라고 내가 대답하자, 유리 속의 얼굴은 약간 찌푸려졌다. 그럼 이런 질문은 어때? 너는 어디서 왔지? 다시 눈동자가 물었다. 지금 선문답 하자는 건 아니겠지? 너는 언제나 그 따위 질문 밖에는 할 줄 모르는건가? 이번에는 유리창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씨이팔! 너는 누구지? 어디서 왔지? 이번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다시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잠들어야 했다. 피로한 상태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터였다.

2.

깨어보니 이미 오후였다. 피로 탓이었을 것이었다. M과 함께 S의 부인이 차려준 식사를 마쳤을 무렵, S가 들어왔다. 자 가자구! 해변으로 가야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나도 자네 온 핑계 삼아, 앞으로 이틀은 휴가야! 역시 그는 언제나 쾌활하면서도 꼼꼼했다. 이미 해변으로 가기 위한 모든 준비는 갖추어져 있었다. 파라솔과 돗자리, 약간의 과일을 담은 아이스박스, 내가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그는 따로 수영복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꼼꼼해. 내가 이렇게 말하자, 응, 자네를 친구로 두려면 그렇지 않으면 안되! 하하. 하고 맞받았다. 몇 개월 전에 구입했다는 그의 승용차를 타고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해변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인산인해였다. 이곳은 해변으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고, 이 무렵이면, 연일 최고치의 인파로 뉴스에 오르락거리는 장소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섬주섬 돌아다니다가 다행히도 파라솔을 꽃을 장소를 찾아 돗자리를 폈다. 해변에는 온통 파라솔 천지였다. 이미 관공서와 협의하에, 해변을 사서 파라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구역을 나누었는지. 파라솔들은 푸른 색 다섯 줄, 노란 색 다섯 줄 이런 식으로 각각 다른 색들로 펼쳐져 있었다. 여름엔 모래도 부동산이군. 꼭 해변의 서울을 보는 거 같아. 내가 중얼거리자 S가 핀잔을 주었다. 누가 보따리 장사 아니랄까봐, 삐딱하긴! 그럼 자네는? 누가 한 때 방송쟁이 아니었달까봐, 벌써 구도잡어? 우리가 낄낄거리자. 그의 부인이 이죽거렸다. 피 지들끼리 잘난 척 하기는, 못 말려! M은 벌써 흥분해 있었다. 형아! 얼렁, 수영하자! 응! 응!

튜브를 빌려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한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서로 엎어뜨리고 자빠지고, 몰려오는 파도를 타며 소리를 질러댔다. S도 나도 어린 아이처럼 낄낄거리며 첨벙거렸다. 가장 즐거운 것은 M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완고했던 어머님 탓에 그녀는 한 번도 해수욕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통통 튀어다니고 물 속에 잠겼다 떠올랐다 하며 쉴 새 없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떠나기 이 삼 주전부터 급속히 냉각되어 가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의 삶의 스타일을 힘겨워 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은 내가 한동안 겪고 있던 침체와 조바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힘겨워 했으며, 나도 한 동안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녀 뿐만 아닌 모든 주변을 팽개쳐 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독설을 퍼부었고, 그녀는 냉담한 침묵과 차가운 말로 응수하는 날들 끝에 어설픈 화해에 도달하긴 했지만.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도 내내 그녀는 특유의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무덤하게 있을 뿐이었다. 나도 지쳤어. 이제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거야.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를 달래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조용히 옆에서 그러나 내내 어쩔 줄 몰랐었다. 그녀는 지금 바다 앞에서 마구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웃고 있었고, 나는 가슴 속에서 뭔가 기쁨과 행복감 같은 것이 뿌리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스물 네살의 여자, 음악과 현실 사이에서 가끔은 불안해 하는, 문득 그녀의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의 맑은 옥타브와 기쁨에 넘쳐 출렁거리는 바다의 합주.

나는 잠시 바다에 관한 상념에 잠겨 들었다. 대부분 혼자였다. 해변이 있는 도시로 밤새도록 열차에 시달리며 덜컹거리다 이른 아침의 바다를 만나곤 했었다. 정작 거대한 대형화면처럼 푸른 장막이 쳐진 바다에 서면, 정작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다는 글쎄, 거대한 무의 덩어리랄까. 그도 그럴 것이 열차의 난간과 좁은 좌석 사이를 웅크려 있으면서 이미 머릿 속에 엉켜있던 실타래는 다 풀어져 버린 다음이었으니. 푸른 바다는 공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허 앞의 모래사장을 망연자실 혼자 걷고 있다가, 이른 아침의 해장국을 몇 술 뜨고 해변 도시를 거닐다가 돌아오곤 하는 게 바다여행의 전부이곤 했다. 어린 나이 때는 감상에 젖어, 우연한 만남 같은 것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법이다. 그래도 꼭 일년에 한 두번은 다녀오곤 했었고, 돌아 온 뒤에는 좀 더 일이나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되고는 했다.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나는 중얼거렸다. 삶에 대한 집중, 삶에 대한 집중. 어쩌면 나는 삶에  미친 듯이 몰두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자꾸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 일도 연애도 공부도 창작도 모두 어딘가 어긋나고 있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왜 서른 둘의 나이에, 한창이라는 그런 나이에.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과일을 깎던 S의 부인이 어깨를 툭 쳤다! 뭐야, 형은 이 북적거리는 통에도 생각에 빠져 있는거야? 형은 사소한 일에 너무 진지한 게 탈이야! 여기서만큼은 즐기라구! 형이 좋아하는 쭉쭉빵빵인 여자들도 좀 보면서. 아, 짜증나. 나도 학부시절에는 한 몸매 했는데말야. 형, 기억나?  

3.

그랬다. 지금은 S의 부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한 학번 아래인 우리과의 후배였다. 그녀의 말처럼, 귀여운 얼굴에 미끈한 다리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미녀의 축에 들었었고, 기숙사에서는 외모에 어울리는 귀여운 행동으로 인해, 동기들과 후배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누리는 편이었다. 그녀와 나의 만남은 꽤 느닷없는 축에 속한다. 휴게실에서 처음 만나 과의 선후배라고 서로가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고 나서는 커피를 뽑아 들고, 자리에 앉은 직후부터 우리는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와 나 이렇게 셋은 그 시간부터 점심시간까지 게임에 수다를 떨었고,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만나 저녁을 먹을 때까지 또 게임과 수다를 떨어 댄 후에야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여자 후배들 중 가장 친한 후배가 그녀가 되어 버린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녀와는 그렇게 한 일년 정도를 친하게 지냈으며, 가끔씩 만나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술을 마시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기숙사에 남았고, 그녀는 학교 부근에 자취방을 얻어 나감으로써, 잠시 멀어졌지만, S가 복학한 후, 그녀가 S와 연인관계가 되면서, 내가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될 때까지 이번에는 셋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어떻게 보면 나에 관해서, 혹은 내 사생활들에 관해서라면, S이상으로 그녀가 더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S의 차는 어느 새 K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도시는 전체가 하나의 유적 덩어리인 도시였다. 기와집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능이 임산부의 배처럼 솟아 있었으며, 여기저기 옛 절터가 있었고, 어느 산에는 불상들이 아무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듯 널려 있는 곳도 있었다. 겨울에서 봄 사이에는 황사바람이 심한 도시이기도 했으며 여름에는 아래쪽의 B시나 D시 이상으로 무더운 도시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거대한 관광단지가 있어서, 우리는 먼저 그곳을 둘러 보기로 했었다. 인공 연못에서 잠시 서 있다가는 우리는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차에 오르고 말았다. 정말 살인적인 더위였다. 아무래도 여길 택한 것은 잘못이었던 것 같아, 그래 너무 덥긴 하군,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내게는 꼭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십년 전쯤에 한 번 혼자 들러 보았던 절이었다.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절이었고, 그 곳에는 신라시대의 건축물인 탑 두개가 서 있었다. 전설이 어려있는 그 두 탑은 한 사람이 설계했지만 두개의 전혀 다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탑이었다. 각각은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ㄷ탑과 ㅅ탑, 약 십년 전 쯤 나는 그 탑들 중 하나를 오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구렁이 한 마리가 탑신을 휘감고 있던 ㄷ탑, 그것이 환영이었음은 분명했지만, 분명히 나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몸에 얼비쳐서 얼룩덜룩한 구렁이 한마리가 탑의 기단에 꼬리를 드리우고, 탑의 맨 첨탑까지를 휘감고 있었다. 그때 나는 끝없이 내 눈을, 그리고 내 정신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거기에는 구렁이가 있었다. 그 후, 나는 오래도록 그 절에 가지 않았다. 기회가 있었지만, 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왜 지금 새삼스레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여행을 B시로 택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몰랐다. 우리는 어느 새 ㅂ사의 앞에 도착해 있었고, 입장권을 구입하고는 산사의 문으로 들어섰다. 탑까지 가기에는 연못을 지나쳐야 했다. 연못은 짙은 녹색이었고, 그 속에는 방생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잉어와 거북이들이 노닐고 있었다. 이미 방생은 원래의 형식과 의미에서 많이 벗어난 불가의 관습이었다. 말만 방생일뿐, 방생된 물고기나 거북이들은 곧 어부라든가, 방생을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 사람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방생되고는 했다. 영원히 같은 곳에서 방생되고 다시 잡히는 일의 반복에 희생되는 어류들, 어쩌면 나도 잘못 방생된 어류일지도 몰라. 방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S에게 말을 건네자. 우리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맞받았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쳐 지났다. 출입 통제된 두개의 긴 돌계단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올라가야지만,  두개의 탑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막 그 길로 접어들 무렵, S의 부인이 내게 말했다. 형! 전에 형 혹시 혼자 여기 다녀가지 않았어? / 응, 그걸 네가 어떻게?/ 그게 아마 내가 이학년 2학기 쯤이었을거야. 기말고사를 일주일쯤 앞두고 갑자기 형이 나 시험 포기한다. 그러더니 홀연히 사라졌었지. 하지만 형은 이틀 만에 돌아와서 정상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시험을 치렀지, 하지만 시험기간 동안 내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내내 우울한 얼굴이었지. 기말고사가 끝난 뒤 종강파티에서 형은 엉망으로 취했었지, 그때 내가 형 옆자리에 있었거든, 그때 형은 거의 코마 상태에서 내게 여기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말라고, 두개의 탑 중 하나에서 구렁이를 보았다던가 하면서 무섭다고 무섭다고 중얼거렸지. 하도 희한한 얘기라서, 한동안 잊혀지질 않았어. 여기 오니까 문득 그 생각이 나네. 그때 정말 뭘 보긴 본거야? 그녀는 잊었던 일을 아주 빠르게 상기시키는 어조로 말했다. 글쎄…내가 그랬던가? 취해서 헛소리했겠지. 나는 슬쩍 얼버무리고 있었다.

4.

탑은 여전했다. 여전히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을 자랑하는 D탑과 간결하고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S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찬탄과 경외 혹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둘러 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긴 회랑과 떠받친 기둥들과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북은 사람들의 포즈에 맞춰 이런 저런 배경이 되어 함께 서 주곤 했다. 두 탑의 배경이라면 단연코 하늘이 우선이었다. 그럴만큼 탑은 높고 조금 거룩하게 거대한 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특히 탑을 모두 사진 속에 담기 위해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거나 아니면 좀 멀리 서서 찍어야 했다. 관광객들이 들고 오는 사진기래야 작은 소형카메라가 전부였으므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마 인화된 사진 속의 배경의 푸른 하늘 속에서는 어쩌면 두 탑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을 법이기도 했다. 한나라 천년의 흥망성쇠를 긴 세월 동안 담담히 부식을 견디며 지키고 있는, 어쩌면 사람의 한 생, 그 사람이 모여 이룬 나라의 한 생, 아니 이 우주의 윤회까지도 가리키고 서 있는 거대한 손가락이랄까. 작은 카메라 렌즈가 오히려 그 세월과 윤회를 담아내듯이, 사람의 작은 두 눈으로도 그것을 볼 수 있기도 할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나는 오래 망연자실 탑 앞에 서 있었다. 전에 탑을 휘감고 있던 얼룩무늬의 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비록 무늬가 아니라도 그 탑은 이미 화려한 무늬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 조각과 선 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가슴 속에 색감을 아로새겨 넣고 있기도 했다.  

내가 그때 본 뱀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이후로 자주 무의식적으로 떠오르곤 하던 선문답의 화두 같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엄습해 오는 것은 다만 두려움이었다. 알 수 없이 무서웠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다. 하여 나는 그 질문이 일어날 때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유흥들에 몸을 내맡기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질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혹은 일 속에서 혹은 책 속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스며들어 있었고, 결국 나는 모든 일에서 불안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타인들이 보기에는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깨지기 쉬운 유리턱처럼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그것은 환상이었던가 아니면 실상이었던가. 바로 가서 다시 보고 오면 될 일이었지만, 끝내 십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오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그 어느 쪽 도 아니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마음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그 뱀은 결국 나 자신이었을 것이므로, 환이든 실상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하필이면 뱀의 형상이었고, 관습과 어울려 충분히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과연 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상징들을 찾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그대로 두었다. 어느 새, 나는 그 두려움을 즐기게 되었고,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경내를 돌았다. 작은 법당들을 여기저기 다니고, 건축양식을 점검해 보고, 일본인 관광객들의 이젠 친숙해진 일본어도 들으면서 돌계단과 회랑을 걸어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뒤, 다시 한 번 두 탑 앞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내려가는 길 위에 있었으므로, 한 번 더 봐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문을 지나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ㅂ탑이었으므로, 다시 몇 걸음 옆으로 돌아가 ㅅ탑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또 다시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예전에 ㅂ탑에서 본 얼룩무늬의 긴 뱀이 이번에는 ㅅ탑을 서서히 휘감아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처음의 얼룩무늬가 꼭대기 첨탑으로 올라갈수록 무늬가 옅어져서 아예 사라져 없었던 것이다. 아래는 진하고 서서히 옅어지면서 끝내 아무런 무늬도 없어진 가늘과 긴 뱀 한마리가 ㅅ탑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본 것을 나는 친구에게도 후배에게도 m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뱀을 바라보면서 나는 M에게 물었다. 넌 어느 쪽 탑이 아름답니?/ ㅂ탑이 훨씬 아름답고 좋은 걸/ 그래 / 그런데 그건 왜?/ 응, 나도 예전에는 ㅂ탑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보니까, ㅅ탑이 훨씬 아름답게 보이네. 왜 그럴까. 저 단순하고 간결한 탑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니. 이상하지?

5.

범어사를 되돌아 나오는 길은 짧았다. 나는 그 길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범어사의 일주문 밖은 트인 공간이어서, 장사치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여기저기 판을 벌려 놓았고, 계곡에서는 바위 위에 드러누운 사람들이며, 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일주문을 지나서 몇 걸음을 걸어 오른 뒤에는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경계를 나누어 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출세간과 세간이랄까. 하는 아주 묘한 기운이었다. 몇 걸음 옮긴 그 자리부터는 세간의 어떤 소란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기운이 길에 깔려 있었다. 그 느낌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 거기서부터는 동이 굵은 소나무들이 휘어지거나 누운 채로 자라고 있어, 어떤 것은 돌로 받침대를 고아놓고 있기도 했다. 걸어 내려가다가 막 그 기운이 느껴지는 자리에 도달했을 때, 이상하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한 걸음도 내딛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여기서 뭔가 느껴지지 않아?
뭐?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있어, 어떤 경계 같은 거 말야
나 참,

친구가 말했다.

머리 깎고 중 되더니, 이제는 선문답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군. 저 아래 사찰을 어지럽히는 관광객들 보기 싫다는거지? 알았어, 우리는 그만 갈게. 이제 들어가, 현법스님!

현법스님?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친구는 분명히 내게 현법스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현법이라니, 현법, 그렇다면 내가 승려라는 말인가? 나는 황망히 내 옷차림을 살펴 보았다. 이럴 수가 내 옷에는 먹물 든 승복이 걸쳐져 있었고,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건가 싶어, 다시 머리를 만져 보았다. 한 줌의 아니 한 올의 머리카락도 잡히지 않는 민머리였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구운몽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만지니 갓 깎은 머리털이 가칠하였다’는 말 그대로 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출가한 승려라는 말인가? 내 이름은 Y가 아니라 현법이고? 도대체 어디서, 왜? 놀랄만한 상황이었다. 다시 나는 친구와 아내인 후배, 그리고 S를 보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도 없었던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후배의 손에 이끌리고 있었고, M은 더 이상 스물 네살이 아닌 어딘가 세월이 묻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찾아 온 친구 부부와 S를 범어사에서 배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친구에게 물었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친구는 조금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내게 그간의 정황을 말해 주었다. 나는 오년 전, 친구의 집을 S와 느닷없이 찾아갔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끝에, 범어사에 들렀지만, 바로 오늘처럼, 경계 타령을 해대면서, 왠지 내려가기가 싫다고, 하루 더 혼자 묵겠다고 막무가내 고집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무 시에 아래 정류장으로 오라는 약속을 했다. 하도 내가 억지를 부리는 탓에 친구는 결국 M을 데리고 집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약속한 장소에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란 그들은 민박집을 탐문했으나 도무지 나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으며 범어사에 가서 승려들에게 물어보아도 그 날 출가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틀을 더 헤매다가 친구 부부와 헤어진 M은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 온 뒤 그녀는 한동안 나의 본가에 연락을 취해 보았으나, 그 이후로 나는 집에조차도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나의 어머니는 출가했나보다고 잊으라고 오히려 그녀를 달랬다.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그녀, M과 나는 자주 다투고는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근 6년 동안 도무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집에서조차 궁금해 하지 않으니, 그녀로서는 실종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그녀 S는 이제 31살이 되었으며, 뮤지컬 배우로 활동중이며 독신이었고, 친구는 유학원을 그만두고는 다큐피디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육년이 흘렀고, 어느 날 여름 바로 그 무렵에 내가 느닷없이 친구 부부에게 연락을 취했고, 놀란 그는 다시 M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복에 민머리가 되어 나타난 나는 느닷없이 그간의 정황도 이야기 하지 않은 채, 예전의 그때처럼 잠시 해수욕을 즐겼고, 느닷없이 ㅂ사에 가자고 했고, 다시 친구의 집에서 묵은 후, 바로 그 자리인 이 범어사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금 자신은 여기 범어사 선방에서 하안거를 막 마쳤다고 곧 떠나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말 느닷없는 일이, 소설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 있었다. 승려라니, 6년이 지나버렸다니!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그 6년 동안 나는 어디서 무얼했다는 말인가. 그 6년의 기억을 도무지 떠올리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친구와 후배 부부와 M은 오히려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마치 지난 밤 자기가 꾼 꿈을 기억해 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나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처음 범어사에서 느꼈던 느낌, 기시감이라고 생각했던 그 느낌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낯설지가 않았다. 관람객들, 그 중 하나는 너무도 친숙했다. 불상들, 지금 앞에 보이는 완만한 산세와 유독 짙푸른 녹음. 그렇다면 그 날 나는 범어사로 출가했으며, 행자 생활을 하고 승려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는 것인가. 문득 떠올랐던 화두,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간 곳이 없다는 그것은 내가 참구하던 화두였다는 것인가.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6.

혼란을 견딜 수 없어 하는 나를 친구는 계단에 잠시 걸터 앉게 했다. 잠시 앉아서 대숲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6년을 뺀 나머지를 일단 요약해 보았다. 어린 시절 나는 스님의 손에 이끌려 큰 절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십년, 그러니까 대학졸업할 때까지, 그 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 절에서 나온 후, 다시 십년, 서른 두살이 되던 해까지,를 직장과 대학원을 병행해서 다녔으며, 마지막 기억하던 시점에 나는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교양국어를 강의하는 강사였다. 그러니까 나는 십년을 주기로 불가의 용어로 출세간과 세간을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는? 그때였다. 나는 세간의 십년 동안, 내가 어린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가끔 힘들 때면 저녁 잠자리에 들어,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잠시 그 어린 시절 절에서 잠깐 잔 낮잠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원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우리 고전 소설의 신비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6년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낮잠에서 깨어난 것이어야 했다. 이곳은 범어사가 아니라 강원도의 A사여야 했던 것이고, 머리를 깎은 승려가 아니라, 중학생의 어린아이여야 맞았다. 고개를 들어 나는 일주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처음에 느꼈던 것처럼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는 경계처럼 아릿한 무엇이 어려 있는 듯, 여전하게 누워있는 소나무가 돌에 받쳐져 있었다. 친구와 아내가, 그리고 M이 일어서고 나는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일어섰다. 어차피 그 세월은 스스로 생각해내야 했다. 일주문을 걸어 나온 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작별인사를 해야 할 차례였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문득 내가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나는 세 사람을 향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모양의 합장을 했다. 허리를 숙였을 때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성불하십시오’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씨! 형, 또 장난칠거얏!
썰렁해! 임마!
아유, 선배 그만해! 하여튼…틈만나면 안웃길려구 노력해, 변하지도 않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다가,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옷은 다시 여행차림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머리를 만져보았다. 민머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일주문을 벗어나 있었고, 여전히 관람객들과 휴가객들이 여기저기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 출가한 거 아냐? 6년 동안 사라져 있었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출가는 웬 출가?
선배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던 것일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었던 것일까. 잠시 다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걸어 내려온 길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석주 위에 다시 기둥을 올린 범어사의 일주문 사이로 그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길을 통과해 오는 사이에 잠시 꿈을 꾸었던 것일까. 다시 나는 내가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삶이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에 시달리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어느 전생엔가는 내게 이 절과 인연이 있어서 그 어긋남을 잠시 살았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내판에는 이 절에 전해오는 윤회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불교박해로 인해 각 절마다 과도한 부역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승려들은 제대로 수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선사가 절 아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보시행각을 하다가는 입적에 들었다. 입적에 들면서 그는 자신이 관리로 태어나, 이 절의 부역을 모두 혁파시킬 것이라고 다음 생을 예언하였다. 그 징표로서 보통 관리들은 절의 안쪽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지만, 자신은 그보다 앞서 말에서 내릴 것이며 자신이 살았던 방의 봉문을 열고나서 절의 부역을 혁파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몇 십년이 흐른 후 한 관리가 와서 그 자리에서 말을 내렸고, 그 방의 봉문을 열었으며, 절의 부역을 모두 없앴다는 이야기였다. 일주문에서 몇 걸음 걸어내려가자 하마석이라고 쓰인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일주문 안에서 천왕문까지의 울창한 길을 올려다 보았다. 누운 소나무들 옆에 울울죽죽 서 있는 죽림에서 꼬리에는 현란한 무늬가 있지만, 올라올수록 엷어지다가 끝내 머리쪽에서는 민머리인 뱀 하나가 스스르 대나무들 사이를 기고 있었다.